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니? - 유본부장
'무한도전'이 종영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본 적이 없다. 집에 TV 없이 생활한 것도 20년 가까이 되어가고, '무한도전'을 할 때도 VOD로 봤다. 그나마 유일하게 재미있던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었던 - 종영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이유가 사라졌다.
김태호 PD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유재석과 함께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한도전' 같은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기에 관심을 끊었다.
그 뒤로 유튜브에 올라온 '무한도전'의 수많은 클립들을 다시 보면서 '무한도전'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제는 지나간 과거 10년의 시간 속에서, 아들과 함께 '무한도전'을 보면서 즐거웠던 유일한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과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무한도전'은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에게는 아들과 함께 본 유일한 프로그램이자, 어린 아들과 함께 쌓은 추억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청년이 된 아들과 나는 각자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짜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유튜브에서 '무한도전' 클립을 본다. 그 시간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기억을 소환한다.
오늘, '놀면 뭐하니?' E94회를 일부러 찾아본 것도 '무한도전'과 관련이 있어서다. '무한도전'에서 하나의 코너로 시작했다가 '위기의 회사원'으로 스페셜 스토리를 만들고, 정준하 과장의 퇴사로 이어지는 웅장한 뮤지컬 코러스와 정준하 과장의 사업 성공 등으로 새로운 서사를 만든 '무한상사'의 이야기가 E94회에서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무한상사'에서 뛰어난 인재였던 유부장도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무한상사'를 퇴직하게 된다. '무한상사' 공채7기였던 유부장은 자신보다 먼저 입사했던 박명수 차장과 정준하 과장을 앞질러 승진하고 부장까지 되었지만, 유부장이 맡은 부서가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시도하는 사업마져 지지부진하면서 결국 정준하 과장이 가장 먼저 퇴출된 것을 시작으로 노홍철 대리, 정형돈 과장 순으로 회사를 떠나게 된다.
정준하 과장은 회사에서 퇴출당한 설움을 딛고 달걀 사업에 성공하는듯 했으나,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대면서 결국 모든 사업이 실패하고 취직도 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사업은 '소머리국밥집'이었는데, 코로나19 상황에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유부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무한상사'를 퇴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아는 분의 도움으로 새로운 직장인 JMT(Joy&Music Technology)라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본부장'이 된다. 새로 설립하는 회사인만큼 유본부장은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미리 받은 이력서를 갖고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을 만나 면접을 본다.
거리에서 처음 등장하는 유본부장은 몸에 잘 맞는 양복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전형적인 샐러리맨 모습이다. 그는 균형잡힌 몸매로, 나이가 50세라는 걸 생각할 때, 자기관리를 매우 철저하게 잘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본부장이 가장 먼저 만난 직원 후보는 이용진으로, 경력 18년차의 중견 직원이다. 처음에는 이용진이 누구인지 몰라봤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웅이 아버지'에 나왔던 개그맨으로 기억났다.
이용진을 면접 본 유본부장은 혼자 점심을 먹는다. 이때 유본부장이 나오는 장면은 '고독한 미식가'의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고로상'이 비즈니스를 마치고 거리에 서서 '배고프다'고 할 때의 그 장면이며,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것까지도 '고독한 미식가'와 같다.
또한 식당의 의자에 앉아서 혼잣말을 하는 것, 음식 메뉴를 하나씩 품평하는 것, 음식의 맛과 느낌을 독백하는 것 등 '고독한 미식가'를 패러디한 장면은 이어진다. 유본부장이 점심으로 먹은 음식은 '순대국'이다. 순대국은 가장 서민의 음식이며, 한국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음식이기도 하다.
