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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by 똥이아빠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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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묵직한 블랙코미디.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까, 영화는 기대보다 훨씬 훌륭했다. 좋은 영화는 극장에 불이 들어오고,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또한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할 여지가 많고, 함께 보러 간 사람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거나, 글을 쓸 이야기가 풍성하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좋은 영화다.
이미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밀수'도 신선한 소재와 액션, 복고의 재해석, 좋은 시나리오로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염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시나리오, 다층적 해석이 필요한 깊이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올해 개봉하는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다. 아직 보기 전이지만, '비공식작전', '보호자'도 평균 이상의 작품일 걸로 기대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리한 연출 형식을 보여준다. 멸망의 순간이 발생한 계절이 겨울이라는 건, 작품의 배경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울이면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바깥에서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얼어죽게 되는 엄혹한 환경이다. 즉, '황궁아파트'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아파트 밖에서 추위에 떨다 결국 얼어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당위를 설명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황궁'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려 아파트 밖으로 무리를 지어 나오는데, 이 장면은 200만 년 전의 초기 인류가 채집, 수렵을 떠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즉, 문명이 붕괴한 세계는 원시 세계로 회귀한 세계이며, 인간의 이성, 지성보다는 본능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다. '황궁' 사람들은 식량을 지키는 사람을 살해하고 전리품으로 식량을 획득한다. 이건 명백히 다른 부족을 살해하고 식량을 탈취하는 원시 씨족, 부족의 집단 전투를 떠올린다.
영화에서 '황궁'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이 식량을 두고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문명이 사라진 사회는 동물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인류가 이룬 문명이라는 게 얼마나 취약하고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 딱 한 번의 자연재해만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인류가 이룬 문명의 상징으로 '콘크리트' 즉 아파트가 붕괴하고, 유일하게 '황궁' 아파트만 우뚝 서 있다. 이건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장면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에서 첫 장면에 나오는 모노리스와 '황궁'은 상징적 의미에서 완벽하게 동일하다. '모노리스'는 '돌기둥 모양의 신비한 물체', '하나의 또는 고립된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붕괴된 문명에서 홀로 우뚝 선 '황궁'의 이미지는 기존 문명의 붕괴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로 보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자연재해와 혁명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하나의 현상이다. 영화에서 한반도에 들이닥친 지진은 측량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 멸망 수준의 재해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지표면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뒤집히는 건, 지구 표층의 지각이 분해된다는 걸 뜻한다. 이건 지구의 판구조에서 맨틀 위에 있는 지각이 벗겨져 나가는 것이며, 인류가 멸망 수준의 자연 재해와 맞닥뜨린 순간이다.
자연재해와 혁명이 같은 점은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재편한다는 거다. 혁명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지만, 자연재해는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유 없이 또는 억울하게 죽어간다.
한반도에는 멀쩡한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지 않았으며 - 그래서 황궁아파트의 존재가 특별하다 -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한반도 뿐아니라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지각이 벗겨지는 격렬한 지진이 발생한 걸로 보인다.
