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 류승완 감독 작품
70년대, 무법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버드 무비
류승완의 영화는 경쾌하고 빠르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연출이 돋보이는데, 그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보여준 뛰어난 연출 특히 액션은 류승완 영화의 특징이다. '밀수'에서도 짧지만 강렬한 액션 장면이 두 부분으로 나오는데, 권필삼과 장도리 패거리가 싸우는 장면은 좁은 공간에서 치밀한 계산을 통해 만들어 낸 멋진 장면이다.
물속으로 들어간 해녀들을 죽이러 장도리 부하들이 들어가는데,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해녀들과 산소통을 매고 무기까지든 조폭들과의 결투는 한국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물속 액션으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장면이다.
영화의 무대인 '군천'은 '군산'을 상징하는 걸로 보인다. '군산'과 '순천'이 당장 떠오르는데, 사람들은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지만 드물게 들리는 사투리는 전북 사투리에 가까운 걸 보면, '군산'으로 봐도 크게 문제되지 않아 보인다. 이곳에서 진숙의 아버지 엄선장은 평생 작은 배로 어업을 하며 살았는데,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어민의 삶은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이 시기가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을 부르짖으며,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산업화'를 밀어부치던 때인 걸 감안하면, 농민, 어민의 삶을 망가뜨리면서 산업자본가의 성장을 전폭적이고 전면적으로 지원하던 상황이었다.
내 개인적인 기억에서도 1976년 무렵, 지금의 울산, 울주 공업단지 근처의 공사장에서 일할 때, 그 마을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개울의 상류에서 시커먼 강물이 떠내려오는 장면을 똑똑히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산업화, 경제발전의 구호가 모든 걸 덮고, '새마을운동'이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따라하던 시절이었다.
해녀들과 함께 일하는 엄선장은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지면서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주로 일본에서 들어오는 밀수품을 공해에서 바다 아래로 던져 가라앉히면, 해녀들이 들어가 밀수품을 건져올리고 수익의 일부를 배당받는다. 이건 분명한 범죄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그럼에도 엄선장은 이 일을 계속할 지 갈등한다.
밀수는 이런 지방 어촌에서도 돈벌이가 될 정도로 활발했는데, 부산항이 가장 큰 밀수 통로였으며, 일부 범죄 조직이 개입한 건 물론, 대기업도 밀수를 적극 활용했다. '삼성'의 이병철이 일본 기업과 공모해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각되었고, 미군부대를 통해 국내로 반입되는 외국산 물건 역시 천문학적 금액에 이른다. '밀수 경제'라는 말이 돌 정도로, 이 시기의 '밀수'는 한국 경제에서 지하경제의 중요한 한 부문을 이루고 있었다.
영화는 70년대 서해안의 한 도시 '군천'을 배경으로 하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 또는 약한 주체가 강한 상대, 거대한 악을 상대로 싸우는 건 류승완 영화의 특징인데, '밀수'는 그의 두 번째 작품 '피도 눈물도 없이'와 쌍을 이루거나, 변주를 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두 여성 수진과 경선처럼, '밀수'에서 '진숙'과 '춘자'는 폭력의 세계와 맞서 싸운다. 주인공이 여성인 건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해녀는 가장 힘든 일을 하면서도 가장 적은 보상을 받는다. 즉, 여성은 이 사회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면서 가장 적은 보상을 받는 존재로, 자본주의 체제, 남성가부장제의 폭력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다.
여성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이중, 삼중의 고통과 억압을 받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여성들의 연대는 자연스럽고, 약자들이 힘을 모아 강자(사회적 구조와 남성)와 싸우는 건 좋은 전술이다.
'밀수'는 서사도 좋지만, 음악은 더 좋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장기하가 선택한 음악들은 70년대 감성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좋은 음악들이다. 70년대의 추억을 가진 장년 이상 세대라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정도다.
'밀수'에 나오는 음악은 개인적으로 전부 다 좋아하는 노래들이고,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던 추억이 있어서 반가웠다. 여기에 '돌비 시스템' 극장에서 훌륭한 음향으로 음악을 들으니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시간이 행복했다.
영화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려면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매우 뛰어나고 훌륭한 건 물론이고, 쿠엔틴이 심혈을 기울여 선곡한 음악들이 영화를 더욱 돋보인다.
'밀수'에서도 류승완 감독의 연출과 서사도 훌륭하지만, 장기하의 음악 선곡이 영화와 마치 한몸처럼 잘 어울려서 영화 보는 즐거움이 더욱 크다.
류승완 감독의 작품 가운데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도 눈물도 없이'와 '밀수'는 버디 영화이면서 마지막에 돈가방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속임수와 복선과 반전이 '밀수'에서도 자주 보인다.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끌고 나가지 않는 류승완 감독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이렇게 되면 관객은 감독이 만든 미로를 추측하느라 머리를 써야 한다.
'밀수'에서도 각 조직 - 진숙과 춘자네, 권상사, 장도리, 세관 - 은 밀수품을 차지하려 온갖 술수를 쓰며, 상대를 속이려는 전술을 구사한다. 이때 해녀팀은 가장 힘 없고, 이용만 당하는 존재였지만, 춘자의 등장으로 핵심 변수이자 경쟁 상대로 떠오른다.
세 조직으로부터 협박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해녀들은 그들 모두를 따돌리고 마지막 한 건을 성공해야 한다. 여기에, 진숙의 아버지와 동생을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도 해야 한다. 성공하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지만, 실패하면 바닷속에 가라앉을 뿐이다. 액션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을 돋보이게 만든다.
류승완 감독은 한국영화판에서 '주류'에 속하는(본인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감독이지만, 그는 여전히 키치적 감성을 갖고 있으며, 고상한 척 하지 않는 솔직하고 순수한 면을 보여준다. 그는 '액션 키드'로 성장했으며, 충무로의 밑바닥을 전전했고, 그보다 더 전에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빈민의 삶을 살았다.
류승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가난하고 불행한 과거를 가졌다. 감독은 자기가 만든 인물에게 연민과 애정을 가졌으며, 그들이 더는 불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수진, 경선, 진숙, 춘자처럼 지독하게 힘든 시절을 겪은 주인공들이 이제는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을 보여주려 한다. 그건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다. 우리가 서로 연대하고, 돕고, 힘을 모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다.
'영화를 보다 > 한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봄 (1) | 2023.11.28 |
---|---|
보호자 (0) | 2023.11.26 |
고령화 가족 (0) | 2023.09.04 |
콘크리트 유토피아 (0) | 2023.08.14 |
밀수 - 2회차 관람 (0) | 2023.08.03 |
범죄도시3 (0) | 2023.06.06 |
장화, 홍련 (0) | 2023.05.17 |
헤어질 결심 (0) | 2022.07.03 |
꽃 피는 봄이 오면 (0) | 2022.06.27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0) | 2022.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