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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마카엘 하네케 - 하얀리본

by 똥이아빠 2021.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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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엘 하네케 - 하얀리본

 

의사가 탄 말이 줄에 걸려 넘어지고, 의사는 쇄골이 부러져 큰 병원으로 후송된다. 쓰러진 말도 일어나지 못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는 나레이터인 학교 선생의 시각을 따라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독일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유럽의 정세에 관해 잘 모르고 있지만, 유럽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불안한 상황이다. 이 작은 마을을 운영하는 건 '남작'이고, 그는 마을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을 직간접으로 고용하거나 부리고 있다. 남작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소작농 펜더의 아내가 제재소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펜더 부부에게는 여덟 명의 자식이 있는데, 20대 청년부터 네 살짜리까지 사이에 아이들이 올망졸망하다. 이들은 전적으로 남작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고, 자식들도 남작의 집에서 노동하며 월급을 받는 처지다.

펜더 집안은 아내가, 엄마가 사고로 죽었지만 남작이 사과도 하지 않고, 보상도 없는 것이 몹시 불만스럽지만 어떤 불만이나 불평도 입밖으로 낼 처지가 못 된다. 이때 펜더 집안의 장남이 독단으로 남작 소유의 양배추밭을 망가뜨린다. 그것도 추수감사절 축제가 열리는 날에.

남작과 마을 주민들은 의사가 다친 것과 양배추밭이 망가진 것이 한 사람의 범행이라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펜더의 큰아들이 범행을 자백한다. 그럼에도 남작은 펜더 집안 사람들을 더 이상 고용하지 않고, 소작도 뺐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펜더가 남작 소유의 건물에 불을 지른 다음 목을 매 자살했기 때문이다.

 

남작이 아들 '지기'는 마을의 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놀지만, 어느 날, 농장 관리인 아들과 놀다가 그가 떠밀어 물에 빠지고, 제재소에서 밤에 엉덩이를 맞아 멍이 든 채 발견되기도 한다. 이 충격으로 남작 부인은 아들 지기를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가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돌아오는데, 그 사이 마을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병원으로 후송갔던 의사가 돌아오고, 의사를 돕던 산파 바그너 부인은 의사가 없는 동안 의사의 자식인 안나와 루돌프를 돌본다. 바그너 부인에게는 장애가 있는 아들 칼리가 있는데, 자기 자식을 돌보기도 어려운 처지임에도 바그너 부인은 의사의 자식들도 헌신적으로 돌본다.

하지만 어느 날, 칼리도 숲속에서 린치당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남작은 물론 마을 어른들은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고 벼르고 도시에서 경찰을 부른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을 공동체를 지키는 교회 목사에게는 딸 클라라와 아들 마르틴이 있다.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사건들에 대해 두 아이가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아버지(목사)는 두 아이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다그치지만, 두 아이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목사이자 아버지는 두 아이에게 '하얀 리본'을 다시 달겠다고 말하고, 실행한다. '하얀 리본'이란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이에게 일정 기간 '하얀 리본'을 달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어른들이 만든 징표다.

도시에서 온 경찰은 아이들을 다그치고, 협박하고, 을러대지만 아이들은 끝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 이때, 나레이터인 학교 선생님도 모르는 내용을 아이들만 알고 있다고 보여지는 장면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온 의사는 자기의 일을 도와주는 산파 바그너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이다. 그뿐 아니라 의사는 아내가 죽은 이후 딸 안나를 꾸준히 성추행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의사는 바그너 부인이 못 생기고, 냄새나는 역겨운 인간이라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바그너 부인은 도시의 경찰서를 찾아가 범인이 누구인지 고발하겠다며 마을을 떠난다. 그렇게 바그너 부인이 집을 떠나자, 곧바로 의사도 어느 날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난다. 마을 주민들도 그들이 언제 떠났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그렇게 의사와 산파가 마을을 떠나자 비로소 마을에서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의사와 산파가 불륜이었다는 것, 산파의 아들 칼리도 실제로는 의사의 아들이었다는 것, 의사의 아내가 출산하면서 죽은 것도 의사와 산파가 서로 짜고 죽인 거라는 내용 등등의 소문이었다.