세계는 멸망했고, 파괴되었으며, 인류의 문명은 인류가 만든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사라졌다. 그렇게 문명의 시대가 사라지고,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있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가장 한국적 상황을 잘 그리고 있고, 또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반영한 블랙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청 받지 못한 까닭은, 영화의 작품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는 한국적 상황, 한국인의 정서를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주목받은 건 자본주의의 본질인 계급 갈등과 착취에 관한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인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천민자본주의와 그 상징물인 아파트, 아파트를 욕망하는 대중의 광기를 외국인들이 실감하지 못할 걸로 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역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이러니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지 주거 목적의 건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아파트는 한국자본주의의 표상이며, 아이콘이고, 우상이자 본질이다. 아파트는 욕망의 실체이며, 천민자본주의의 현현이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아파트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터무니 없이 비싼 분양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파트 청약을 한다. 은행에서 아파트 가격의 80%에 이르는 빚을 얻어 아파트를 마련하고, 평생 은행빚을 갚으며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 행복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구입한 아파트 가격이 두 배, 세 배 이상 오를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러면 은행빚을 다 갚고도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을 아파트를 통해 벌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부동산(아파트)는 지난 7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가격의 상승 곡선이 꺽이지 않은 '상품'이었다. 그것도 가파르게 올랐고, 지난 문재인정부는 아파트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는 공격을 받고 정권을 뺐겼다. 아파트 가격이 하향 곡선을 그린 건 윤석열정권에 들어서면서 일어났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콘크리트'는 '아파트'를 상징하는 단어다. 더 넓게 보면 인류의 문명을 대표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콘크리트가 항상 있다. 콘크리트는 고대 로마 시대에도 사용했다는 증거가 나올 정도로, 인류 문명에서 중요한 건축 소재였는데,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콘크리트 사용은 자본주의 발달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물질이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아파트가 많은 나라다. 전체 주거 건물 가운데 약 80%(아파트 63.5%, 공동주택 16.5%)를 아파트와 연립, 빌라 같은 집합, 공동주택이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들은 99%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고, 콘크리트의 붕괴는 곧 아파트(공동주택)의 붕괴를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말한다. 살기 좋은 곳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건 왜곡된 해석인데, 영화에서 '유토피아' 상황은 사실 가장 극악한 생존 환경일 때를 나타낸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파괴되어 땅 위에서 사라진 세상에서 '황궁아파트'만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기괴한 현실, 디스토피아 앞에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거주지, '황궁아파트'가 멀쩡한 이 상황을 보면서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재난에서 살아남았고, 몸도 다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평생 꿈꾸던 '아파트'가 멀쩡하게 서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황궁아파트보다 훨씬 잘 짓고, 분양가도 높아 돈 많은 사람들이 살던 '드림팰리스'가 무너지고, 거기 살던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걸 보면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쾌감을 느낀다.
'황궁아파트'는 이름마져 촌스럽지만 살아남았고, '드림팰리스'는 건설 대기업 회사가 분양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언어는 존재를 규정한다. 영어로 지은 아파트 이름이 점점 길어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시어머니가 아파트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길게 지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영어 이름이 점점 길어지는 건 아파트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뜻한다.
 
구 세계의 질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구세계(붕괴가 일어나기 전의 세계)에서는 '드림팰리스'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으나, 기존 세계가 붕괴하고, 질서가 파괴된 세상이 되면서, 그들은 새로운 자부심을 갖는 환경에서 살게 된다.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멸망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운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스스로를 '선택 받은 자'로 여기기 시작한다.
'황궁' 사람들은 재난이 일어난 초기에는 몰려든 사람들을 아파트 안으로 들이고, 먹을 걸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사람이 생존의 기로에 놓인다. 이때 '황궁' 사람들은 '주민'이 아닌 모든 사람은 '황궁'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이때 이미 '황궁' 사람들은 주민 대표로 김영탁(이병헌)을 선출했다. 김영탁은 몸을 사리지 않고 아파트의 화재를 진압하거나, 다친 사람을 구하는 등 살신성인의 태도를 보이면서 짧은 순간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스스로 어려운 일을 떠맡기 꺼리는 사람들은 김영탁을 '대표'로 내세워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한다.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는 말처럼, 세계가 멸망하자 평범한 사람 가운데 영웅이 탄생한다. 물론 김영탁의 행동은 뒤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나지만, 김영탁에 관한 복선은 오히려 김영탁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무리 없이 긍정하게 만든다.
과거의 '영웅'은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영웅 서사에서 '영웅'은 고향을 떠나고, 고난을 겪으며,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모험을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향한다. 김영탁은 구세계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는 주민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주민들이 바라는 욕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바꾼다. 영웅은 시대의 소망과 염원을 담지한 인물이고, 그 소망과 염원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집단 욕망이 한 사람의 '영웅'에게 투사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구세계의 회복과 붕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주제다. 멸망 수준의 붕괴가 일어나고, '황궁'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붕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때 주민대표로 김영탁이 떠오르고, 김영탁은 김민성(박서준)을 자신의 오른팔로 기용한다. 김민성의 등장과 퇴장은 '황궁'의 세계 즉 구세계의 질서가 어떻게 붕괴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김민성은 공무원이다. 그는 '황궁' 주민들이 무질서하게 우왕좌왕할 때, 집단의 중심을 잡으려면 '대표'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최초의 인물이다. 즉,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존재다. 김민성의 제안으로 김영탁이 주민 대표로 등장하고, 김영탁은 김민성과 함께 구세계(황궁)의 질서를 유지한다.
