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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출판/자유로운글

'한국인의 밥상'에서 발견하는 민중성

by 똥이아빠 2021. 5. 13.

'한국인의 밥상'에서 발견하는 민중성

 

KBS 다큐멘터리 '한국인의 밥상'이 올해로 10주년, 방송 횟수로 510회를 기록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2011년 1월 6일 첫 방송을 시작하고 올해까지 꾸준히 방송한 것도 놀랍지만, 매 회마다 식재료, 음식, 지역, 절기 등 독특한 주제를 선정해 한 가지에 집중하는 기획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KBS는 공영방송답게 선정적 내용을 지양하고, 교양과 문화, 예술 분야에서 높은 성과를 이루기 바라는데, 그렇다고 프로그램이 재미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민영 방송과 직접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가야 하는 지향점도 다르기 때문에, 공영방송 KBS가 추구해야 하는 방송의 방향은 국민 대수가 공감하는 내용이길 바라고, 그 목표를 이루는 형식으로 다큐멘터리는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밥상'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훌륭한 성과를 이뤘다. 무엇보다 재미, 교양, 기록, 역사라는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모두 담으면서 시청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건, 이 프로그램이 형식과 내용 모두 시청자의 요구를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무엇보다 '민중성'에 주목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팀에서는 '민중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하려는 의도는 없겠지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몇 가지 특징을 통해 건강한 민중성을 발견하는 기쁨과 감동이 있다.

 

최불암

'한국인의 밥상'에서 최불암은 하나의 상징이자 아이콘이다. 오래 전 '수사반장'에서 유능한 경찰로 등장해 시청자에게 널리 알려진 이후 '전원일기'에서 '한국인의 아버지'로 상징되었다. 최불암은 특유의 느리고 어눌한 듯 하지만 정감어린 말투로 프로그램의 성격을 확실하게 규정한다.

'한국인의 밥상'은 '아버지'가 한 끼의 밥상을 찾아 전국을 다니는 이야기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지만, 오늘날 아버지는 그런 권위를 잃고 점차 쇠락해 가는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식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고, 설 자리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데, 그건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필연적 운명이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슬프다.

그런 '아버지'가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밥상을 마주하고, 추억을 되새기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을 발견하고,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지역의 음식, 가정의 음식을 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늙고 힘 빠진 아버지는 더 이상 권위가 있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초라하고 불쌍한 존재로 인식된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안쓰럽고, 과거의 무섭고, 두려운 존재에서 어깨가 굽고, 짓무른 눈가에 말을 잃은 늙은이가 한 끼 밥상이라도 따뜻하게 먹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게 된다.

 

한편 진행자로서 최불암은 마주하는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부드러운 힘이 있다. 그의 이미지는 '아버지'이면서 '전원일기'의 '김회장'이다. 농촌의 마을지도자 김회장은 지금도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면서 다정한 이웃이다. 최불암이 찾아가는 지역은 대부분 도시가 아닌, 시골이어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은 최불암을 '배우 최불암'이 아니라 '전원일기'의 '김회장'으로 인식한다.

최불암을 자기들과 같은 시골사람, 마을 주민처럼 편하고 스스럼 없이 여기는 것이 '한국인의 밥상'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함께 등장하는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배경이 된다.

최불암 자신도 유명 배우라는 자각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즐거워 하고, 기꺼이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그램에서 최불암이 등장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의 내레이션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최불암의 내레이션이 갖는 힘은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편, 자극적인 TV 프로그램에 식상하고 불편한 시청자들에게는 정서적으로 힐링이 되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든다.

 

사투리

우리나라는 지방 언어인 사투리가 매우 발달한 나라다. 현대 들어서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표준어'라는 것이 규정되었지만, 서울말도 지방 언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한국인의 밥상'은 서울보다는 대부분 지방을 다니며 '밥상'을 찾는데,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사투리의 아름다운 말을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예전에는 모든 문화와 예술, 방송이 서울을 중심으로 제작, 방송되었으며, 방송과 언론 매체에서는 서울중심주의를 고집했다. 즉, 서울은 다른 지방보다 우월하다는 근거 없는 심리가 만연했고, 상대적으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을 동경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저임금 노동자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지방(농촌)에 있는 청년들을 서울을 대표로 하는 대도시로 이주시켜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도록 하고,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1차 생산물(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 가격을 동결해 가격을 낮춰 공급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방송, 언론에서는 서울에서 사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다양한 형식 - 드라마, 대중가요, 다큐멘터리, 연예, 오락 프로그램 -의 방송에서 서울이 살기 좋은 곳, 세련된 곳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렸다.

