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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헤어질 결심

by 똥이아빠 2022. 7. 3.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이 그동안 결코 보기 쉽지 않은 영화인건 분명하고,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다양한 메타포로 드러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 영화는 더욱 인물의 심리, 감정의 복합성,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비언어적 상태, 드러내고 싶지만 억눌러야 하는 감정, 그러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비극성을 드라마틱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형사(해준)와 피의자로 의심받는 피해자의 아내(서래)가 사건으로 우연히 만나면서 발행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일시적 욕망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서래의 남편 기도수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은 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종결한 이후, 해준은 우연히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고, 서래가 범인임을 알게 되면서, 자기의 판단이 틀린 걸 자책하고, 서래를 잊기로 마음 먹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해준과 서래의 서사는 두 사람이 만나면서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비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이 과거의 서사가 두 사람의 만남과 비극으로 이어지는 걸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서야 알게 된다.
 
해준은 강력계 형사로,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일반의 강력계 형사가 보여주는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그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말투도 상스럽지 않고, 합리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수사를 하는 인물이다. 그는 능력 있는 경찰이어서 다른 경찰보다 일찍 승진해서 '팀장'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해준은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동료 경찰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해준의 뒤에서 그를 질투, 시기한다.
잘 나가는 형사인 해준은 그러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아내와는 직장 문제로 서로 떨어져 지내고 있다. 그가 불면의 나날을 보내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지내야 하는 외로움 때문인지, 형사로서 범인을 잡지 못하는 부담 때문인지, 온갖 사건 현장에서 보게 되는 잔인하고 참혹한 장면 때문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해준의 감정을 짓누르고 있는지 관객은 해석하기 어렵다.
해준의 불면이 단지 호르몬의 영향이라도 해준이 서래를 만나면서 사라지는 불면의 결과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해준의 불면이 그가 놓여 있는 현재의 상황 - 아내와의 불안한 관계, 형사라는 특수한 직업이 주는 압박감 - 에서 오는 것이라면 서래와의 만남 이후 사라지는 불면은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된다. 어쩌면, 해준의 불면은 이런 짐작 가능한 이유보다 훨씬 더 멀리, 깊이 있는 건 아닐까.
 
서래는 중국인으로 그려지지만 그의 할아버지가 조선인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한국에 밀입국한 이유도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찾으려는 목적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세상이 달라졌고, 할아버지의 유산인 산(호미산)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밀입국한 일행이 모두 추방되었지만 독립운동가의 손녀라는 이유로 서래는 한국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연고 없는 한국에서 서래는 생존을 위해 나이 많은 출입국 공무원 기도수와 결혼한다. 서래는 중국에서 병을 앓고 있던 엄마를 돌보려 간호사가 되었고, 엄마의 간절한 부탁으로 엄마를 안락사하고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왔으니 그는 가족도 없고, 돌아갈 고향도 없는 고아다.
서래의 비극은 그의 존재에서 비롯한다. 그가 남편 기도수를 살해하게 되기까지 그의 삶은 고생스럽고 참담했다. 병든 엄마를 모셔야 했고, 엄마의 부탁으로 엄마를 안락사시켰으며, 피붙이 없는 한국으로 밀항해 나이 많은 남자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그 남자에게 날마다 폭행당하는 삶을 살았다. 
서래가 살았던 스물 몇 해의 시간 대부분은 중국이었으며 그의 모국어는 중국어다. 그의 핏줄이 조선에 있고, 조선의 피와 조선의 산하가 그의 고향임에도 그는 고향의 언어를 잃었고, 고향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그의 존재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경계에 놓여 있으며, 그 불안함이 서래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
 
해준이 서래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유리 같은 마음의 벽에 한줄기 금이 생기는 걸 느낀다. 이유는 해준 자신도 모른다. 서래라는 존재 자체가 그에게 닥친 하나의 충격이자 파열음이며, 낯설지만 익숙한 감정이라는 걸 느낀다. 서래는 남편 기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지 않았으며, 슬퍼하는 시늉도 내지 않았다. 
그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졌고, 그의 몸에는 기도수가 남긴 상처와 흉터로 얼룩졌다. 그것만으로 이미 서래의 무죄는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서래는 손등의 상처와 허벅지의 상처를 설명한다. 겉으로 '반듯한' 남편이자 출입국 공무원인 기도수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 서래를 폭행하는 남자였다. 무서운 소유욕을 가진 기도수는 서래의 몸에도 자기 이니셜을 문신으로 새길 정도로 서래에게 집착했고, 서래를 끊임없이 의심했으며, 의처증을 앓고 있었다. 서래는 몇 년 동안 기도수의 폭행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았고, 지옥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해준이 서래의 '진짜' 모습을 알기 전에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고, 우연히 서래의 알리바이를 확인한 이후, 해준은 서래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자부심이 무너지는걸 느낀다. 서래의 행동, 엄마를 안락사하고, 폭행하는 남편을 살해한 건 '법'으로 처벌할 수 있어도 도덕과 윤리로는 처벌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걸 해준은 잘 알기 때문에 서래가 범인인걸 알면서도 그를 위해 증거를 인멸한다.
 
