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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기생충-빈민의 시각

by 똥이아빠 2020.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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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빈민의 시각

 

1975년으로 기억하고 있는,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꾼 물난리가 있었다. 우리는 마포에 살고 있었는데, 용산에서 서강으로 이어지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기찻길 아래로 거대한 철둑이 이어지고, 철둑 아래로 개천이 흐르는 굴이 두 개 있었다.

우리집은 하천 바로 옆에 허름하게 지은 무허가 판자집이었고, 이때만해도 서울의 도시빈민들이 사대문 밖에 모여 살았다. 아버지가 시내 나들이를 할 때, '문안 다녀온다'고 말하는 것은, 조선시대식 표현이었다. '진짜' 서울은 사대문 안쪽을 말하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우리는 도시빈민이었지만, 방이 무려 세 개나 되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같은 마을의 빈민들 가운데서도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했다. 우리집은 남은 방 두 개를 세를 놓았고, 네 명의 가족-부모님와 우리 형제-는 한 방에서 지냈다.

돌이켜보면, 방이 세 개였던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었고, 엄마에게도 딸이 있었다. 그들이 한동안 집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고-나는 그 형들과 누나와 함께 생활한 기억이 없다-그러자면 방이 필요했을테다. 무허가 판자집을 새로 만드는 건, 쓰다버린 판자와 루핑만 있으면 됐을테니, 남는 땅에 '증축'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집은 우체국 뒤쪽 담벼락에 바짝 붙여 지어서 허섭했지만 안정감은 있었다. 지금 우체국 자리에는 옛날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높은 빌딩이 들어섰다. 개천이 흐르던 자리는 덮여서 도로가 되었고, 옛날의 흔적은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낯선 곳이 되었다.

 

그날, 그러니까,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그 해 2월에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동생은 4학년이 되었다. 엄마는 양은 냄비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다 무좀이 생겨 고생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야매로 배운 침술을 거의 써먹지 못하고 무능한 '기생충'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불과 몇 살이 더 많았을 뿐인데, 그의 모습이나 행동은 마치 80도 넘은 늙은이처럼 보였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미 오전에 그 좁은 개천을 무서운 기세로 거칠고 난폭하게 달려갔다.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온갖 가재도구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걸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저녁이 되어서도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 밤10시가 넘으면서 개울물이 위험 수위의 약 8부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이라야 이불 한 채와 밥해먹을 양은 냄비가 전부였다. 비는 자정을 넘겨서도 폭우로 내렸고, 개천의 수위는 넘치기 직전에 다다랐다. 우리 가족과 이웃들은 모두 집을 떠나 집 바로 옆에 있던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우체국은 그나마 안전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우리는 철둑으로 올라가 물에 잠긴 집을 내려다봤다.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고, 우리집도 지붕만 보였다. 시뻘건 흙탕물과 상류에서 떠내려 온 어느 집의 가재도구들이 떠다녔다. 나와 동생은 철둑에 앉아 생라면을 먹으며 물에 잠긴 집을 내려다봤다. 물은 빨리 빠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고, 수위가 조금 낮아졌을 때, 나는 그 더러운 흙탕물로 들어가 물에 잠긴 집안으로 들어갔다. 장롱이 떠다녔고, 오물과 똥덩어리가 떠다니는 참혹한 장면을 봤다. 

수해를 당한 이재민들은 내가 다니던 마포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는데, 그때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큰형수가 한 번 찾아왔고, 결혼한 누나가 라면 상자를 사들고 왔던 기억이 있다.

물은 빠졌지만, 우리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누나가 살던 서울의 끝자락, 산동네 판자촌 동네로 이사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물난리를 당하는 장면에서 나는 강한 기시감이 생겼다. 그 장면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이미 45년이 지난, 오랜 기억이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집이 물에 잠기고, 살림살이가 물에 떠다니고, 학교에 수용되어 정부에서 나눠주는 식량으로 한동안 연명하던 그때와 영화에서 나오는 상황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서로 다른 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느 사회나 '서로 다른' 가족은 있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종족의 두 가족, 서로 다른 인종의 두 가족,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두 가족,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가족, 노예와 주인으로 구성된 두 가족, 농노와 귀족으로 구성된 두 가족,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성된 두 가족, 범죄자와 경찰이 있는 두 가족, 서민과 조직폭력배가 있는 두 가족, 상민과 양반의 두 가족 등등.