그래서 농촌에 살던 청년들이 서울이나 대도시로 진출해 노동자로 변신한 이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때는 '촌티'를 벗어났다는 증거로 '서울말투'를 써야만 했고, 서울말을 잘 구사할수록 '촌놈'에서 벗어나 세련된 도시인으로 인정받았다.

서울(대도시)에 대한 선망의 이미지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지방을 차별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사투리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방송에서 사투리를 드러내놓고 비하했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범죄자, 양아치, 깡패 등이었으며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지방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19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한국은 점차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지방은 자치정부를 구성하면서 중앙집권의 영향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투리는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언어이자 정체성이다. 사투리의 발달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며 농사를 짓던 부족들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언어 습관을 갖게 되었고, 그 언어는 부족 내부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그래서 사투리에는 우리 고유의 언어가 대부분이며, 언어의 초기 형태, 언어의 화석들이 발견되는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사투리는 자연스럽게 인접한 지리적 경계를 따라 다른 부족과의 소통을 통해 섞이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진화한다. 특히 지배집단의 언어는 사투리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다른 지배집단이 각자의 언어를 사용했다면, 통일신라 때는 경주 사투리가 권력을 갖고 퍼져나갔고, 고려 때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투리가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에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경아리가 지방 사투리에 영향을 끼쳤다.

벼슬을 하던 사대부 양반들 가운데 지방으로 귀양을 가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는데, 이때 한양에서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죄가 큰 것으로 여겨졌다. 남쪽으로는 제주를 비롯해 흑산도 같은 섬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함경도 산수, 갑산까지 올라갔으니 서울말을 쓰는 양반들이 그 지역에서 언어의 변형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중앙 관리들도 벼슬을 하면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긴 했으나, 그들이 지방 민중의 언어에 직접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안 되었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귀양으로 내려간 양반들은 지방 민중과 함께 생활하면서 언어의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주요 유배지-남해, 강진, 해남 등-에서는 지금도 지역민들의 언어에 한문투 언어가 많이 섞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유배지에서 양반들은 지역민에게 공식 서당은 아니지만 글방을 만들어 교육을 했고, 지역민과 함께 농사 짓는 이야기, 어업을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남긴 '자산어보'가 바로 그런 유배지의 양반과 지역민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걸작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사투리를 기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때까지 지배계급만이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으로 기록을 남겼으며, 한문을 읽고 쓰는 것은 특권에 속했다. 한문과 우리 언어는 서로 달라서 우리 말을 발음 그대로 기록할 수 없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두, 향찰 같은 편법이 등장했다.

하지만 '한글'을 창제한 이후, 한글로 문자를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발음 그대로를 문자로 적을 수 있다는 장점이 지방 언어인 사투리도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 문서에는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언어학자들은 문서에서 단어의 어원을 찾을 때, 사투리에 주목한다. 사투리는 언어의 원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투리를 '밥상'에서는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고,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된다. '표준어'라는 언어 권력에 뺐긴 사투리의 정체성을 '밥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표준어'보다 더 많이 들을 수 있어 사투리가 자연스러운 언어로 인식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이제 '표준어'와 사투리는 권력 서열의 우열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라는 걸 '밥상'이 보여주고 있다.

 

음식

'한국인의 밥상'은 우리 음식에 관한 박물지이면서, 음식의 역사를 발굴하는 탐사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당대에 얻을 수 있는 식재료의 종류에 따라 변해 왔다. 현재의 우리는 불과 100년 전 할머니, 할아버지가 드셨던 음식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다른 음식을 먹고 있다. 우리 음식(한식)은 19세기 말, 일본과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방이 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 사이에 급격하게 달라졌다. 음식 문화는 특히 외부의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외국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외국과 왕래가 늘어나면서 우선 외국의 식재료가 들어오고, 그 나라의 음식 문화가 스며들며, 우리 음식과 자연스럽게 섞이기 시작한다.