공무원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기존 질서를 지키고, 유지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공무원에게 혁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이며, 붕괴된 사회에서도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강박적 의무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공무원 김민성이 붕괴된 세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집단의 생존에 기여할 때, 개인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김민성은 김영탁을 도와 구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김민성은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통해 자기가 지키려는 구세계의 질서가 옳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김영탁의 신분이 드러나고, '황궁' 주민들이 김영탁에게 등을 돌릴 때조차 김민성은 김영탁을 믿는데, 그건 김영탁이 진짜 옳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김민성의 퇴장은 구세계의 붕괴와 연결되고, 구세계의 붕괴는 김민성의 죽음으로 정리된다. 김영탁의 퇴장은 한국에서 '아파트 공화국'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대중의 욕망이 결국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걸 상징으로 보여준다. 김영탁 자신도 아파트를 꿈꾸던 욕망의 피해자였으며, 아파트를 둘러싼 온갖 추잡한 상황, 갑질, 차별, 혐오 등의 반사회적 행위들이 결국 무너지는 아파트처럼, 욕망 덩어리의 인간을 깔아뭉개며 쓰러질 거라고 말한다.
 
탐욕의 결과
'황궁' 주민들은 멸망의 세계에서 살아남았고, 그건 그들이 '선택받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런 선민의식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초기 인류에게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주었지만, 복잡한 세계로 사회화하면서는 오히려 재앙으로 돌아왔다. 선민의식의 대표적 경우는 유대인의 신앙이다. 모든 민족의 설화는 선택받은 부족이 등장하고, 자기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 분리하는 것으로 공동체를 유지했다.
'선택받은 우리'는 다른 부족, 씨족, 개인을 배타하고, 혐오하며, 살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소중하지만, '저들'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견고한 집단을 이루어야 하는 동기와 배경으로 작동한다.
문명이 붕괴한 세계는 인류 초기의 사회처럼 단순하고, '황궁' 주민들은 유일하게 선택받았으며, 이들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황궁' 주민이 아닌 모든 사람을 타자화한다. '황궁'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괴한 소문을 듣는데, '황궁' 주민들이 인육을 먹으며 닥치는대로 사람을 살해한다는 소문이다. 이건 '황궁' 주민들이 듣기에는 거짓말이지만, 바깥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이 된다. 적대적 집단에 대한 공포와 구세계를 유지하려는 '황궁'의 보수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는 문명이 탈각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바깥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그 결과, '황궁' 주민들이 원정대를 꾸려 아파트 바깥에서 식량을 채집, 수렵하려는데, 붕괴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황궁' 원정대를 습격한다. 유일하게 온전한 '황궁'이 처음에는 '유토피아'였을 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세계에 집착하는 '황궁' 주민들에게 온전한 아파트에서의 삶은 안전하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고립되고 두려운 삶으로 바뀐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틀에 안주해 만족하다고 착각하는 동물은 진화에서 퇴화할 수밖에 없고, 결국 멸종한다.
'황궁' 바깥의 원시 세계가 된 곳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는 사람이 나타나고, 이들도 점차 집단을 이루며 '황궁'을 공격할 방법을 찾는다. 문명이 붕괴되고 다시 원시 사회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퇴화가 아니라 진화다. 새로운 사회의 형태가 어떻든, 바뀐 사회에서 살아남는 게 곧 진화, 자연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궁' 주민들의 삶은 변화한(붕괴한) 환경에서는 오히려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선택압을 강요당한다. 스스로 변화해서 붕괴된 사회에 적응할 것인지, 아니면 구세계의 질서를 고집하다 멸종할 것인지. 영화는 아주 짧은 장면으로 답을 보여준다.
 
대안 세계
김민성의 아내 명화는 인류의 보편적 양심과 상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붕괴되기 전의 문명 사회에서 간호사로 일했으며, 그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걸 드러낸다. 그는 붕괴된 사회에서 선택받았다고 여기는 '황궁' 주민들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한다. 그때문에 명화의 태도는 융통성 없는 답답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명화의 생각과 태도가 옳았다는 건 나중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확인된다.
