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가족의 기원은 인류의 진화와 함께 한다. 200만년 전, 인류가 숲에서 초원으로 나와 두 발로 걷기 시작하기 전부터, 가족은 있었다. 거의 모든 동물은 새끼를 낳고 기른다. 하지만 모든 동물이 자기 새끼를 돌보는 건 아니다. 포유류가 등장하고, 미숙한 상태로 새끼를 낳은 경우, 암컷은 미숙한 새끼를 일정 기간 돌보도록 진화했다.
진화 과정에서 거의 모든 동물은 새끼가 어미 배에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걷기 시작하는데, 그건 생존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 아기가 매우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미숙한 상태로 아기를 낳지만, 엄마가 출산하는 과정에서 사망할 확률을 줄이고, 부모가 아이를 집중해서 돌보므로 아기의 사망률도 낮출 수 있다. 여기에 포유류는 엄마 젖을 먹이면서, 특히 영양가 많은 젖이 엄마에게서 곧바로 아기에게 전달되므로 생후 1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다.
인간에게 '감정'이 생긴 것도 진화 과정에서 엄마와 아기의 교감 과정에서 발생한 걸로 진화인류학자는 설명하고 있다. '가족'이라고 할 때, 1차원은 엄마와 아기의 관계다. 숫컷(남성)은 경우에 따라 가족이 되거나,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엄마와 아기는 반드시 존재한다. 엄마가 여러 명의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한다면, 그렇게 최소 단위의 가족이 형성되고, 그런 가족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씨족'으로 발전한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초기에는 집단혼으로, 씨족 내부에서 암컷과 수컷이 특정한 대상과 짝을 이루지 않고 자유롭게 교미했고, 새끼의 육아도 공동이었다. 새끼를 키우는 과정에서 수컷과 암컷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눠지고, 사냥과 힘든 일은 수컷이, 육아, 집안 일, 채집은 암컷이 맡기 시작했고, 일부다처, 일처다부, 일부일처는 집단에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 나타난 제도다.
가족은 집단의 최소 단위이면서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최소 단위다. '가족'은 깊은 애정과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적, 관념적 태도보다는 잉여생산물이 등장하고, 사유재산이 발생하면서 권력을 가진 남성이 자기의 부와 권력을 세습하려는 목적으로 '친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처일부, 일처다부가 발생했고, 이런 형태의 가족 구성은 유전자의 이기적인 성향이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남성가부장제를 중심으로 가족을 이뤘고, 우리는 가족이라면 부모와 자식을 기본으로, 혈연으로 이어진 작은 집단을 뜻한다고 알고 있다.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았다. 파를 나누지 않아도, 성별이 같아도, 낳은 아이가 아니어도 한 집에 모여 살면 가족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가운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브로커' 등은 모두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는 드물지만 외국 특히 미국, 유럽에서는 어린아이를 입양해 자식으로 키우는 사례가 많다. 인종도 다른 아이를 자식으로 키우고, 가족이 되는 건 '순혈주의'에 집착하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내용이다.
'고령화 가족'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엄마,와 세 남매는 한 지붕에서 사는 가족이지만, 그들이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이들이 '가족'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온전히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태양계처럼 항성의 존재가 있고,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이 있는 것처럼 구성된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가족의 권력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인력의 구심점, 중심이 되는 인물이 반드시 있어야 '가족'이 형성된다.
'엄마'는 가족의 중심이다. 보통은 '아버지'가 가족의 중심이겠지만, 이 가족들은 이미 해체되었다 각자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떠났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므로, 아버지의 부재는 이미 오래되었다. 엄마는 남편 없이 세 아이를 키웠고, 그들은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갔다 온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실패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엄마는 돌아온 자식에게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품어 안는다.
세 자식 모두 아버지는 달라도, 엄마가 낳은 자식이거나 엄마가 키운 자식이니, 엄마에게는 '똑같은' 자식이다. 엄마는 한결같이 자식을 품으려 애쓴다. 자식들이 40대, 30대 중년이 되었어도 변변한 삶을 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이제는 손자를 돌보며 편하게 살아야 할 나이의 엄마는 여전히 하루의 끼니를 위해 화장품 가방을 메고 거리를 누빈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삶을 긍정한다.
엄마의 평생은 고단하고 힘겹게 이어져왔다. 큰 아들 한모는 전과자에 백수, 둘째 아들은 똑똑해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영화감독이 되었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역시 백수, 막내 미연은 출가외인인데 남편과 싸우고, 이혼하길 반복하면서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이만하면 엄마는 속이 썩겠지만, 그는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끊이지 않는다.
모든 모성이 이 영화 속 엄마와 같지 않다. 심지어 모성은 타고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모성이 인류의 본능이자 모든 암컷, 여성이라면 유전자에 각인된 선천적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상으로 보면 모성이 본능인 듯 보이지만, 여성은 몸속에서 태아를 10개월 동안 기르면서 태아와 감정적 애착이 발생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갈 자식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우려는 감정이 발생한다.
이때 엄마가 아이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외부의 환경이 충족되면 엄마는 아이에게 애정을 갖고 돌보지만, 외부 환경이 열악하고, 엄마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우면 아기는 엄마의 돌봄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아진다. 즉, 엄마와 아이의 애착 관계는 '사회압'이 작동해서 결정한다.
세 자매의 엄마는 한결같이 자식을 사랑한다. 큰아들 한모는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엄마에게는 아들이다. 알고 보니 인모와 미연도 엄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이들은 한때 모래알처럼 버성기며 따로 놀았지만, 나이 들고 다시 돌아온 집에서 한바탕 소동극을 벌이고 가족의 사랑과 애틋함을 새삼 확인한다.
가족을 뭉치는 힘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우리들끼리는 다투고 미워해도, 다른 사람들이 내 가족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 비록 미워도 내 가족은 외부의 공격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곧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가족을 확대하면 나라가 되고,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내우'는 끊이지 않지만, '외환'이 발생하면 국민들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바깥의 적에 맞서 함께 힘을 모으는 게 당연하다.
지금(2023년 현재) 나라꼴 돌아가는 걸 보면, 자기 식구들끼리 싸우는 와중에 바깥의 적이 쳐들어왔는데도 오히려 가족의 일부가 바깥의 적과 함께 가족을 폭행하는 상황이다. '고령화 가족'은 애틋하게 화해하지만, 이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져 권력을 가진 자들이 증오의 폭언을 퍼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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