마을은 이제 더 이상 범인을 찾을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고, 의사가 다치게 된 원인, 남작의 아들 지기가 다친 것도, 산파의 아들 칼리가 부상을 당한 것도 모두 누가 범인인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나레이터인 학교 선생님은 이런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다 목사의 자식들인 클라라와 마르틴을 찾아가 묻는다. 너희들은 알고 있지 않느냐고. 사실, 선생님은 클라라와 마르틴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을 거라는 의심을 갖고 있지만, 그렇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와 산파의 불륜, 의사 아내의 죽음, 소작농 아내의 사고사(이것도 단순한 '사고'인지, 아니면 누군가 만든 함정인지 알 수 없다) 같은 사건들을 두고 마을 어른들은 애써 모른 척 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이 자기에게 어떤 이익과 손해가 있는지 따져가면서 말하고 행동했고, '사실' 또는 '진실' 그 자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즉, 마을 어른들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알고 있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그들의 침묵은 권력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비참한 민중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겁에 질리고, 자기 목숨만 살겠다는 비겁하고 야비한 모습이기도 했다.

이것은 곧바로 1914년, 사라예보에서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과 함께, 유럽이 안고 있던 모순이 폭발하는 형태로 전쟁의 발발을 알린다. 1차 세계전쟁 직전에 일어난 이 작은 마을에서의 사건은 우연히 볼 수도 있지만, 위선과 불신으로 적대적인 주민들의 심리상태와 남작과 마을주민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 주종의 예속 관계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대립 등을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른들이 불신과 위선, 악행을 저지르면서 침묵을 강요하는 동안, 어린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어른들의 악행을 나름의 방식으로 응징하고 있었다. 앞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의사의 딸 안나와 목사의 딸 클라라는 같은 또래이자 친구다. 안나는 어느 날, 클라라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안나는 아버지인 의사와 산파 바그너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어린 자기에게 아버지가 다가와 성추행하고 있다는 걸 클라라에게 말하고, 클라라는 안나를 위해 복수하기로 생각하고 동생 마르틴과 함께 의사가 말을 타고 올 때를 기다려 나무 사이에 줄을 묶는다. 그렇게 의사가 부상당해 도시 병원으로 가게 되고, 소작농 펜더의 아내가 제재소에서 사고로 죽었는데도 아무런 보상도, 사과도 하지 않는 남작의 악행을 대신해 그의 아들 지기를 린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어쩌면 의사와 함께 안나의 엄마를 죽인 것으로 의심되는 바그너 부인의 아들 칼리도 린치해서 안나의 복수를 한다. 이 과정에서 클라라와 마르틴만 알고 다른 아이들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명의 아이들이 이 과정을 함께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범인을 찾아내거나 잡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클라라와 마르틴으로 대표하는 자식 세대는 그 부모세대와 심하게 불화하고 갈등한다. 즉, 구질서와 신질서가 작은 마을에서 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적(남작의 영지와 소작농)이면서, 세대적(부모와 자식)인 갈등의 표현이다. 또한 전통(농업)과 산업(자본주의)의 갈등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부모 세대로 인해 자식 세대는 질식할 것만 같은 억압의 고통을 당한다. 목사는 특히 가부장 질서와 보수적 체제 유지의 상징이며, 그의 자식인 클라라와 마르틴에게 '하얀 리본'을 다는 행위는 기성 세대가 자라는 세대에게 가하는 폭력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1차 세계전쟁을 예고하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1913년과 1914년이다. 1914년 1차 세계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은 패한다. 그리고 불과 20년이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등장한다. 히틀러의 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 시기 독일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수적, 극우적 분위기를 영화가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직과 순수를 강요하는 부도덕한 기성 세대의 폭력에 대응하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히틀러의 등장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독일은 이때 1차 전쟁의 패전국으로, 유럽 승전국에게 심한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것이 독일 내부의 결속을 다지며, 민족주의적 극우화로 진행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독일 국민들이 내부 개혁에 실패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불편한 상황을 꺼내 놓고, 그것을 관객에게 던지며 묻는다. 답을 구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 또한 마음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진실이나 사실은 쉽게 획득할 수 없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대개 불명확하거나 불투명해서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하고, 진실에 다가가려는 행위, 행동 자체가 용기라고 말한다. 침묵하는 어른들을 대신해 악을 응징하는 아이들의 용기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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