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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일본영화

피학의 체제에 안주한 사람들

by 똥이아빠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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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의 체제에 안주한 사람들

-소노 시온의 영화 '사랑 없는 숲'과 '차가운 열대어'

 

일본 영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와 분명하게 다른 특징이 있다. 문학에서도 '사소설'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만큼, 일본에서 '개인'의 삶과 기록은 의미를 갖는다. 일본이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서구에서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봉건적 체제에 길들여진 '계급으로서의 개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귀족, 사무라이, 평민으로 굳어진 계급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곧 죽음을 당한다는 엄혹한 질서 속에서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체제를 인정하고, 가장 안전한 삶을 위해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절대 복종하며 살아왔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한 이후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천황제를 유지했고, 그들의 의식은 봉건제 시회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철저한 계급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스스로 금기로 여기는 사회가 일본이고, 직업은 대를 이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일본에 100년 넘은 가업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직업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죽음의 공포는 수백년을 이어오면서 형성된 것이고, 평민은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

일본의 권력집단은 계급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천황을 이용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사회적 금기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즉, 개인에게 가장 은밀하고 보호되어야 할 '성'을 개방함으로써, 개인의 시선을 낮은 차원으로 묶어두려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것이다.

일본은 성이 매우 개방된 나라로 알려졌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그들은 한편으로 왜곡된 성 문화와 뒤틀린 성 의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50세 이하 청년 남성의 약 40%가 성경험이 전혀 없다고 한다. 성 상품이 범람하고 있는데, 정작 젊은이들은 '섹스'를 하지 못하는 상황은 뭔가 기괴하다.

일본은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여성의 성상품화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곧바로 여성을 비하하고, 성 차별을 일상화하며, 여성을 도구화, 수단화하게 된다. 일본은 포르노, 준포르노가 공공연히 판매되는 사회이며, 외향적으로는 성이 개방된 사회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이 억압되어 왜곡된 형태로 발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비판이 없는 사회다. 일본도 192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청년학생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져 반정부투쟁을 벌였던 기록이 있다. 앞서 나갔던 민주주의 운동은 끝내 좌절되었다. 원인은 다양했지만, 일본 시민사회가 진보적 테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일본국민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그동안 겪었던 사회적 경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권위와 폭력에 짓눌리며 수동적으로 살아왔고, 계급을 뒤집는 혁명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살았다.

소노 시온의 영화는 이런 일본의 역사가 일본인의 삶을 얼마나 비틀고, 기형적으로 만들었는가를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찾는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일본에서 실제 벌어진 사건이고, 영화는 그 실제 사건보다 오히려 수위를 낮추고 덜 혐오스럽게 표현했음에도, 관객은 이 영화를 참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하다.

일본 사회는 우리가 보기에 답답할 정도로 수동적이고 융통성이 없으며 비주체적이다. 앞에서 말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 대해 쉽게 굴복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여기에 가족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었으며, 사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히키코모리가 되어 사회로부터 스스로 격리되었다. 이런 현상은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현상을 만들고, 정보가 불균형하게 흐르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파편화되고 비대칭으로 정보가 흐르는 가족 사이를 뚫고 들어와 가족을 이간하며, 사람을 도구로 쓰는 싸이코패스가 나타난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싸이코패스가 한 가족을 포함한 여러 명을 동시에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가족을 서로 살해하도록 명령하며, 가족은 서로를 증오하면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해한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특이한 행태는,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 미국의 인민사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수십, 수백 명의 생명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미개함과 나약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 또는 실제 사건이 사이비교주가 벌인 집단 학살(도 물론 끔찍하지만)보다 더 잔혹한 이유는, 가족이 서로 살해하도록 조종했다는 것, 싸이코패스의 말을 듣고 자기 가족을 말할 수 없이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점이다.

피를 나눈 가족이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의 이간으로 원수보다 더 저주를 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에서 원한이 없음에도 살해를 할 수 있을까.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일본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고, 그 내용이 너무 참혹해서 언론에 사실을 모두 보도하지 말도록 정부에서 통제할 정도였다.

