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폴 보허벤이라는 걸 알았다. 어쩐지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낯익었다. 주인공 미셸은 성공한 기업(게임 회사)의 사장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그는 잘 콘트롤한다.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앞부분과 미셸의 삶의 배경은 그가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해도 좋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어릴 때의 모습과 사건까지 등장하는 건 오직 미셸 뿐이다. 하지만 제목은 '엘르'라고 되어 있는데, 원작소설의 제목이 '오...'였던 것에 비해 뭔가 의미가 있을 듯 한데, 실제로 이 단어 '엘르'가 등장하는 건 딱 한 번, 미셸의 아들 빈센트의 여자친구가 아이를 낳은 병원에서 모유수유를 하기 위해 가슴을 드러낼 때 아주 잠깐 미셸의 눈에 띄는 것 뿐이다.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단어가 빈센트의 여자친구에게 어떤 의미인지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서, 충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매우 많은 복선과 인물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이후에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심하게 충격받지 않는 듯한 미셸의 모습,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깨진 접시와 컵을 쓰레기통에 주워 담는 행동은 그가 매우 독립적이고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는 것을 드러낸다. 넓은 고급주택에 혼자서 살고, 이혼한 남편과 친구처럼 지내며, 역시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엄마를 가끔 찾아가고, 속 썩이는 아들 빈센트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유하고 성공한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는 미셸이지만,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참혹한 과거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이웃의 한 가족을 살해한 살인마로 감옥에 갇혀 있다. 과거의 장면은 TV에서 보여주는 뉴스방송으로 짧게 보여주지만 그 끔찍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 장면은 미셸이 당하는 성폭행 장면과 매우 흡사해서 관객은 두 사건 사이에 공통점을 느끼게 된다. 즉, 미셸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끔찍한 살인과 미셸이 당한 난폭한 성폭행이 오버랩되면서 가해자-미셸은 아버지를 도왔다는 혐의로 아이 때부터 비난받았다-가 피해자로 전이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또 다른 복선으로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미셸을 성폭행했던 복면 쓴 남자가 이웃의 친절한 남자였다는 것과 사실 미셸은 그 이웃집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 중산층의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그 이웃집 남자가 사실은 복면을 쓰고 여성을 성폭행하는 범죄자였다는 것은, 미셸의 아버지가 평범한 이웃으로 다른 이웃에게 착하고 선량한 남자로 비쳤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즉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으며 가까운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미셸에게는 이혼한 남편, 가장 친한 친구(동성)의 남편, 사실을 알기 전까지의 이웃 친절한 남자(기혼자) 세 명의 남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미셸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가 살인마의 딸이라는 사회적 비난 속에서 성공한 삶을 이룬 것과 연관이 있다. 그는 경험을 통해 경찰과 기자는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고 확신하고 모든 사건-자신의 성폭행, 회사의 해킹-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미셸은 그 자신의 삶도 복잡하지만, 엄마의 젊은 남자 애인, 아들 빈센트의 여자친구가 낳은 흑인 아이, 회사에서의 해킹 등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사건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가석방 공판을 받는다는 아버지의 뉴스가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복잡하게만 보이는 사건들은 하나씩 자연스럽게 또는 어쩔 수 없이 해결된다. 엄마는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아버지는 감옥에서 자살한다. 아들 빈센트는 여자친구와 티격거리며 살아가고, 가장 친한 여자친구에게는 그 남편과의 관계를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을 성폭행한 이웃 남자는 아들 빈센트가 처리한다(하도록 미셸이 계획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관객은 미셸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피가 살인마의 피일지, 싸이코패스의 피일지, 아니면 천재의 피일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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