'황궁'이 구세계를 상징하는 집단이라면, 붕괴된 문명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집단이 있다. '황궁' 주민들은 아파트 바깥 세상은 원시의 야만 세계라고 단정했다. 일부 사람은 인육을 먹기도 하고,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법과 윤리, 도덕이 사라진 사회여서 오로지 날것의 생존 경쟁과 강한 자만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할 걸로 생각한다.
'황궁'에 외부인들이 쳐들어오는데, 이건 당연한 수순이다. 온전히 남아 있는 '황궁'은 붕괴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새로운 욕망의 대상이다. '황궁'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건 시간의 문제일 뿐,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이건 '구세계'가 새로운 세계 즉 붕괴한 세계로부터 공격을 당해 구세계가 붕괴하는 걸 보여준다.
'황궁' 사람들은 '선택받은 땅'에서 쫓겨나 광야(붕괴된 사회)로 나간다. 그들 가운데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명화는 '황궁'을 떠나 광야로 나온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두려움에 떨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쓰러진 아파트를 꾸며 여럿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황궁' 주민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주관적 판단이었을 뿐, 그들이 '유토피아'로 생각했던 멀쩡한 황궁아파트가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세계였고, 문명이 사라진 '황궁' 바깥의 세계가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혁명 이후의 세계라는 걸 명화는 '황궁'에서 빠져나온 뒤 알게 된다.
명화가 만난 사람들이 여성들이라는 점, 그들의 뒤를 따라간 숙소가 쓰러진 아파트라는 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차별 없이 서로 음식을 나누는 장면과 명화의 손에 들린 주먹밥 한 덩이는 19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게엄군과 맞서 싸운 광주 시민들은 근대 세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짜 공동체를 만들었다.
시민군을 위해 광주시민은 누구랄 것 없이 먼저 거리로 나와 밥을 하고, 주먹밥을 나눴으며, 부상자를 위해 병원 앞에 다투어 길게 줄을 서며 헌혈을 했다. 명화가 받아든 주먹밥 한 덩이는, 한 끼의 밥이면서,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기이자, 붕괴된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희망의 상징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로 상징하는 한국인의 욕망을 재난 형식의 내용으로 훌륭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지난 70년대 이후 아파트를 둘러싸고 탐욕과 광기로 미쳐 날뛰고 있었고, 단지 '아파트' 가격의 상승과 하락만으로도 대통령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행동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영화에서 한순간의 자연재해로 인류는 멸망 수준의 괴멸을 맞이하는 것처럼, 0.75%의 잘못된 선택으로 한국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붕괴되는 현상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강력한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이 붕괴되는 과정에 있으며, 집단이 만든 사회(국가)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가를 실감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자연재해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관료, 정치가, 공무원들이 극도의 이기적 행동과 잘못된 판단, 탐욕의 노예가 되어 소수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사회 시스템은 붕괴한다.
김영탁이 '주민 대표'가 되어 내세운 주장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었다. 즉, 아파트 주민이 아닌, 외부 사람들을 내쫓고,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지만,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외부와 연대를 거부하는 행위로, 생존의 확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다.
생존한 '황궁' 주민들은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외부인을 몰아낸다. 짧은 순간, 그들의 행동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식량이 바닥나면서 곧바로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 이미 외부와 고립되어 있고, '황궁' 바깥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살아갈 동력이 없는 한, 내부로부터 붕괴가 시작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들 자신이 판단을 잘못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 외부의 침탈을 막아낼 힘도, 능력도 사라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드러내지 않지만, 지도자(김영탁)의 잘못된 판단, 대중(황궁아파트 주민)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판단이 결합하면서 멀쩡하던 아파트의 외형과는 달리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내부에서 붕괴하는 걸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소수 집단이 장악하고, 그 집단의 욕망을 사회에 투사해 이익을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 하는 부패의 대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정부가 만든 정상적인 시스템을 망가뜨리면서 사회(국가)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불법을 당연하게 저지르면서 권력을 장악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후안무치, 뻔뻔함과 야비함을 일상화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괴멸적 붕괴가 발생하는 장면과 오버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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