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맨스 그레이
1963년 개봉. 신상옥 감독 작품. 배우들이 굉장하다. 김승호, 최은희, 한은진, 신영균, 김희갑 등이 등장한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당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려는 생각에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의 시간이 지난 서울은 여전히 황폐하다. 도심에 빌딩이 몇 채 보이긴 하지만 도로는 문안(사대문)의 중심가 일부일 뿐이고 차는 드물게 다닌다. 도로에 차선이나 횡단보도, 신호등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수의 집과 사장의 집은 퍽 고급해서, 그 시기의 부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볼 수 있다. 기혼 여성들의 다수는 여전히 한복을 입고 다니는데, 한복 위에 모피코트를 입는 모습을 보면, 부자들은 외래 문물-이래봐야 거의 미국의 문화겠지만-을 적극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주제는 바람을 피던 기혼 남성-교수와 사장-이 오히려 술집 여성들의 올바른 행동으로 정신을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교훈의 내용인데, 이 영화를 좀 들여다보면, 6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가를 알 수 있다.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전업주부이거나 술집 여성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이 부유한 상류층과 술집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시 서민의 보편성을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술집 여성은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로, 자신의 의지보다는 가난에 떠밀려 술집에서 술과 웃음을 파는 것이다. 여기에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르주아 남성들이 술집을 드나들며 젊은 여성과 사귀거나 살림을 차리는데,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 만일 기혼여성이 연하의 남자를 만나서 사귀고, 살림을 차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성매매와 축첩은 용인되지만, 똑같은 행위를 여성이 할 때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난받는다. 이것은 사회가 분명하게 이중의 잣대,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봉건적 윤리관과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의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업주부인 여성은 남편이 다른 여성과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남편을 닥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 자신이 남성(남편)의 외도와 불륜에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성책임론은 지금도 등장하는 오래되었지만 강경한 레파토리로, 여성이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여성의 치마가 짧다, 여성이 먼저 꼬리를 쳤다, 여성이 밤늦게 다닌다, 여성의 화장이 짙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등장한다. 
기술문명은 분명 발달하고 있지만, 가부장제의 공고한 구조는 60년대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난한 여성들은 술집에서 일하며 남성들에게 웃음과 돈을 팔아야 하는 현실도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여성을 대상화, 사물화, 도구화하는 시각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60년대의 말투는-성우의 더빙이긴 해도-서울 사투리가 분명하게 남아 있다. 서울말이 표준말로 정해진 것은 우연일 뿐-서울이 수도로 지정되었기 때문-서울말이 더 좋거나,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언어에서 우열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어떤 지방의 말을 표준으로 정하는가는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박정희가 수도를 대구로 정했다면 표준말은 대구지방의 말이 된다) 지금 북한(주로 평양)에서 쓰는 말과 60년대 서울에서 쓰던 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평양은 평안도 사투리지만, 평양, 개성, 서울은 옛날에 비슷한 사투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말이 듣기에 부드럽고, 점잖게 느껴지는 점은 있으나 그것이 다른 지방의 말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여주인공은 최은희로, 서구적 미인의 외모를 지닌 배우다. 술집 여성이지만 직전에 학생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기둥서방이 있는데, 그녀가 돈 많은 교수에게 울궈낸 돈을 기둥서방에게 뺐기고, 신세를 한탄한다. 여성의 삶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회의 억압이 여성의 존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여성이라도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고, 집안에서도 아들은 공부를 시키고, 딸은 공장에 보내는 부모들의 비틀린 가부장제 인식으로 피해는 오로지 여성들이 짊어지게 된다.
영화는 유쾌한 코미디지만 마냥 웃고 보기에는 마음이 편치않다. 여성들의 처지가 남성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 한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뫼비우스  (0) 2018.11.20
[영화] 서울의 휴일  (0) 2018.11.15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0) 2018.11.15
[영화] 로맨스 그레이  (0) 2018.11.15
[영화] 맨발의 청춘  (0) 2018.11.13
[영화] 살인마  (0) 2018.11.13
[영화] 휴일  (0) 2018.11.04
[영화] 암수살인  (0) 2018.10.06
[영화] 공작  (0) 2018.08.15
[영화] 그날, 바다  (0) 2018.05.22
[영화] 머니백  (0) 2018.04.25

Posted by 똥이아빠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