이 영화에서는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이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념이나 체제를 말하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두 가족이 각자 가지고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장치가 바로 '냄새'다. 냄새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의 구조나 계급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향기는 기분을 좋게 하지만, 악취는 불쾌하게 만든다. 기택의 식구들에게서는 냄새가 난다.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 지하방의 퀴퀴한 냄새, 무말랭이 냄새같은 꼬릿한 형언하기 어려운 유쾌하지 않은 냄새. 박사장 가족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그건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향기다. 좋은 냄새는 쉽게 적응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존재가 삶을 규정한다.' 영화는 두 가족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색한다. 박사장은 똑똑한 사람으로, 벤처기업을 시작해 성공한 사업가다. 그는 각광받는 벤처사업가로 유명하지만 오만한 인물은 아니다. 아들에게는 자상한 아빠가 되려 노력하고, 돈 많은 자본가나 부르주아들이 벌이는 난교파티에 가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시간을 보내려는 보통의 직장인 남성으로 보인다. 그는 교양 있고, 지식인이며, 자신이 이룬 성공에 걸맞는 우아한 삶을 살아간다. 

박사장의 아내 연교 역시 '순진한' 여성이지만, 그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무난히 대학을 졸업했으며, 박사장을 만나 결혼해 딸과 아들을 둔 엄마가 되었다. 그에게 삶은 늘 순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거의 다 가질 수 있어서 세상을 보는 눈도 '순진'하다. 하지만 그는 검증된 사람들만 만나며,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부자 친구들과만 어울린다. 

박사장과 영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기택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이 두 가족이 다른 것은 오로지 빈부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든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모르고,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 세계는 저 아래 낮은 곳에 있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세상이며, 찌들고 냄새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박사장 가족은 넓고, 쾌적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우아하게 살아간다. 그 공간은 모던하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항상 따뜻한 물이 나오고, 온도는 늘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며, 집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폐쇄회로 카메라가 24시간 지켜보고 있다. 명품 진공관 앰프와 탄노이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클래식 음악은 어지간한 공연장보다 훌륭한 소리를 내고, 냉장고에는 최고 등급 한우 채끝살이 떨어지지 않으며, 물은 외국에서 수입한 생수만 마신다. 

박사장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그건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때만 그럴 뿐이다. 그들이 허용한 범주 안으로 들어오는 이방인들은 '타인'이고, 그들 세계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며, 낯설고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 경계의 벽은 박사장의 집을 둘러싼 담처럼 높고 견고하며,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다. 낮은 곳에서 지저분하고, 추레하며,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고, 한번도 꿈꿔본 적 없는 세계이며, 그런 세계를 들여다 볼 기회조차 없이 살아왔다.

기택은 농사를 짓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중학교를 겨우 마쳤고, 서울로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모아 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는 많은 일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기택의 가족은 지하 단칸방에 살고, 직업이 없어 생활이 곤궁하다. 빈익빈 부익부의 세계에서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져가고, 무능한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건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런 세계를 직조한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를 가진 소수의 설계에 의한 것임을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빈곤은 인간의 품위와 자존심을 망가뜨린다. 존엄성과 도덕성을 포기하는 건 가난한 사람의 인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물의 존재가 일으키는 필연이다.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비굴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아부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친다. 그래서 기택의 가족이 보여주는 행동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극단의 행동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가난한 자보다 유전적으로 월등하거나, 지능이 높거나, 인성이 고결한 것은 아니다. 돈과 권력이 개인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저마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을 갖춘 존재다. 그렇기에 기택의 가족이 느낀 모멸감은 보이지 않는 냄새처럼 부르주아 박사장의 가족에게서 기택의 가족에게로 풍겨나온다. 박사장 가족이 기택의 가족에게서 지하철 냄새를 맡았다면,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 가족에게서 모멸의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를 맡으면 스스로 비참하고, 초라하며, 존재하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자신이 세상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기생충'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부를 축적한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또 다른 모습의 '기생충'이다. 어느 기생충이 더 악랄하고, 타락한 존재일까.

 

물난리를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누나가 살고 있는 도시 변두리 산비탈 동네로 이사했고, 나는 소년노동자가 되어 공장으로, 공사장으로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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