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 죽음의 바다
역사에서도 앞선 명량, 한산 전투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치열한 전투였던 노량 전투였고, 이 전투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면서, 여러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 기막힌 역사의 우연이지만, 위대한 영웅 서사에서 영웅의 마지막은 극적인 죽음으로 완성한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침략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을 지휘하며 연전연승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았을 뿐아니라, 일본군의 패퇴로 인한 일본 막부의 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일본 역사의 급변에도 직접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일본 해군이 이순신 장군을 두려워하고, 결국 일본에서 이순신 장군을 '신'으로 추앙하기 시작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출간했는데, 메이지 시대인 1892년에 이미 세키코세이가 쓴 '조선 이순신전'이 출판되었다. 세키코세이를 비롯 전쟁사 연구자 사토 데쓰타로가 쓴 [절세의 명장 이순신]과 함께 일본인에게 널리 이순신 장군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단재 신채호가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1908년)을, 박은식이 '이순신전'(1915년)을, 이윤제가 '성웅 이순신'(1931년)을 펴내며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 장군이 인민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물론, 일본인이 쓴 책에서 신격화된 이순신 장군은 일본해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판적 판단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즉, 임진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퇴한 건 조선 수군의 이순신 장군 부대가 워낙 강력한 전투력을 보였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의 형편 없는 전투력이 패퇴의 직접 원인이니, 현재(메이지 시대, 곧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일본이 세계를 정복하려면 일본 해군을 강력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한 의도가 깔린 내용이다.
현대 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신격화를 박정희가 주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는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 미국을 방문해 권력의 정당성을 승인받고, 국내에서는 소위 깡패를 잡아들여 사회정화를 이루고, 민족정기 운운하며 이순신 장군을 신격화 하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지금의 '현충사'가 건립되었고,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잘 드러내는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삶과 업적에 관해 많이 모르고 있으며, 올바르게 알릴 필요가 있다. 지난 군부독재 정권이 이순신 장군을 권력의 필요에 따라 이용했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최근 김한민 감독이 만든 이순신 장군 삼부작 영화는 과거 전체주의 국가에서 신격화 한 이순신 장군과 다른, '인간 이순신'의 면모를 잘 드러내면서도 해군 최고지휘자인 군인으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노량'은 진정한 의미에서 '삼국지'다. 우리는 중국의 역사 일부인 위, 오, 촉이 대립하던 서기 220년 경의 시대와 그 시대의 장수들 유비, 조조, 손권을 대표로 하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커서는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를 배운다. 하지만 중국의 '삼국지'는 중국 내부의 군벌들에 의한 권력과 지역 확장 싸움을 말하는 것으로, '삼국'이라고 해도 중국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노량'에 등장하는 조선, 명, 일본 막부는 온전히 다른 나라이며, 명실공히 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군사지휘자들이 조선의 바다에서 거대한 해전을 벌였으니, 이를 두고 '삼국지 전투'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본군은 이미 명량, 한산의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이후, 보급선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조선 내륙에서도 조선군, 명군의 연합부대와 의병(양반, 평민, 스님 등)의 활약으로 초기 승전을 제외하고 연일 패퇴하는 일본군의 상황을 볼 때, 임진-정유 전쟁은 명백히 일본군의 패전으로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노량'은 임진-정유 전쟁의 마지막을 확정하는 화룡점정이었으며, 뜻밖에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에서 서거하면서, 해전사 뿐 아니라 전쟁 전체를 놓고도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 또렷이 드러나고, 이순신 장군을 폄훼하고 악의적으로 깎아내리던 일부 신하들도 더 이상 이순신 장군을 두고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명나라 장군 진린이 참전하면서 줄곧 이순신 장군을 지켜보았고,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노야'라는 존칭을 쓰며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한 건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다. 심지어 명나라가 멸망하자 진린의 후손이 당시 조선으로 귀화해 지금 '진'씨 성을 쓰는 가문의 직접 조상이 되었으니, 진린 장군과 조선의 인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깊게 얽혀 있다.
'노량'은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세계 해전사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승전을 했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순신 장군에게서 거리를 둔다. 전투의 양상을 이순신 장군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보다, 명나라의 진린 장군, 일본의 시즈미 장군을 통해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명량'과 '한산'에서 일부 친일극우들이 '국뽕'이라며 영화를 폄하했는데, '노량'에서는 '국뽕'이라고 말할 수 없도록 보다 객관의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역사 기록에 있는 사실에 집중했음을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수군 1만 명, 명수군 1만 명, 일본수군 2만 명이 참전한 세계 최고 수준의 해전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불과 300명 남짓 전사했지만, 일본 수군은 1만2천 명이 전사한 걸로 기록되었다. 명수군도 3천 명 정도 전사했으니,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조선수군이 가장 적은 전사자를 기록한 건, 그만큼 조선수군의 전투력이 강력하고 우월했다는 반증이다.
조선수군은 이미 '명량'과 '한산'에서의 전투를 통해 충분히 실전을 경험했고, 승리한 경험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우리 앞바다에서 벌인 전투라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노량'에서의 일본해군은 이미 패퇴하는 상황이었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앞선 '명량'과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트라우마가 생생한 상태라, 조선수군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량'은 그런 세계 최고 수준의 해전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카메라는 일본해군 지휘부, 이순신 장군의 지휘부, 명수군 진린의 지휘부를 번갈아가며 비추고,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전투 상황과 각 나라 사이에서 오가는 은밀한 계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관객은 이미 역사에서 확정된 결과를 알고 있지만, '노량 해전'이 벌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승리의 통쾌함에 박수 치고,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총에 맞아 서거하는 장면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400년 전에 돌아가신 한 장군의 죽음을 보며, 지금,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고, 비통한 마음을 피부로 느낀다. 그건 우리가 400년 전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왜적의 침입에 목숨을 던질 줄 아는 의로움,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하고, 사악한 자 앞에서는 투지를 불태우는 우리 한민족의 뜨거운 유전자가 이순신 장군 이래 동학혁명의 전봉준 장군,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으로 이어졌고, 그 후손들이 촛불을 들어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끝장냈으며, 이명박, 박근혜를 쫓아냈고,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지금 비록 잘못한 선택으로 무뢰배들이 잠시 권력을 찬탈한 상태지만, 이것도 머지않아 올바른 궤도로 올라설 것으로 기대한다. 비록 역사는 갈짓자를 그리며 가는 듯 하고, 때로 한참 후퇴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늘 올바른 길을 찾았다. '노량'은 단지 위대한 영웅 이순신 장군의 삶과 죽음을 그린 영화가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조선의 운명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 바로 우리와 피를 나눈 한민족, 한가족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영화이며, 어떤 굴욕과 절망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싸워 이기는 한민족의 역사를 기억하라는 영화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는 순간, 우리 민족은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떠올리며, 지금 일본이 보이는 저 사악한 전쟁 기도와 국내에 있는 친일매국노들의 발호를 반드시 짓밟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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