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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y 똥이아빠 2022.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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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시드니 루맷 감독의 연출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데뷔작이면서 명작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이 1957년에 발표되었다. 시드니 루맷 감독이 1924년생이니 100살 가까운 나이인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여러 의미로 놀랍다.
현역 감독으로 100세까지 연출을 하는 시드니 루맷 감독의 열정이 놀랍고, 이 작품,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며, 작품으로도 상당히 훌륭하다. 다른 감독이나 작품과 비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비교를 통해 다른 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
 
이 영화 시나리오는 켈리 매스터슨이 썼는데, 이 작가는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설국열차'의 시나리오를 봉준호 감독과 함께 쓰기도 했다. 즉, 봉준호 감독이 인정한 시나리오 작가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기본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보면, 코엔 형제가 떠오른다.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이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실행한 범죄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코엔 형제의 시그니처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코엔 형제와 다른 점은 블랙 유머가 없다는 거다. 블랙 유머가 빠진 코엔의 영화라고 해도 좋은데, 그러다보니 관객은 이 심각한 상황을 비껴갈 수 없는 난감한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보면서도 마음이 몹시 불편한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 중산층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 단란하다. 노부부는 도시 변두리에서 알뜰한 보석상을 경영하고, 두 아들은 각자 결혼해 잘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형 앤디는 대기업 중견 간부로 일하지만, 마약중독에 공금을 횡령하고, 동생 행크는 이혼한 아내에게 양육비를 밀린 상태다.
앤디와 행크는 형제지만 두 사람은 매우 다르다. 앤디는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회사에 취직해 높은 직위에, 좋은 사무실을 가진 지식인이지만, 동생 행크는 대학을 졸업했는지 분명하지 않고, 지금의 상태를 보면 좋은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극의 시작은 앤디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 번듯한 중산층이지만, 마약중독에 회사 공금을 횡령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는 친아들이 아니고, 입양한 아들이죠?'라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 그건 앤디의 성장 과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형제 가운데 행크를 조금 더 보살폈다는 걸 알 수 있고, 그건 행크가 앤디의 동생이면서, 앤디 만큼 똑똑하지 못했기에 부모가 보기에 행크가 좀 더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똑똑한 앤디는 스스로 망가뜨린 삶을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범죄를 계획한다. 아이디어는 앤디가 내고, 실행은 동생을 시키는 걸 보면, 앤디는 인성이 야비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동생 행크는 괜찮은 인간이냐면 그렇지 않다. 행크는 이혼한 상태인데, 형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즉 형제는 도덕적, 윤리적 결함을 스스로 만들며 살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부모 살해는 패륜이지만, 영웅 신화에서 부모 살해는 영웅의 성장에 필연적 과정이다. 이 작품은 영웅 서사를 모티브로 하지 않고, 이들 형제가 영웅을 상징하지도 않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 '개인'의 문제를 다룰 때, 부모 살해를 통해 과연 '인간'과 '개인'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공공의 적'에서 부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태연한 싸이코패스 아들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부모, 자식이라는 고전적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 상황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대사회에서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동기는 '거의 대부분' 경제적 문제와 관련 있다.
적은 경우, 부모 가운데 특히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엄마와 자식, 형제들이 피해자가 되어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로스트 인 더스트'에도 형제가 은행강도가 되어 은행에서 돈을 터는데, 형 태너는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오랜동안 감옥에 갔다 나온다. 
태너의 행동은 가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아버지를 죽인 행위는 변함 없으므로, 태너의 내면에 죄의식이 남아 있고,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죽음으로써 동생과 동생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갖게 된다.
 