우리 언어(한국어)도 조선 후기 이후부터 일본, 미국 등에 항구를 개방하면서 외래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언어와 음식에 스며든 외국의 문화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모두 있는데,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잔재로 남아 있는 일본어를 없애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반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미국 문화가 물밀듯 밀려드는 상황에서 외국어, 특히 영어의 외래화에 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음식은 언어와 다르게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고, 생존과 직접 관련되어 있어서 사회 상황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국전쟁 전까지, 한국은 농업국가였고, 국민의 80% 이상이 농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으며, 1차 생산물-농산물, 수산물, 임산물 등-을 수확, 가공, 섭취하는 단계에 있었다.

 

음식과 관련해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음식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북쪽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남쪽으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식재료들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식재료를 우리 음식에 온전하게 스며들도록 한 것은 선조들의 지혜다. 따라서 외국의 음식문화가 직접 개입하게 되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우리 음식은 '한국인의 밥상'에서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을 통해 들어온 식재료와 음식문화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기 보다는, 일본도 외국에서 받아들인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조선에서 생산한 곡식 - 쌀, 잡곡 등 - 을 일본으로 반출했는데, 한국사람이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일본은 대신 과자, 술, 청량음료, 식용유, 통조림 같은, 자기들도 외국에서 들여온 음식을 한국에 들여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자기들을 위한 음식(일본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식당을 열어 일본음식을 판매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일본음식이 대중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일본으로 유학을 하거나, 돈을 벌러 갔던 조선사람들이 돌아와 일본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음식의 정체성은 큰틀에서 변하지 않았고, 가난한 민중들은 비싼 일본음식이나 서양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기에 우리땅에서 생산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한식이 급격하게 변한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부터였다. 전쟁으로 국토가 완전히 폐허로 변한 상황에서 한식은 크게 두 방향의 영향을 받는다. 내부적으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남쪽에 정착하면서 북쪽의 음식과 남쪽의 음식이 섞이는 과정이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 식재료와 음식이 한식의 일부로 편입되는 과정이다.

특히 전쟁 직후의 가난으로 먹을 것이 절대 부족할 때,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끓여 먹던 '꿀꿀이죽'과 음식쓰레기를 골라 그것으로 찌개를 끓였던 '부대찌개'는 전쟁의 비극과 가난을 상징하는 대표적 음식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한국에 본격 수입되기 시작한 1950대부터 밀가루 음식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우리 음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밀가루는 왕족, 양반 일부만 먹던 귀한 식재료였지만, 미국산 밀가루의 수입은 가난한 민중에게 커다란 희망이었다. 

밀가루가 없던 시기에 국수를 먹는 건 주로 메밀가루로 만들거나 옥수수 가루로 만든 것이었는데, 밀가루는 메밀이나 옥수수와는 차원이 다른 탄력 있고, 부드러운 식감으로 고급한 식재료가 되었다. 또한 밀가루는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로, 국수는 물론 수제비, 만두, 전병, 빵 등 쌀을 대체하는 주식의 재료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미국 밀가루의 수입은 미국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다. 미국은 밀 생산량이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였고, 밀의 잉여 생산으로 재고가 많은 상태였다. 미국 농민의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3세계에 미국 밀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차관의 형태로 한국에 밀을 수출했다. 당장 굶주리고 있던 한국은 미국이 제시한 차관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밀가루는 미국 농민과 한국 민중 모두를 만족시키는 식재료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급격히 좋아졌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호황이었던 배경으로 가능했다. 국민 소득이 늘어나고 가처분 소득이 증가하면서 민중은 여가를 즐기는 여유가 생겼고, 국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외식 문화가 등장했다. 그 전에도 외식은 했지만 먼 지방까지 여행을 하면서 외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국내 여행을 통해 각 지방의 음식을 맛보고, 비교할 수 있게된 사람들은 지방 음식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시작한 '뷔페 문화'는 대중의 음식 문화에 충격을 주었다. 외국에서 들어온 '뷔페'는 초기에 고급한 음식 문화였고, 실제로 비쌌다. 호텔에서 시작한 '뷔페'는 상류층이 먹던 음식이었으나 점차 대중화하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문화이기도 했다. 오늘날 뷔페는 두 종류로, 최고급 호텔의 고급 뷔페와 서민들이 먹는 대중 뷔페로 나뉘였다.

