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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잠 - 일상이 공포가 될 때

by 똥이아빠 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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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일상이 공포가 될 때
 
갑자기 수면장애가 생긴 현수의 수면 행동을 보게 된 수진은 무섭고 걱정이 많아진다. 수진은 출산이 가까운 임산부라는 핸디캡이 있고, 다른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과 걱정이 늘어나면서 이 영화가 공포 속으로 들어갈 여건을 제공한다. 현수가 수면장애를 앓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배우로 활동하지만 단역에 불과한 배우로, 늘 불안한 상태로 일하는 조건과 낮은 임금에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고,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아내가 임신해 곧 아기를 낳으면, 아이를 키워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어려움이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어서 현수는 마음이 불안하다.
불안하기는 수진도 마찬가지. 남편 현수를 사랑하지만, 갑자기 발생한 수면장애로 현수 자신은 물론 수진과 아기까지 해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공포로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까지 겹치면서, 수진을 둘러싼 일상이 모두 공포의 원인이 된다. 수진은 무엇보다 아기를 지켜야 하고, 수면장애로 고통받는 남편까지 돌보고, 보살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으로 지쳐간다.
여기에 출산한 임산부는 거의 대부분 산후우울증을 앓는다는 연구가 있는데, 수진은 현수의 수면장애를 계기로 엄마에게서 무당이 개입하는 걸 어쩔 수 없이 지켜보게 되고, 무당이 한 말 - 현수에게 남자 귀신이 씌었다는 말 - 과 우연히 알게 된 아래층 할아버지가 죽은 날짜와 연결하면서 산후우울증이 극도로 나빠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에 이른다. 수진의 엄마가 미신을 믿지 않고, 무당을 불러오지 않았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에서는 무속, 무당이 등장하지만, 이건 인간 사이에 떠도는 모든 비이성적 행위를 상징한다. 즉, '신'이라는 존재, '귀신'이라는 존재는 결국 같은 메타포이며, 아예 없는 존재를 만들어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고, 거기에 권위까지 부여하면서 인간 스스로 종속되길 바라는 심리는 현대 이전에 자연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미개한 인류가 가졌던 불안의 대체제였는데, 그게 현대에서도 통용된다는 건 그만큼 인간의 진화가 더디다는 의미이며, 인간의 미개함이 여전히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반증하는 장면이다.
 
수진은 산후우울증과 남편 현수의 수면장애로 인한 불안정한 일상으로 정신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과정을 보면 억지스러움이나 과장, 왜곡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진과 현수는 지극히 상식 있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이성적으로 대처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현수가 수면장애 치료를 받고 완치되는 과정이 그렇고, 수진이 아래층 사람에게 층간 소음을 일으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도 그렇다.
수진이 결국 미신에 굴복해 집안 전체에 부적을 붙이고, 아래층 할아버지의 사망 날짜와 현수가 수면장애를 일으킨 날짜가 같다는 것, 할아버지의 귀신이 현수에게 붙어 쫓아내야 할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다며, 할아버지의 딸을 인질로 잡아 고문하면서 할아버지 귀신을 쫓아내려 행동하는 장면은 극단적이긴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다. 수진으로서는 나름 합리적 추론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고, 지금 당장 그것밖에는 믿을 게 없는 확실한 단서이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할 근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할아버지 귀신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도 극단의 상황에 몰리면 비이성적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의외로 약한 고리를 갖고 있어서 스스로 이성과 합리로 굳건히 서는 사람이 많지 않다. 종교 미신에 빠지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고, 각종 사기, 그루밍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인간의 정신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하면 정신은 약해지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건 공포와 미신이다. 현수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다 수면장애가 발생하고, 수진은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이어서 아기를 낳고, 돌보고 보살펴야 하는 엄마가 되었지만, 산후우울증으로 힘든 상황인데, 여기에 남편 현수까지 수면장애를 앓게 되면서 일상의 어려움은 극대화한다.
현수가 아이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게 되면서, 그 상상에 지배당하는 수진은, 아이와 현수가 함께 보이지 않자 냉장고와 쓰레기통과 심지어 끓고 있는 곰국 냄비를 확인한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 실제 산후우울증을 겪는 엄마들이 매우 드물게 자기 아이를 살해하는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 또한 살해의 충동 만큼이나 강렬해서, 수진이 하는 행동은 현수가 보였던 수면장애 행동과 결합해 당연한 장면으로 보인다.
 
갈등이 고조되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영화는 결말을 드러내야 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끝까지 비상식적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과, 극적 긴장을 높이려는 장치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수진이 아래층 여성-사망한 할아버지의 딸-을 납치해 '할아버지 귀신'이 씌운 현수와 대치하며 가해하는 장면은 극적 과장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당시 수진의 정신 상태를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영리한 점은, 현수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배우의 능력을 마지막에 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영화 앞부분에서 수진은 남편 현수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연기를 잘 한다'고 칭찬한다. 비록 단역 배우이긴 해도 현수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무당이 현수에게 아래층 할아버지 귀신이 씌었다고 말하고, 그걸 믿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진은 100일이 지나기 전에 현수의 몸에서 할아버지 귀신을 쫓아내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때는 이미 현수가 병원에서 의사에게 수면장애가 완치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로, 현수의 입장에서는 수진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집안에 부적을 도배하고, 아래층 여자를 납치하고, 아래층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죽여 냉동실에 넣어둔 기괴한 행동을 보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수 자신이 수면장애를 겪었을 때를 생각하면, 수진이 지금 보여주는 행동과 자신이 수면장애를 겪으며 했던 행동이 결국 원인은 다르지만 같은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한다.
현수는 수진이 요구하는대로 할아버지로 빙의해 현수 자신의 몸에서 떠난다고 '연기'한다. 현수와 수진 두 사람은 이미 아래층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기에, 현수가 할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연기'하는 걸 보면서 수진은 할아버지의 귀신이 떠나는 걸 확인한다. 이때, 현수가 할어버지를 연기한다는 걸 수진이 전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진 역시 할아버지 귀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걸로 말할 수 있다.
다만, 수진이 그렇게 할아버지 귀신에 집착한 이유는, 산후우울증과 현수의 수면장애로 인한 돌발 행동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내야 할 탈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래층 할아버지의 존재가 수진에게 강하게 작용했던 건, 어찌보면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윗층에 사는 수진과 현수였으나,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층간소음에 항의하고, 잔소리와 불평을 끊임없이 내뱉으면서 가해자의 입장이지만 수진과 현수가 받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결국 이 영화는 현수의 수면장애 행동으로 시작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듯 보이는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현수의 불안은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불안정함, 단역으로 끝날 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 아내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삶의 무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수진은 출산하고 산후우울증을 앓는 상황에서 남편 현수가 보이는 수면장애 행동으로 아이와 자신마져 불안한 상황에 놓이면서 공포를 느낀다.
여기에 그동안 누적된 층간소음 문제가 할아버지의 죽음-귀신화로 이어지면서 평범한 일상이 곧 공포가 되고, 공포가 지배하는 일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공포를 깔끔하게 연출한 작품은 보기 드문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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