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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일본영화

이키루 - 구로사와 아키라

by 똥이아빠 202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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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의 '위대한'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현대물. 1952년 발표한 작품이니 70년 전 영화다. 이 시기에 한국은 남북한이 세계 냉전의 극단적 대결의 전장터가 되어 온나라가 쑥대밭으로 변하고, 민중의 주검이 들판과 산등성이에 쌓여가던 때였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고, 미군정의 통치를 받은지 7년이 지났을 때고, 1952년, 이 영화가 발표되던 해에 미군정이 종료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당시 기성세대가 바라본 일본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결과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주인공 와타나베 겐지는 시청의 시민과 과장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가 과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소 30년 이상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을 알 수 있고, 그가 태어난 것이 1900년 전후일테니, 와타나베는 일본 정부가 군국주의화 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일본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식민국가와 그 국민을 노예 취급하거나 2등 국민으로 여기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테다.
게다가 1938년 이후, 일본이 추축국의 하나로 2차 세계전쟁에 뛰어들어 자멸해 가는 과정도 청년 때 지켜봤으니 그의 국가 인식은 군국주의, 반군국주의, 천황제 존속, 천황제 폐지와 같은 첨예한 사회 문제에 관해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인이 자기 나라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갈래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주제이자 핵심인 와타나베 겐지 과장의 인식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들의 불만에 관한 내용이다. 
 
'이키루'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창작이 아니고,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과 자기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 영화 '이키루'는 여러 사실과 창작의 중첩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톨스토이가 41세 무렵, 한창 장년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톨스토이 자신도 대지주로, 귀족으로, 유명한 작가로 활동할 때, 갑자기 심각한 무력감에 휩싸이면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83세에 사망했는데, 그가 가장 건강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갑작스러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것은,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전쟁과 평화] 집필을 마친 다음이었는데, 자신이 느낀 죽음의 공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고, 분명히 알 수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고백록] 등에서 이때 느꼈던 죽음의 공포를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40대 이후 톨스토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알고 지내던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 판사가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죽는 걸 보면서 작품을 구상하게 된다. 자신이 느꼈던 '죽음'의 감정과 젊은 판사가 병으로 죽은 사건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에다 톨스토이가 40대 후반이 되면서 그의 친척들 가운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프랑스에서 기요틴에 목이 잘리는 사람들, 형이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을 모두 직접 겪게 된다.
톨스토이가 40대에 강력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은, 그 자신은 정확히 인식,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으나 톨스토이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어머니는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사망했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할머니는 열 살, 고모는 열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아기 때부터 소년 시기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세상을 뜨는 걸 보면서, 톨스토이는 아마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중에 톨스토이의 삶이 농노들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계몽적 활동과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영지를 팔아야 하는 극단적 형태의 분열적 자아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삶이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균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어릴 때 겪었던 여러 죽음의 모습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후 톨스토이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죽음'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하고,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죽음이 주요한 모티프가 된다. 톨스토이는 작가로서 자신의 삶에 나타난 수많은 죽음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어릴 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무의식적 행동을 했고, 자기를 둘러싼 죽음의 공포, 고통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톨스토이는 판사 이반 일리치가 부르주아의 집안에서 태어나 완벽하게 부모가 바라는 모습으로 성장해,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범생이자 부르주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의 모토는 '쉽고, 편하고, 고상한 삶'이었다. 그는 연봉 5천루불을 목표로 삼았고, 그 이상의 조건이 되는 곳이라면 직책에 관계 없이 관료로 살아가는데 만족했다.
부르주아의 삶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는다. 그가 옆구리를 다쳐 통증이 시작되면서 점차 격렬한 통증과 기괴한 몰골로 변해가면서, 급격히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내리 덮치고 있는 걸 느낀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죽음'은 구체적 실체이자 실존이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실존주의' 철학으로 정리되어 나타나지만, 톨스토이는 당대 부르주아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모티프를 가져올 수는 있었겠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근본에서 다르게 접근한다.
이반 일리치가 자기의 죽음을 객관으로 바라보면서 깊이 성찰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면, '이키루'에서 와타나베 과장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각성을 통해, 관료 조직인 일본 공무원의 현실을 비틀어 블랙코미디로 만들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그 자체를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죽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신의 관념과 느낌, 감정을 고백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느끼며, 죽음의 순간을 인식, 인지한다. 죽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는 이반 일리치의 노력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애타는 심정의 반증이다.
반면, 와타나베는 의사가 '가벼운 염증'이라고 설명하는 걸 믿지 않는다. 심각한 병일수록 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는 어떤 환자의 말을 미리 들었기 때문에, 와타나베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그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암'이 퍼져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 와타나베의 확신은 관객에게도 역시 딜레마로 작용한다. 즉, 관객은 의사의 말도 들었고, 와타나베에게 '심각한 병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고 전한 다른 환자의 말도 들었기에, 와타나베가 스스로 '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에 대해 양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관료주의 체제를 확립한다. 일본이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천황제라는 걸림돌이 근원적으로 작용한 것도 있지만, 근대 이전까지 막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지역의 막부들이 통일 일본에서는 관료로 변신한 것도 있다. 즉, 단 한번도 내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일본은, 천황제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관료가 실질 행정과 정치를 이끌어가는 국가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한때 군국주의가 일본을 지배하기도 했고, 군국주의는 전쟁에서 패하자, 관료주의의 뒤로 숨어 모습을 잠시 감추게 된다.
영화에서 시청의 공무원들은 시민들이 제기하는 민원을 계속 다른 부서로 이관하면서 핑계를 댄다. 어떤 민원이든 다른 부서로 떠넘기기만 하면 되는 무사안일, 복지부동한 공무원의 행태를 비판하고 계몽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내용이다. 와타나베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가 열성으로 나서서 완성한 마을 놀이터를 두고 부시장을 비롯해 각 부서의 공무원들이 와타나베의 공을 깎아내리고, 자신들이 그 일을 주도했다고 변명하는 걸 보면서, 당시 일본 사회의 시민들이 가졌던 불만과 공무원들의 안일함, 무능, 나태함을 비판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공무원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을 실행했지만, 그 이후 일본 공무원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이미 50년대 초반에 공무원의 무능과 나태를 고발한 이 영화의 내용은 70년이 지난 현재의 일본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회 특히 공무원 조직에서는 여전히 도장과 팩스를 쓰고 있는 걸로 보도되는데, 정보화사회인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 관료조직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단지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얼마나 유연하고, 자기혁신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가를 평가하는 기초자료로만 봐도, 일본의 공무원과 관료 조직은 큰틀에서 70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이 대를 이어 세습하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볼 수 있고, 공무원 조직이 경직되어 있고, 보수적이어서 내부 혁신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여진다.
 
영화에서 그나마 희망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은 와타나베가 과장으로 있는 '시민과'의 막내 공무원 도요인데, 그녀는 공무원 생활에 염증을 느껴 사직서를 낸 다음, 공장에 취업한다. 질식할 것 같은 공무원 조직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것인데, 와타나베는 거리에서 우연히 도요를 만난 이후, 그녀의 활달함에 빠져든다.
결국 와타나베가 '죽음'을 극복하게 되는 동기도 도요와의 만남을 통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다. 이것은 구세대, 기성세대인 와타나베가 젊은 세대의 활동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는 것으로, 기성세대의 나태와 무능을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 개인적 성찰에 천착했다면, 와타나베는 '죽음'을 앞두고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와타나베의 생각과 실천은 좋게 말하면 사회적 실천이지만, 여기서 개인의 각성은 보이지 않는다. 즉, 와타나베의 죽음까지도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계몽적 실용으로 수단화, 도구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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