1990년대 비로소 해외여행이 자율화되자, 외국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무섭게 늘어났고, 외국 여행을 하면서 맛본 음식들이 국내 반입되거나 레스토랑, 페스트푸드 등이 하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와 레스토랑 등 외국 음식의 대중화는 한국 음식문화에 큰 충격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은 이제 더 이상 '한식'만 먹지 않게 되었고, 쌀의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국인의 밥상'이 천착한 지점은 앞서 말한 이런 '잡종 한식'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이자, 우리 음식의 원형과 고유성을 '재발견'하는 의미를 갖는다. 지방을 찾아가서 발견하는 음식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식재료로 만드는데, 음식을 만들기 전의 식재료에서 다양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복적이다. 우선, 식재료는 누구나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식재료가 어떻게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들과 산에서 나오는 무수한 나물, 버섯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다에서 나오는 식재료는 도시의 시장이나 음식점에서는 볼 수 없는 것도 많다. 자연에서 나오는 식재료는 자연 상태로 나오는 것을 채취하는 것이 많지만, 양식으로 생산하는 것도 많다. 식재료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밥상'이 추구하는 제작 의도이자 철학이기도 하다. 식재료의 원천을 찾고, 그것을 채취, 수집하는 과정은 민중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이 노동의 과정이야말로 콘텐츠이자 '서사'가 된다.

다음으로 요리하는 과정인데, 채취, 수집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드는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민중의 지혜가 돋보인다. 음식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수동적 방법과 능동적 방법이다. 기존의 식재료를 준비해서 그 식재료로 원하는 음식을 만드는 방식은 수동적 요리 방식이다. 준비한 재료라는 건 어떤 음식을 만들겠다는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계획했다는 뜻이다. 이건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장을 봐 식재료를 구입해서 만드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 요리는 주어진 식재료로 임기응변식 요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려는 민중의 지혜가 만든 음식인데, 식재료가 풍부하지 않던 시절, 거친 식재료로 식구들의 밥상을 준비했던 어머니의 지혜가 지방의 음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모 세대의 정서와 그리움

앞에서 '밥상'에서 추구하는 제작 의도가 식재료를 채취, 수집하는 과정과 요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고, 그것이 이 프로그램의 콘텐츠이자 '서사'라고 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50대 이상이다. 연세 많은 분은 97세 어른도 계시고 60대, 70대가 주류다. 이들은 TV를 보는 주시청자층과 비슷하며, 젊은 세대에게는 부모 또는 조부모에 해당한다. 

도시의 부모, 조부모 세대는 노동을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식재료를 수집, 채취, 가공하는 노동을 하지는 않는다. 반면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부모, 조부모 세대의 어른들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물론 TV 제작이라는 특수성이 개입해서 어느 정도 왜곡되었다는 건 우리도 알지만, 그걸 감안해도 등장하는 지역민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건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민중의 자부심이자, 자기가 흘린 땀에 거짓이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식재료와 요리, 음식을 만들고 먹는 과정에서 민중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자, 부부,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사촌들까지 이들이 나누는 대화와 농담, 자기의 생활 이야기는 소소하지만 귀한 감동을 준다. 우리는 불과 한 세대 이전만 해도 끼니를 굶어야 하는 어려운 삶을 살았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렸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라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에서 민중이 가난에서 벗어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살아온 인생이 서사이며, 그가 말하는 삶의 경험과 음식, 삶의 이야기가 콘텐츠다. 역사는 개인들이 한 행동의 큰줄기를 기록한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승자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즉 권력을 차지한 자들이 남긴 기록이 '역사'라면, 아무 권력도, 금력도 없는 민중의 삶은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오늘날 평범한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구술사'가 주목 받는 이유가 있다. 개인의 기억과 구술은 '정사로써의 역사'로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한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으로, 자기의 삶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그 삶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밥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돌아가신 부모님, 조부모님과 살았던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그때 먹었던 음식, 식재료, 음식을 만드는 방법 등에 관해서 자세히 구술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연구,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는 구술자만의 특별한 삶에서 등장하는 음식문화이며, 과거 100년의 역사 속에서 민중이 먹었던 음식의 원형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국현대사 -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 4.19혁명, 박정희 군사쿠데타, 70년대 새마을운동, 80년 전두환 군사쿠데타, 민주화운동, IT혁명까지 - 를 모두 겪은 세대가 존재한다. 그들은 이제 80대 이상의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한국의 과거를 기억하며, 한국이 얼마나 놀랍게 성장했는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증언한다.

