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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출판/자유로운글

전태일과 체 게바라

by 똥이아빠 2020. 11. 14.

전태일과 체 게바라

 

어제(11월 13일) 많은 사람이 '전태일'을 언급했다. 그 무수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전태일'에 관한 말들이 내게는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득권이며, '전태일'을 팔아서 호의호식 하려는 인간들이었다. 정작 '전태일'을 말할 자격이 있는 분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sns에 쏟아지는 '전태일'에 관한 글을 보면서, 그 말을 하는 자들의 면면이 야비하고, 천박하며, 가식과 파렴치,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좋은 분들이 없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전태일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분들도 있다. 극소수지만.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으켰으며, 쿠바의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고, 쿠바 사회주의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명백히 사회주의자이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혁명 활동을 하다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회주의자 체 게바라가 어느 때부터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착취에 반대하던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의 혁명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를 아이콘화 했다. 체 게바라는 분명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칭송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사회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아이콘으로, 선전선동의 대표 인물로 선정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착취에 저항하는 민중들 역시 성공한 혁명의 대표적 인물인 혁명가 체 게바라를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시간이 흘러 체 게바라는 티셔츠, 모자, 노트, 신발, 후드티 등에 새겨졌고, 젊은이들 사이에 '쿨한' 아이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밥 말리처럼. 비틀즈를 소비하던 60년대, 70년대 세대에게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퀸, 핑크 프로이드와 같은 개념으로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가 '대중화'되었다.

이제 체 게바라는 멋진 베레모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잘 생긴 배우가 되었고, 그가 남긴 일기는 멋진 오토바이 여행으로 기록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혁명가의 삶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고, 대중은 그런 혁명가를 소비한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태일'은 한국에서 금기였다. 그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전태일'은 '빨갱이'와 같은 이름이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독재정권에서 가장 강한 탄압을 받았으며,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았다.

'전태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그는 개인이었지만, 노동자 전체였으며, 노동자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무수한 '전태일'이 공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손발이 잘리고, 불구가 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다.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는 것은, 정권을 타도하자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독재정권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전태일을 떠올리는 것도, 이름을 말하는 것도 금지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역시 인간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아들의 뜻이 올바르고, 그 뜻을 따르는 무수한 '전태일'이 살아서 어머니를 따르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등장하는 '어머니'처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 서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하고 50년이 지났다. 엄혹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전태일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깨어 있는 지식인들은 '대학생 친구'가 되고자 노동자들 곁으로 몰려들었다.

노동자, 학생, 시민, 농민 등 기층 민중은 반독재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일정 수준의 민주주의를 확보했으며, 독재정권을 몰아냈다. 하지만 그 열매는 여전히 부르주아 우파 정권이 차지했고, 노동자는 지금도 소외당한 채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를 이간질하고, 정규직,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실업자)로 경쟁시켜 분열을 조장하며, 노동자끼리 싸우도록 만들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전태일'이 누구인지, '전태일 정신'이 무엇인지 모른 채, 비정규직으로, 임시직 노동자로,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살아간다.

'전태일'을 소비하는 건 오히려 부르주아와 자본이다. '전태일' 이름을 팔아 마치 노동자와 노동조건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전태일' 이름을 팔아 호의호식 하며, '전태일' 이름을 팔아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나는 1988년, 제1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상을 받은 이후 나는 더 이상 노동자로 살지 않았거나 못했다. 임금을 받거나 자유기고로 근근히 생활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였으나, 노동자라는 인식은 약해졌다. 그래서 더욱 노동운동에 관해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도시빈민으로 자랐다. 나는 소년 노동자로 세상에 나왔으며,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적어도 '멍청한 노동자'로 남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임금노동자의 위치에서는 벗어났지만, 나는 계급적 자각과 계급의식은 여전히 노동자로 남아 있다. 

현재 수많은 노동자는 자신이 임금노동자로 살면서도 '노동계급', '계급의식'이 없는 멍청한 임금노예로 살아간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멍청한 상태에 있도록 집요하게 방해한다. 노동자로서의 자각과 계급의식에 눈뜨도록 하는 모든 활동은 국가와 기업의 물리적 폭력과 경쟁, 세뇌를 통해 저지한다.

전태일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대학생 친구'들은 반독재 투쟁과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왔다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더 나타나지 않았다. 전태일의 친구인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더 어리석고 멍청하게 퇴보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연예인이 나오는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더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걸 꿈꾸는 자본주의 욕망의 추종자로 변했다. 일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무식한 인간으로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가 노동자라는 자각도 하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자본가의 노예로 살다가 죽는다. 

전태일이 바라던 세상은 노동자의 권리가 최소한으로 지켜지는, '근로기준법'이 정상으로 작동하는 사회였다. 50년이 지났지만, 전태일이 바라는 세상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을 팔아 호의호식하는 인간들은 늘어났지만, 그들에게 전태일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외투에 불과할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 노동자는 오히려 전태일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것이 한국 노동계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