반면, 경제적 이익을 욕망하며 부모를 살해한 자식은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건 자기의 욕망이 부모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 도덕과 윤리를 짓밟고 올라선 이상,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이성은 감각을 잃게 된다.
앤디의 경우,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살해하지 않았기에, 어머니가 강도의 총을 맞고 사망하자 슬픈 척을 하지만, 마음 깊이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보석상에 있는 돈과 보석을 갖지 못해 횡령한 회사 자금을 막지 못하는 것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행크도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해친 것은 아니어서 괴롭긴 해도 자신을 '살인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형제는 어머니를 죽인다는 의미를 '물리적 살인'만으로 한정해 생각하려 한다. 그건 본능적 태도이기도 한데, 총이나 칼로 직접 가해한 걸 '살인'이라고 생각해야만 자기가 '살해'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방어 차원에서 살해의 개념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형제가 부모의 보석상을 털기로 계획을 세운 그때부터 이미 살인사건은 예정되어 있었고, '완벽한 계획'일수록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보통의 형제라면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그것이 어떤 가게이든)를 대상으로 강도짓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이게 상식이다. 앤디가 부모의 보석상을 대상으로 강도짓을 하자고 생각한 것과 그 이야기를 듣고 동의한 행크는 그 순간 이미 사회의 금기를 건드렸다.
 
계획이 빗나가고, 파국의 문이 열리자 형제는 당황한다. 행크가 고용한 강도는 어머니가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고, 범인의 처남이 찾아와 1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앤디는 회사에서 재무감사를 나와 현장 조사를 시작한다고 통보한다. 앤디가 횡령한 돈은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조사를 시작하면 곧 발각된다.
형제는 범죄를 모의하고 추진하지만, 그들은 범죄자들이 할 수 있는 전문성은 갖추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하는 행동들이 모두 단서로 남는다. 랜트카를 빌릴 때 본명을 쓰고, 사회보장번호를 제시하며, 신용카드로 결제한다던가, 장물을 매입하는 장물아비를 찾아가 자기 명함을 놓고 오는 행동은 범죄자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형제는 그런 사소함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모르고 행동한다.
이런 단서들은 결국 형제가 저지른 범죄를 드러내게 되고, 형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대가를 치른다.
 
이 작품에서 시작과 마지막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로 드러난다. 앞부분이 부모살해의 알레고리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욕망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뒷부분에서는 부모에 의한 자식살해를 통해 현대사회의 타락과 인간의 보편적 전통을 지키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부모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데, 이건 사회적 관습이나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유전적 효과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즉, 부모 세대의 희생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려는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이라는 건 진화생물학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행위는 더 이상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사회진화적 행동일 수 있다. 그건 자식의 행동과 행위의 결과가 반사회적이거나, 부모가 바라는 긍정적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 자식의 유전자가 사회에서 이어지는 것보다, 폐기되는 것이 사회의 진화에 긍정적이라고 판단하면, 자식의 생명을 부모가 마감함으로써, 유전자의 대를 끊는 것이다.
보통은 자식의 반사회적 행동, 행위를 저지하거나 마감하는건 사회의 규범과 규칙에 의해 통제되지만, 이 영화처럼 부모(여기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는 경우, 부모도 도덕적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관객이 끝까지 마음이 불편하고 윤리적 딜레마에 시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식의 입장,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비난하는 건 당연하지만, 부모(아버지)를 비난해야 하는지, 그의 행위를 옹호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상호 살해는 인간 사회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현상이지만, 한편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설을 안고 있다. 이미 서양에서는 인간의 창조 이후 가장 먼저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카인은 쫓겨난다. 시간이 흘러 카인은 조카에게 살해당하는데, 가족 살해는 고전 설화의 기본이었다.
설화 이전 시기 즉,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인류는 집단혼, 식인, 동족 살해와 같은 행위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씨족 사회의 행동들이 점차 규칙을 만들게 되고, 씨족과 씨족의 결합으로 부족이 탄생하면서 사회의 규율, 금기를 통해 무질서를 통제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현대사회에서 근친혼, 근친상간, 식인, 살해를 금기로 하는 건 이런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집단이 생존하는데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결과다.
그럼에도 현대에서 여전히 친족 살해와 근친 심지어 식인 사건이 발생하는건, 인류의 유전자에 여전히 미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즉 사회화되지 못한, 문명화되지 못한 인류의 유전자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욕망의 크기와 초라한 현실의 간극에서 불행한, 불특정한 개인을 통해 발현될 때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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