그들은 지독한 가난으로 굶주린 세대였으며, 밥을 먹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세대였다. 먹거리가 풍성한 요즘의 청년 세대들은 노인 세대의 증언이 신기할 것이다. 쌀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불과 40년 전이고,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보관하려는 다양한 보관 방식이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거나, 쪄서 말리거나 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들은 학교에서도, 책에서도 쉽게 배울 수 없는 지혜다.

 

우리 부모, 조부모 세대에게는 지역과 상관 없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은 많이 희미해진 공동체의 모습이자, 대가족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이 세대에서는 개인주의가 오히려 낯선 개념이다. '나'보다는 '우리', '가족', '이웃'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개념이다.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젊은 세대보다는 노인 세대에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근대화'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근대 민주주의 개념은 '개인'의 발견에 있다. 개인의 권리, 개인의 자유가 다른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발달한 것이 '민주주의'였다면, 개인보다 '우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 개념은 전근대 개념이지만, 그것을 고루하다 비판하기 어렵다.

신자본주의가 팽배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인 경쟁과 이기심, 개별화가 진행하면서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도시에서도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발달해도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삶의 원형은 과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밥상'에 등장하는 지역민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소탈하며, 정이 많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깊은 사연을 하나쯤 마음에 묻고 살아가지만, 자기의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자신이 디뎌온 발걸음처럼, 후회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수천만 명의 장삼이사 가운데 한 명일 뿐이지만,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저마다의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다. 시청자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부모님, 조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의 삶에는 우리가 잊었던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 단순하고 소박한 밥상과 행복한 식구들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비싸고 고급한 음식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소박하고 따뜻한 밥상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건 마치 귀소본능처럼,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기록

'밥상'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람들의 '밥상'을 찾아다니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국토의 아름다움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인줄 알았지만, 요즘 우리나라의 위상이 세계에서 높아지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땅, 우리 산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외국 여행을 다녀 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 경제력도 나아지고, 외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많다보니 우리의 모습을 객관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겼다. 우리의 모습이 가난하고 찌들었던 때는 우리의 땅과 산하도 비루하고 초라해 보였지만, 우리가 먹고 살 만큼 되면서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면도 있다.

세계 곳곳에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한국의 산하는 객관으로 봐도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한국전쟁 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한국의 풍경 사진과 영상이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있는 풍경은 가난한 민중의 모습과 함께 헐벗은 자연이었다. 그 시기를 아름답다거나 보기 좋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자연은 과거의 모습이 더 깨끗하고 온전했겠으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은 힘겹고 애처로웠으니 우리의 인식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산하는 존재 자체로 빼어난 모습을 지녔다. '동고서저'의 지형과 삼면의 바다, 대륙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높은 준령들, 높은 산에서 시작해 들판을 가로질러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무수한 강들, 뚜렷한 네 계절의 변화,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알맞은 크기의 국토,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맑은 물의 풍성함, 세계 최고의 갯벌, 식생의 다양성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장점을 가진 땅이 우리의 산하다.