순대국의 역사는 퍽 오래되었는데, 무엇보다 서민이 만들고, 서민이 먹었던 음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순대국에 들어가는 고기는 순대를 비롯해 머릿고기, 내장 등 과거에는 양반들, 오늘날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라면 먹지 않는 돼지고기 부위들을 모아서 넣는다. 유본부장은 순대국을 퍽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가 격식에 억매이지 않는 소탈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또한 순대국을 먹을 때, 드레스 셔츠를 걷어 올리고, 음식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는 그가 자신의 생활(삶)을 허투루 여기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점심을 먹은 유본부장은 두번째 인물의 면접을 보는데, 유본부장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보이는 사람은 임원희다. 과거 '무한도전' 시절, 341회, 342회로 방송한 '여름예능캠프'에서 발굴의 예능을 보여준 바 있던 임원희는 놀랍게도 유본부장과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광고모델까지 같은 인연이 있다. 임원희는 70년 생으로, 72년생인 유본부장보다 나이가 많지만 동안이라 늙어보이지는 않는다.
임원희는 면접을 보기 전에 치과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마취가 풀리지 않아 발음이 새고, 물을 마시면 물이 입가로 흐르는 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 장면이 시청자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임원희의 옛날 개그는 젊은 시청자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비슷한 나이인 나는 임원희의 개그 코드가 잘 맞았다.
임원희의 면접을 마치고 다시 골목 식당에 들른 유본부장은 라면을 주문한다. 라면 역시 가장 서민 음식이다. 유본부장이 가장 힘들고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이 라면이라는 건, 그의 과거, 성장 배경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본부장은 어릴 때 유복한 집안이 아닌, 지극히 서민인 가정에서 자랐고, '무한상사'에 취직할 때도 겨우 턱걸이로 입사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본부장은 신입사원 시절에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깨닫고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의 능력은 그의 노력이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본부장이 라면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문득 옆 자리에 앉은 남자를 의식하게 된다. 처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 중년의 남자는 유본부장의 눈에 낯익어 보였고, 찬찬히 살펴보니 역시 정준하 과장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극적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두 사람 모두 당황하면서 크게 놀란다.
정과장은 하던 사업에 실패하고 취직을 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나이도 있고, 그가 '무한상사'에 수석으로 입사한 인재였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원단합대회에서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무한상사'의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그의 운명을 크게 갈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정과장은 회사에서 다치고 산재처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감나무에서 떨어지고 곧바로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정과장은 자신의 몸(머리와 정신)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느꼈고, 문제를 제기할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르고,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정과장은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가장 먼저 퇴출된 인물이 되었고, 그는 퇴직금으로 고깃집을 차렸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달걀후라이' 사업으로 성공한다. 이때가 정과장의 전성기였다는 건 '무한상사'를 본 시청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정과장은 한때 성공한 사업가가 될 뻔했지만, 그의 아내가 대식가 - 홈쇼핑에 출연해 달걀후라이 100개를 먹은 것이 바로 정과장의 아내였다 - 로 엄청나게 먹어댄 것은 물론,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는다. 이 충격으로 정과장은 사업도 접고, 폐인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유본부장을 만난 것이다.
유본부장은 정과장을 만난 것이 반갑기는 하면서도 그의 답답한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제로 정과장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 듯, 몸집이 더 커졌다. 그의 행색은 예전 '무한상사'에 다닐 때보다 추레해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게다가 라면도 먹지 않고, 소주와 새우깡으로 저녁을 때우는 모습이 처량하고 안쓰럽다.
하지만 정과장은 예전에 머리를 다친 이후, 답답하고 느리며,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유본부장을 짜증나게 만든다. 더구나 우유부단한 태도로 유본부장이 '무한상사'에서 정과장에게 특히 가혹하게 대하던 모습이 튀어나오게 만든다.
면접이 거의 끝나갈 때, 마스크를 하는 정과장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는데, 요즘 텔레비전과 언론에 자주 모습을 비추는 '윤아무개'의 모습과 일본의 전 총리 '아베'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도록 연출한 김태호 PD의 감각은 '무한도전' 때의 감각을 잃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을 시작으로 '무한상사'의 리부트로 이어질 지는 알 수 없지만, 유본부장이 면접을 보러 다니는 걸 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오랜만에 IP TV에서 유료로 본 '놀면 뭐하니?'의 '유본부장' 편은 '무한상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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