서래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따뜻한 남자를 만났다. 그가 남편의 사망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만난 남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고, 자기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 남자였다. 서래는 중국에 살 때, 자존감이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으나 한국에서는 그의 존재가 비참하게 망가진 채 살아왔다. 
서래가 해준을 만나면서 짓밟혔던 자존감이 살아나고, 삶의 희망과 의지가 싹을 틔웠지만, 그는 형사인 해준을 속여야 했고, 용의자와 형사로 만나는 도덕적 부담과 마음 한쪽에서 일렁이는 애틋한 감정의 갈등으로 괴롭다. 
자신의 뒤를 밟는 해준을 의식하며 그는 먹는 것, 일상의 행동, 사소한 움직임도 의식하게 되고, 해준의 눈길이 감시와 연민이라는 두 개의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해준을 속여야 하는 마음 한쪽과 해준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뒤섞이면서 서래는 죄의식과 해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해준이 '월요일 할머니'의 스마트폰에서 발견한 138층 기록은 우연한 발견이었으나 그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서래는 할머니의 스마트폰을 초기화할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해준이 그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미 완벽한 범죄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고, 사건이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수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때문일까.
아니면, 서래의 내면에서 깊은 죄의식이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해준이 알아채고 자신이 지은 죄를 처벌하도록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해준은 서래의 범행을 확인한 다음에도 서래를 추궁하기보다 자신을 책망한다. 유능한 형사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의 행동이 서래를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흐려지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서래를 떠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해준은 서래를 잊고 아내 곁에서 깊어가는 우울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해준은 서래가 다가오면서 보인 행동을 되짚어 생각하다 깨닫는다. 서래는 해준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했고, 그의 수사를 도왔으며 그동안 추적하면서 잡지 못한 범인을 잡아 수사를 종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해준은 용의자에서 벗어난 서래를 마음 편하게 만났고, 조금은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갔다. 그 과정에서 서래는 종결한 수사자료를 모두 불태우거나 삭제해 증거를 인멸한다. 
시간이 지나 해준이 결정적 단서를 확인하면서, 서래의 그 모든 행동이 증거를 없애려는 행동이라고 판단한 해준은 종결한 사건이라도 결정적 단서가 나오면 재수사할 수 있지만, 서래를 범인으로 체포해서 얻을 이익이 전혀 없다는 점, 오히려 유능한 형사로 이름난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래를 놓아주면서 그를 잊으려 한다.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밝혀내고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유일한 증거인 '월요일 할머니'의 스마트폰을 가져와 '멀리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해준에 대한 감정의 색깔이 바뀌는 걸 느낀다. 서래의 마음에서는 형사 해준을 속여야 하는 마음과 인간 해준을 좋아하는 마음이 뒤섞였고, 해준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갈등으로 괴로웠다.
사건은 종결되었고, 더 이상 해준을 만날 수 없는 서래는 해준을 만날 계획을 세운다. 해준이 서래에게로 통하는 마음의 통로를 끊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깊은 우울에 빠져들고 있을 때, 서래는 다시 해준을 향한 마음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와 해준. 해준의 마음이 썰물이라면, 서래의 마음은 밀물이다.
서래는 재혼하고 해준이 사는 지역으로 이사온다. 시장에서 우연히 두 부부가 마주치는 순간, 해준은 복잡한 심정으로 표정이 일그러지고, 서래는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담담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 있나요?'라고 말하던 서래는 자신의 말을 실천한다.
 
용의자와 형사로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수사가 계속되어야 만날 수 있으며, 미제 사건으로 남아야 잊혀지지 않는다는 아이러니에 이른다. 서래는 해준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고, 용의자가 되어서라도 만나고 싶다.
서래의 남편이 살해당하고, 범인이 잡힌다. 범인은 서래 남편의 채권자. 금융 사기를 치던 서래의 남편은 결국 채권자의 손에 살해당하고, 서래는 이번에도 완벽한 알리바이로 범죄 혐의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해준은 지난 사건의 트라우마로 서래를 의심한다.
서래는 해준을 향해 다가가지만 해준은 서래를 밀어낸다. 해준도 서래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깊으나 그럴수록 해준의 트라우마도 커진다. 어쩌면 서래는 해준의 또 다른 자아일까. 서래처럼 되고픈 해준의 바람은 해준이 놓여 있는 상황으로 불가능하고, 서래를 의심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서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신의 자부심을 무너뜨려야 하고, 그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직업적 자부심은 곧 그의 정체성이기에, 해준이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필연적으로 서래와 결별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이미 돌이길 수 없는 행동으로 파멸의 절벽으로 나아가는 서래는 우연히 해준을 만났고,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와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인걸 알면서도 서래는 해준을 잊지 못한다.
서래는 다시 태어나고 싶고, 해준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 들끓는다. 그는 엄마를 안락사한 것에는 죄책감이 없고, 남편을 살해한 것도 자기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며, 해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완벽한 알리바이로 무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서래가 해준을 향해 보내는 마음의 손짓은 '나를 구원해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지만, 해준은 그런 서래의 절박함을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다. 용의자와 형사로 만난 두 사람의 운명이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원인이며, 서래의 운명적 비극의 단초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잊지 말라'고 말할 때, 헤어지고 싶지 않은 강한 열망을 마음에 지닌 채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때, '당신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고 말할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났음을 뜻한다. 싫어서, 미워서 떠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떠야야 하는 순간, 멀어지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당신은 자세가 꼿꼿하군요.'라고 해준은 서래에게 말한다. 서래가 놓여 있는 존재로서의 삶은 비루하지만, 그의 내면, 그의 정신은 비루한 삶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다. 그런 꼿꼿함은 서래가 독립운동가의 손녀라는 의식도 작용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어도 비루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을 서래는 오래 전부터 내면화했을 걸로 보인다. 
 