소노 시온의 영화에서 고어한 장면은 비위 약한 사람은 참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과격하다. 그건 당연히 감독이 의도를 갖고 찍은 것이다. 단순히 선정적 고어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과격한 고어보다 현실의 참혹함이 훨씬 더 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가족 사이로 파고 들어와 이간하고,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든 다음, 가족끼리 잔혹하게 살해하라는 명령을 하는 싸이코패스는 이 가족을 장악한 다음 가족과 친지를 통해 돈을 뜯어낸다. 거미가 진드기의 알맹이를 모두 빨아먹고 껍데기만 뱉어내는 것처럼, 싸이코패스는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의 물체에서 알맹이-재산-를 모두 빼먹고 서로 살해하도록 부추긴 다음, 다른 가족을 찾아가는 것이다.

싸이코패스는 돈과 살인이 목적이라 해도,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가족-은 대체 어떤 심리 때문일까 의문이 생긴다. 그들도 여느 사람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시민이고, 성실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직장인, 주부, 학생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끝내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할 때까지,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싸이코패스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진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사랑 없는 숲'에서 친구와 가족은 서로 전기고문을 하거나 당하는데, 그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거부하거나 도망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이 보여주는 비정상의 행위를 싸이코패스의 '세뇌'에만 원인을 두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일본사회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복종, 권력(폭력) 앞에서 무조건 굴종해야 하는 역사적, 사회적 유전자 때문은 아닐까.

단 한 번도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한 적이 없는 일본사회와 일본인들이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삶에 길들여져 스스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본의 포르노에 오히려 가학적 성해위를 표현하는 장면이 많고, 그런 성 상품이 더 잘 팔리는 것도, 일본인에게 내재한 피학적이고 피동적인 성향이 가학적으로 발산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 정치가 극우로 치닫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 이후 방사능 오염 문제가 심각함에도 일본인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아베 정부는 이미 진작 쫓겨나야 했지만,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보인다. 이들은 마치 마른 우물에 갇힌 쥐새끼들처럼, 도망갈 곳이 없어서 서로를 물어 뜯다 같이 죽음을 맞이하자는 태도를 보인다. 어차피 모두 죽을 것이니, 그 죽음을 즐기고, 일본 뿐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온전히 평화롭게 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발악을 하듯이, 일본은 군비를 확장하고, 헌법을 바꿔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고 발악하고 있다.

즉, 피학적 성향의 극단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자멸을 즐기되, 공멸하자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가족이 가족을 살해할 때, '너는 죽을 짓을 했어'라고 살해를 합리화한다. 아베 정권도 자신들이 저지른 방사능 오염 문제를 두고, 자기들은 할만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발광이다. 즉, 일본은 집단(사회)으로 미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자신(일본)을 피해자로 전환하는 심리적 기제를 작동한다. '나(우리)도 피해자'라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명확하게 피학적 태도를 가진 가족 사이에서 서로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상대(가족)를 살해하는 심리적 동기와 일치한다. 

제3자의 시각으로, 이들-피학적 가족과 일본사회-은 분명 비정상이다. 이들은 미쳐가고 있으며, 자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하지만 그들-피학적 가족과 일본사회-만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일본인의 삶에 절대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지진, 태풍, 화산폭발 그리고 정치다. 삶의 태도에 자연재해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여기에 극우 정권이 방아쇠 역할을 하는데, 일본인의 피학적 심리상태는 수백, 수천년을 이어온 일본의 자연에서 발생한 자연재해의 트라우마로 볼 수 있다.

자연재해의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진, 태풍, 화산폭발처럼 강력한 재해가 자주 반복하면서 일본인의 심리는 자포자기, 암울한 미래, 불안정한 삶이라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엄혹한 계급구조까지 더해지면서, 개인의 삶이 피동적, 수동적 삶으로 이어지고, 폭력에 길들여지는 피학의 체제를 만든 것이다.

영화는 일부 장면에서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어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이보다 더 잔인하다. 소노 시온 감독은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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