우리의 문화, 예술, 땅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겨 대중에게 널리 알린 책이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박태순의 '나의 국토, 나의 산하'였다면, EBS의 '한국기행'은 우리땅 구석구석의 세부적인 풍경과 사람을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의 삶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면, 더 나아지고, 좋은 환경으로 바뀐 것이 분명하고, 덩달아 자연도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편만큼 풍요롭고, 건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환경오염'과 '기후문제'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름다운 강토를 파헤치고, 상처를 입히고, 오염시키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우리 인간이며, 자연을 지키고, 환경을 복원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우리 인간들이다. 자연은 여여하게 그 자리에 늘 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가 달라질 때, 우리의 산하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밥상'은 그런 우리의 산하를 풍경으로 담는다. 우리가 먹는 '밥상'이 이 풍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연과 밥상이 결코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라는 걸 국토의 풍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밥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역의 서민들이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통상의 개념으로 이런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민중을 '씨알'이라고 했으며, 북한에서 쓰는 단어라 꺼리지만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인민'이라고 불렀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온 단어로 전체주의, 파시즘을 떠올린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밥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서민이고, 장삼이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낯익고 친근한 우리 이웃들이다.  자기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비굴하지 않다. 자기의 노동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질투하거나 시기할 이유도 없고, 해꼬지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건강한 노동은 몸의 건강 뿐아니라 마음도 건강한 사람을 만든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노동의 고단함과 함께, 노동의 보람, 노동으로 흘리는 땀의 고귀함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든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 서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닷속 해녀, 탄광의 광부, 깊은 숲속의 약초꾼, 강가의 어부 등 소수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 한 결과의 집합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서울과 대도시는 높은 빌딩과 불야성의 불빛이 밤을 환하게 밝히고, 밤낮 없이 일하는 도시인들이 있지만, 시골 농촌과 어촌은 화려하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는 곳은 달라도 모두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밥상'은 일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건강한 삶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장년, 중년 그리고 청년까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음식과 버물어지면서 감동을 준다.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담을 수는 없으나, 그들이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아픈 사연과 슬픔은 과장되지 않지만, 시청자에게 공감과 울림을 준다. 시청자 대부분도 저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서민이자, 장삼이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밥상'이 주목하는 대상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 오래된 마을과 그곳에서 대를 이어가며 사는 사람들이 어떤 식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는가에 있다. 지역마다 독특한 식재료가 있고, 그 식재료로 만드는 음식은 도시의 식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음식이다. 어지간한 음식 종류는 대도시 식당에서 맛을 볼 수 있지만, 식재료 자체가 귀하거나 제철에만 나는 것이라면 수급의 한계, 비싼 식재료비 등의 이유로 귀한 대접을 받거나 아예 구경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밥상'은 그런 귀한 식재료를 소개하고,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지역 사람들을 보여준다. 보통의 '먹방 프로그램'은 비판적으로 표현하면 '음식 포르노'로 부를 만큼, 음식에 관해 지나치게 연출, 과장, 탐식의 과정을 노출하는데 반해, '밥상'은 지역 주민이 생활하는 방식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지역민이 직접 잡은 물고기, 채취한 나물 등을 다양한 음식으로 만드는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준다.

'밥상'이 여느 '먹방' 프로그램과 변별점을 갖는 가장 큰 지점은, 먹방 프로그램들이 기존의 음식 메뉴를 과장하면서 소개하고, 그것을 먹으면서 역시 과장된 행동, 행위를 하는 반면, '밥상'은 음식의 재료 자체부터 새로운 발견과 지역의 특성, 지역민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의 토속적 식재료와 음식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은 우리 문화의 다양성에 큰 도움이 되며, 식재료와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전통, 문화, 식생활, 풍습, 지리적 조건, 경제 발달의 수준, 마을 단위의 공동체적 형태, 각종 금기의 발달, 토속신앙, 가족구성원의 권력 관계, 식재료와 양념의 발달 단계, 식재료와 음식을 대하는 지역민들의 세계관 등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문화사적 자산이다.

'한국인의 밥상'은 10년, 500회가 넘는 시간 속에 한국 곳곳을 다니며 이런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분단으로 인해 우리땅의 반쪽에서만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과의 교류가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지만, '한국인의 밥상'이 분단 조건을 뛰어넘어 북한의 곳곳을 다니며 북한 지역의 밥상을 찾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시 한번 '한국인의 밥상' 10주년, 500회 방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