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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출판/새로나온책

중편소설-죽도사설

by 똥이아빠 201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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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미년부터 임오년까지 경연청 사경과 승정원 주서의 일을 맡아보았다. 식솔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올라와서 부족한 배움을 더하고자 율곡 이 이 선생과 우계 성 혼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나의 앞길과는 맞지 않았는지 내가 조정에 있을 때, 이른바 동이니 서니 하는 당이 갈라지고 대신들이 서로 헐뜯고 음해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을해년에 시작된 파벌싸움은 사간원 대간 허엽과 우의정 박순이 동인과 서인의 영수로 받들어졌는데, 실상은 사간 김효원과 이조참의 심의겸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살주옥사(충청도 재령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종이 양반 주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는 사건)로 파벌은 더욱 심해졌다. 동인과 서인이라고 구분한 것은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이 집이 정릉동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이런 파벌을 짓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음으로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동인은 대개 나이가 젊고 총민하였다. 나 역시 젊은 나이였고 배우는 일과 명예로움을 지키는 절개가 있어야 한다고 믿어서 마음속으로는 호감이 있었다. 서인은 이름있는 사대부들이 많았고 나이도 모두 선배들이었다. 하지만 관직에 오래있으면서 나태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 가운데 나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어찌 알았으랴. 당대의 문장가이고 율곡과 우계와 허교를 하고 있던 송익필, 한필 형제가 있었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서인의 계략이 모두 이들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율곡은 동인과 서인의 파벌을 막고 당쟁을 조정하고자 많이 노력했으나 결과는 그에게 서인의 영수라는 달갑지 않은 명칭이 주어졌을 뿐이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서인의 자제들은 대개 율곡과 우계의 문하생들이었고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내가 한성에 올라와 관직에 있고, 율곡이나 우계의 문하에서 경전을 논하면서도 미륵산 밑에서 만난 김명석과 연락을 끊이지 않았다. 한성에서도 세상에 불만을 품거나 기피하여 미친놈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거사들이 많았는데,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이몽학과 임 제가 있었다. 이몽학은 왕족의 출신이나 서얼로 태어나 세상에 불만을 가득 품은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 두살 연상이었고 잘생긴 선비였지만 한번 화가 나면 눈에서 불길이 쏟아지는 것처럼 무서웠고 목소리가 갈라져 마치 말마디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왕의 존엄함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다.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임 제는 호를 백호, 겸제로 쓰고 예조정랑까지 지낸 사람으로 을해년에 있었던 당파싸움이 싫어서 벼슬을 버리고 신선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시와 문장은 가히 놀라운 것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쾌활하고 호방한 성격이 장부로서의 기품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 이런 사람들과 만나면서 조정의 일로 토론도 하고 지방관의 작폐도 역설하면서 서로의 뜻을 합해갔다.

조정에 나가면서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가까이 하는 친구로는 중겸 백유양이 있었다. 그는 임신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얻었는데, 기풍이 당당하고 마음이 곧아서 선뜻 마음이 끌리었다. 그는 도호부사 백인호의 아들이고 휴암 백인걸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들 백씨 가문의 당당함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만, 백유양과 사귀게 된 동기는 또한 나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이다.

백유양에게는 진민, 흥민, 득민, 수민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수민이 내 형의 사위가 되었다. 조카사위인 수민을 내가 가르쳤으니 유양은 내 제자의 아버지이다. 유양과 나는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서로 말을 놓고 오랜 지기처럼 평교를 하게되었다.

계미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소재 노수신은 우의정으로 있었는데,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로 대학자이며 뛰어난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 비하면 천박하고 어리석어 감히 마주 서서 말을 나누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애쓰는 모습을 어여삐 여겼는지 갑신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옥당의 청직에 들어갈 때, 소재 선생의 추천이 있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계미년에 뢰암 정언신 선생이 함경도 순찰사로 발탁되어 나갔다. 오랑캐 니탕개가 경원, 아산, 안원 등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마절도사로 이제신이 나가 있었는데, 다시 뢰암으로 하여금 돌아보게 한 것이다. 정뢰암 선생은 나의 아버지뻘이나 된다. 하지만 그도 전주에서 태어났고 본관도 나와 같아 서로 믿고 의지하는 바가 많았다.

내가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부터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사소한 문제로도 서로 주장을 내세워 한치도 지지 않으려고 하니 나라 일은 뒷전이고 당파싸움으로 하루를 보냈다. 임금께서도 파당을 짓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시지만 이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로 주장하는 것이 한편으로 들으면 옳고 또 한편으로 들으면 그르다. 한쪽이 아주 옳거나 아주 그르다면 파벌이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대신들의 사사로운 이기심 때문이다. 나라 일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음에도 서로 작당을 하고 무리 지어 싸움을 하는 것은 나라의 평안함보다는 자신들의 평안함과 공명을 더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서로 헐뜯고 싸우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만, 젊은 관리들은 혈기방장하고 구습을 타파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선배 관리들은 체면과 형식을 따지고 일신의 평안함을 꾀하려고 하니 정작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뿐이다. 조정 대신들은 호의호식하며 가마를 타고 대궐을 드나든다. 하지만 백성들은 봄가뭄에 여름 홍수, 가을 서리에 겨울 혹한으로 일년 내내 시름을 앓고 있었다. 특히 근년에는 하늘에서 붉은비가 내리고 날 것들이 하늘을 덮을 정도로 몰려다니고 개구리가 마치 황소울음 소리를 내는 등 이상한 조짐들이 보이고 있었다.

갑신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른바 옥당에 든 것이다. 젊은 문관이라면 한번쯤은 꼭 들고 싶은 동경의 대상인 옥당. 나로서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송강 정철이 대사헌이 되었고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 바로 내가 수찬이 되던 해였다. 나는 스스로를 미천하고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함이 많고 때로 실수도 저지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성격이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조금은 모난 것이어서 때로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못하거나 틀린 것을 바르다고 말하는 짓은 절대 못한다. 또한 듣는 사람의 귀에 달게 비위를 맞추는 일도 없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내 성격이었다. 다만 젊어서 아직 천학비재한데다 혈기만 방장하여 여러 대신들의 심사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별없이 헛소리를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조정 대신들의 당파싸움과 관료들이 부패와 무능함을 보면서 먼저 백성들을 생각했고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떻게 해서든지 알리고자 했다. 또한 율곡이 대학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의반 타의반 서인의 영수가 되어 젊은 관리들의 앞길을 막고 눈먼 늙은 대신들을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나라 일의 처리를 논하는데 있어 공평무사하고 적극적으로 주장을 내세우는 동인들과는 달리 서인들은 온화하기는 하지만 무력하고 때로 편견에 사로잡힌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동인이니 서인이니 할 것은 없었지만 옳은 쪽의 주장을 들라면 당연히 동인의 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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