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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와킨 피닉스의 두 영화

by 똥이아빠 2019. 10. 20.

와킨 피닉스의 두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와 ‘조커’

 

와킨 피닉스가 주연한 ‘조커’가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는 처음 영화제 대상(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이 영화가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고, 한국에서 개봉과 함께 관객이 몰렸으며, 관객들의 관람평도 대개 칭찬이었다.
와킨 피닉스의 변신-몸무게를 23kg이나 줄인 것-과 그의 연기가 돋보인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여러 편의 조커가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와킨 피닉스 이전에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로 연기한 히스 레저의 연기는 조커 원조에 해당하는 배우 잭 니컬슨도 인정할 정도로-잭 니컬슨은 그동안 조커 역할에서 자신을 능가할 배우가 나오지 않았다고 조금 시건방진, 그러나 옳은 소리를 했었다-히스 레저의 연기는 훌륭했는데, 이제 와킨 피닉스의 ‘조커’도 그만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와킨 피닉스가 주연으로 연기한 영화가 영화제에서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조커’ 이전에 출연한 영화인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도 와킨 피닉스는 매우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조커’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와킨 피닉스의 이 두 영화는 주인공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은 물론, 닮은 부분이 매우 많아서 두 영화의 주인공을 비교 분석하는 재미와 의미가 있다.

 

트라우마
‘너는 여기에 없었다’와 ‘조커’의 주인공은 나이 차이가 있다. ‘너는...’에서 주인공은 50대 남성이고, ‘조커’에서는 30대 남성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어머니만 모시고 살고 있다. 가난한 백인 남성으로, 이들은 학교 교육도 적게 받았고, 도시빈민이며, 친구도 거의 없는 외톨이다.
무엇보다, 이 두 남자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폭행과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데, 어머니도 똑같이 폭행과 학대를 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어릴 때는 아주 작은 마음의 상처라도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할 만큼 심각하게 작용하는데, 오랫동안 아버지 또는 부모에게 폭행과 학대를 당하면서 살았다면, 트라우마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 점에서 두 주인공의 삶은 이미 어릴 때부터 건강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어린 나이에 심각하게 마음과 정신이 망가졌다고 볼 수 있다.
두 주인공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정부지원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정부지원금이 끊기면서 더 이상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너는...’에서 조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따로 병원 진료를 받으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 모두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실제로 언제든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괴로운 나날을 살아간다. 이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부모에게 당한 폭행, 학대, 군대에서 겪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여기에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고통, 경제적 어려움, 가난한 삶의 비참함 등이 겹치면서 주인공의 내면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너는...’에서 조는 살인청부업자다. 그는 중개자를 통해 일을 받아 처리하고, 일이 끝나면 현금으로 돈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에 비해 돈은 매우 적어서 그의 삶은 늘 궁핍하다. 아서 역시 먹고 살기 위해 피에로 분장을 하고 일하지만, 그의 질병-발작성 웃음- 때문에 늘 오해를 받고, 놀림을 당하거나 집단 린치를 당하기 일쑤다.
자기 의지와 관련 없이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도 억울한데,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참해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두 주인공의 현실이다.

 

어머니
조와 아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간다. 조는 어려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고 살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더 심하게 폭행당하면서 살아온 것을 보았다. 조보다는 나이가 어린 아서 플렉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모른다. 우연히 어머니의 편지를 훔쳐보고 고담시의 최고 갑부인 토마스 웨인이 자기 아버지라고 믿게 되는데, 이것은 영화에서 모호하게 처리된다. 아서의 어머니도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 어머니의 말을 신뢰할 수 없고, 토마스 웨인은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어 아서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조와 아서에게 어머니는 애증의 관계다. 조의 어머니는 일방적인 피해자였지만, 어린 아들 조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의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불쌍하면서도 미운 감정을 갖고 있다.
아서에게 어머니는 더욱 그렇다. 어머니가 텔레비전에서 영화 ‘싸이코’를 보고 무섭다고 말하자, 아서는 샤워 씬을 흉내낸다. 살인마가 샤워커튼을 젖히고 칼로 찌르는 그 장면은 ‘싸이코’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이자, 키포인트이기도 하다. 아서는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한편,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강렬한 살해충동에도 시달린다.
두 어머니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로서 힘겨운 삶을 살았고, 하나뿐인 자식,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했으며, 아들을 ‘의사(意思)남편’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만큼 깊게 의지한 아들이지만, 어머니라도 닿을 수 없는 한계가 있고, 나이 들면서 정서적 교감은 더 멀어지고, 궁핍과 빈곤으로 삶이 붕괴되면서 가족의 연대 역시 무너지게 된다.

 

살인
두 주인공 모두 살인을 한다. 조는 살인청부업자로 먹고사는데, 그가 살인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은 아마 군대에서 전역한 이후로 추정한다. 그가 군대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가는 주인공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군대에서 조는 살인을 한다. 전쟁, 전투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에게 살인은 전쟁이든, 전투든, 평범한 일상에서든 전혀 당연하지 않은 사건이다.
조는 자살충동에 시달리면서 청부살인을 한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수법도 남다른데, 총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망치로 사람을 죽인다. 총을 쓰면 좀 더 쉽고 빠르게 죽일 수 있고, 죄책감도 덜 하겠지만, 망치로 사람을 죽이면, 살해하는 과정과 시간이 길어지고, 자신의 손과 몸이 상대를 죽인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조는 어쩌면 자신의 트라우마를 잊으려고 일부러 살인의 감각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그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면서 머리를 다쳐 발작성 웃음이 도지는 병을 갖게 된다. 여기에, 웃음 포인트를 찾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따라 웃지 못하고,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즉 아서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인물이고, 사회성도 약하다. 노력은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그런 그가 우연히 총을 갖게 되고, 자신을 조롱하는 양복장이들을 총으로 쉽게 제압했을 때, 그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총이 가진 폭력성과 그것을 너무 쉽게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발견하고는 기뻐한다. 즉 아서는 폭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들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고, 삶은 부정당한다. 두 사람은 시민의 상식에서 ‘악당’이지만, 이들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구덩이에서 쩔쩔 매는 초라한 인간일 뿐이다.
이들이 대면하는 상대는 훨씬 거대한 악이고, 그 악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체제를 지배할 정도로 강하다. 조가 구출한 상원의원 딸은 납치되어 주지사의 성노리개가 되고, 조는 거대한 악과 맞서 그들을 죽이고 다시 아이를 구출하지만, 이미 아이는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다. 자신을 성폭행하는 주지사를 면도칼로 살해한 ‘소녀’는 조가 망치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각성한 것이다.
아서 역시 우연이긴 하지만 자신을 조롱하는 백인중산층 남성들을 총으로 쉽게 제압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악마성이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아서가 ‘조커’가 되는 것은, 그가 타고난 악마나 싸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이 비참했고, 그 비참한 빈민의 삶을 강요한 것이 바로 고담시의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착취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서 즉 조커가 고담시를 악으로 물들이려는 것은 단순히 범죄도시로 만들겠다는 천박한 의도가 아닌, 고담시(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한 체제를 붕괴해서 자본주의의 착취로 희생당하는 사람을 해방하겠다는 – 물론 이런 결과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 의지가 있기 때문이고, 자신과 같은 희생자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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