서래가 해준을 향해 마음을 열어 보였으나 해준은 서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서래가 범죄용의자이고, 자신이 형사라는 특수한 관계때문이라 생각하지만, 그보다 해준은 아내 정안과의 관계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한다. 주말부부로 살면서 부부의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해준이 정안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서래가 나타나고, 서래의 뒤를 밟으면서 해준은 한 '여성'을 깊이 알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서래의 삶, 생활. 고독하고 쓸쓸한 서래의 시간을 지켜보며, 해준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아내 정안이 있으나 해준의 삶도 서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면의 밤이 이어지는 원인도 해준이 자기 삶에서 본질이 무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뿌리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불안에 근거한다는 걸 해준은 알지 못한다.
서래가 찾아와 잠 못 이루는 해준을 위해 숨소리를 맞춰주며 잠을 재우는 장면은, '아가씨'에서 숙희가 아씨(이즈미 히데코)를 목욕시키면서 웃자란 송곳니를 갈아주는 행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두 사람이 이미 깊은 관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해준은 서래를 통해 위안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무엇이 해준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을까.
 
서래의 '꼿꼿한 자세'는 해준의 품위를 말한다. 해준이 지켜온 자부심, 명예, 품위는 '꼿꼿한 자세'에서 비롯한다. 그런 해준의 태도가 무너지는 건 서래를 향한 욕망때문이었고, 서래는 곧 해준의 욕망을 상징한다. 서래가 해준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서래가 해준에게 다가올수록 해준은 서래를 경계한다. 해준에게 '욕망'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다.
해준은 서래를 '욕망'하지만 결코 다가서지 못하며, 끝내 외면한다. 하지만 해준은 바다에서 사라진 서래를 찾아다니며 부르짖는다. 바다는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의 세계다. 해준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이성의 갈등은 해준을 불면에 이르게 하고, 해준의 불면은 또 다른 자아를 만든다.
해준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은 서래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 때였다. 그건 해준이 욕망에 순응하고, 욕망이 이끄는대로 마음을 열었을 때, 해준의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증거다. 하지만 해준의 이성은 욕망을 경계하고, 멀리하라고 윽박지른다. 해준은 아내 정안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때문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해준은 아내 정안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과도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단호하게 결별하지 못한다. 해준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울부짖는다. 세상을 알지 못한 채 생존하기 급급했던 서래가 해준을 만나면서 '사랑'을 알게 되고, 자기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해주었을 때, 그 감격과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그런 해준이 바로 자신으로 인해, 즉 '욕망'으로 인해 번민과 고통을 받는다고 느끼자, 서래는 해준에게서 사라진다. 다만, 칼로 무우를 베듯, 완벽하게 사라질 수는 없다. 해준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서래를 찾아 헤맬 것이고, 오래도록 바닷가를 서성일 것이며, 영원히 서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건 해준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이자, 운명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카프카적이다. 다가설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짙은 안개를 헤치며 앞으로 나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가는 길 또한 안개에 휩싸인 채 사물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안개는 서래와 해준의 관계이자 운명이다. 그들은 안개 속에서 만나고, 안개 속에서 헤어진다. 
모호함, 불분명함, 사람의 감정도, 세상의 흐름도 무엇하나 또렷하고 분명한 건 없다. 사랑도, 미움도, 욕망도 안개처럼 모호하다. 안개는 낮과 밤의 경계를 없애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미한다. 해준에게 서래는 욕망의 대상이자 욕망 그 자체이며, 서래에게 해준은 이상이자 이상 그 자체이다.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고,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형체를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운명이고, 해준은 사나운 바다에서 울부짖는다.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슬퍼하며,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며, 새로운 삶의 희망이 사라진 것을 애통하며, 두고 온 저 먼 과거의 쓰라린 아픔을 연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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