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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by 똥이아빠 2021.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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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영화가 시작되고 절반 가까이 지나서야 야첵이 살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야첵과 택시운전수 레콥스키가 만날 때까지, 그리고 야첵을 변호하는 변호사 포트르가 그의 첫번째 수임 사건이자, 자신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 믿게 된 상황까지, 세 명의 개인이 우연의 인과를 거쳐 만나게 된다.

야첵이 택시운전수 레콥스키를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은 방황과 우울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가방에 끈과 몽둥이를 준비하고 있다. 즉,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우연히' 해수욕장에서 아랍인과 만나 시비가 붙게 되고,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자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상황과 연결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담담하다. 슬퍼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며 양로원의 노인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장례식이 끝나고, 뫼르소는 애인 마리와 함께 영화관에 가고, 다음 날에는 이웃에 사는 레몽이 찾아와 편지를 써달라고 하자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며칠 뒤, 레몽이 뫼르소와 마리를 초대해 해변가로 나가고, 그곳에서 아랍인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들 가운데 레몽의 옛 애인의 오빠가 있었고, 다툼이 일어난다. 레몽이 칼에 찔리지만 심하지 않았고, 레몽과 뫼르소는 시원한 샘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레몽을 찌른 아랍인을 다시 만난다. 그러자 레몽이 뫼르소에게 총을 건네고, 뫼르소는 아랍인이 꺼낸 칼에 햇빛이 번쩍거려 자극을 받자 자기도 모르게 총을 발사한다.

야첵의 살인이 계획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내면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뫼르소 역시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나 의지는 없었지만, 눈앞에서 자기를 위협하는 칼을 든 아랍인을 향해 레몽이 준 총을 발사했다.

 

야첵이 살인하는 대상은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거리를 배회하다 만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택시운전수 레콥스키일 뿐이다. 레콥스키는 적당히 속물이며, 이기적이고, 약간은 시건방진, 그 나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천박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 택시를 꼼꼼하게 관리하는 사람이고, 좋은 차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으며, 손님을 골라 태울 만큼 여유가 있다. 

레콥스키는 자기 차를 타려는 사람들을 골라가면서 태우는데, 그렇게 약삭바른 짓을 하다 만나게 된 것이 야첵이었다. 레콥스키의 행동은 얄밉고, 약삭바르기는 해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만큼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 딜레마다.

즉, 야첵이나 레콥스키나 모두 정작 죽이거나, 죽어야 할 대상이 아님에도, 두 사람은 우연히 죽음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뫼르소와 아랍인 역시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이거나 죽임을 당해야 할 인과 관계는 없었다. 피해자는 레몽이었고, 뫼르소는 이들의 관계를 알지 못하며, 개인적으로 엮일 인연도 없었지만, '우연히' 그 자리에서 다시 아랍인을 만났고, 그 아랍인이 칼을 꺼내 들었으며, 레몽이 뫼르소에게 총을 건냈다는 일련의 과정이 뫼르소가 살인자가 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야첵과 뫼르소의 살인은 대상으로서의 '타인'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자기 살인'에 더 가깝다. '이방인'에서는 그 이유가 앞부분에 매우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최소한 뫼르소의 행위에 대해 막연한 동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야첵의 살인은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동기를 알 수 없으므로, 관객은 야첵을 싸이코패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야첵이 변호사 표트르를 만나 유언같은 말을 할 때, 그제서야 표트르나 관객은 야첵이 저지른 살인이 결국 스스로를 죽이려는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는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기한 책임이 있고, 그것은 뫼르소의 내부에 깊고 무거운 죄책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뫼르소의 감정은 메말랐다기 보다는, 감정의 신호, 특히 슬픔에 관한 감정의 신호가 끊겨 있다고 봐야 한다. 어떤 면에서 뫼르소는 '싸이코패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싸이코패스'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는데 반해 뫼르소는 자신의 삶에 애착이 없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뫼르소가 살인을 하는 순간까지 지나온 삶을 보면, 병약한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그는 평범한 직장에서 따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늘 마음 한쪽에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부담을 지니고 살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한편으로는 더 큰 죄책감을 묵직하게 느낀다.

 

야첵이 살인을 하게 된 동기 역시 그의 내면에서 자기 파괴 본능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골 출신으로, 가난하지만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는, 어린 여동생이 트랙터에 치어 죽었기 때문인데, 트랙터를 몰던 사람이 바로 그의 친구였다.

동생의 죽음으로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었던 야첵은 곧바로 자살하지도 못하고, 도시로 나와 방황하다 결국 택시운전수를 살해한다. 그렇다면 야첵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자책,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누군가를 죽여야 했을까.

야첵이 정작 죽이고 싶었던 건 트랙터를 몰던 친구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죽인 건 바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던 친구였으니, 그 친구를 죽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괴롭고, 어려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죽은 여동생의 죽음에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동생의 죽음을 대속할 만한 죽음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작위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만만한 사람으로 택시운전수 레콥스키였다. 그런 점에서 레콥스키는 지독히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레콥스키의 행동을 지켜본 관객은 이런 인과가 레콥스키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야첵의 체포와 재판은 생략되고, 야첵이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당하는 장면이 곧바로 나온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사형될 걸 알면서도 태연하다. 사형을 앞두고 신부가 찾아와 속죄할 것은 말하지만, 뫼르소는 오히려 신부를 꾸짖고, 자기가 사형당하는 것이 자기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뫼르소는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지만, 스스로는 잘 알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죄책감은 아랍인을 총으로 쏴서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것이 더 크다. 그는 어머니가 양로원에 계실 때도 거의 찾아가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다. 그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더라도 뫼르소에게 어머니는 '원죄'와 같은 존재여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원형을 끌어안게 된 것이다.

이 고통의 원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 뿐이고, 뫼르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끝내줄 수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야첵의 경우, 그가 레콥스키를 살해할 때 가졌던 감정은 레콥스키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하고, 레콥스키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내부-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도 함께 죽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실존적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야첵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야첵이 뫼르소처럼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기 살해'에 관한 내면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야첵은 여동생의 죽음을 곧 자기의 죽음으로 생각할 정도로 죄책감을 갖지만, 마지막 순간에서야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야첵은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즉, 야첵은 폭력으로 레콥스키를 살해하고, 국가는 '법'의 이름으로 야첵을 살해한다. 사형집행을 막으려는 변호사 표트르는 자기가 배운 법이론의 한계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하지만, '법'은 살인자 개인의 서사를 무시하고, 오로지 행위에 관한 법률적 판단만 할 뿐이다. 변호사가 알게 된 야첵의 이야기는, 야첵 자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인데,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변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즉, 야첵이 그보다 더 심한 일을 겪었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뺐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변호사 표트르의 태도는 낭만적이고 편협하다. 그가 인정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그가 이제 막 '변호사'로 입문한 어설픈 법률가라는 걸 증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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