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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장화, 홍련

by 똥이아빠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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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
 
다시 봤다. 공포의 뿌리에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다. 이 작품에서 슬픔의 근원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엄마와 동생의 죽음-이고,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아버지다. 여기서 아버지는 가족 관계를 파탄낸 주범이자, 남성 가부장제의 전형으로, 자기 욕망을 위해 아내와 자식(딸들이다. 아들이었다면 과연 버렸을까)을 버렸다.
이 작품의 비극은 수미의 트라우마를 표현하고 있지만, 정작 아내와 막내딸을 죽게 하고, 큰딸을 미치게 만든 아버지는 멀쩡한 데 있다. 가해자는 멀쩡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도 않고, 오히려 젊은 여자-제자이자 간호사-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피해자인 수미는 죽음보다 더 큰 공포와 괴로움과 슬픔에 갇혀 질식하고 있다. 이건 잔혹한 부조리극이고, 비틀린 관계와 공간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갇힌(밀폐된) 존재의 몸부림이다.
 
아버지는 가족을 이룬 주체이자, 가족 위에 군림하는 군주다. 그는 자기가 세운 왕국을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에 집착한다. 아내의 죽음은 자기 의지로 목숨을 끊는 진정한 의미의 '자살'이 아니라 -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 - 남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왕이자 군주이고, 섬기는 '주인')의 불륜으로 인한 고통, 분노, 절망, 슬픔, 배신 등의 감정으로 질식하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니, 엄연한 타살이다.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새로운 여자를 소유해야 하는 남편(남성)의 욕망은 아내가 동등한 인격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소유물이고, 자기의 경력, 취향을 갖추는 도구나 장식물로 여긴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아내가 자살하기까지의 긴 시간을 상상하면, 아내가 겪었을 고통의 깊이와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영화 '링'에서, 사다코가 겪은 공포, 두려움, 절망, 분노, 슬픔의 시간 - 우물에 빠져 살아 있는 상태로 30년을 갇혀 살았을 그의 입장 - 을 생각하면, 그의 저주와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수미, 수연의 엄마가 겪었을 긴 시간의 복합적인 부정적 감정이 그녀의 정신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 아니면 남편을 죽이거나, 자식들을 죽일 수도 있지만, 이 여성은 자기를 파괴하는 걸 선택했다 - 상황까지 몰리는 걸 상상하면 끔찍하다.
 
수미, 수연의 아버지 직업이 의사로 나온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지만, 정작 자기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아내가 지병이 있었다는 설정은 남편의 책임을 없애려는 장치에 불과하고, 아내 자살의 직접 동기는 남편의 불륜이다),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아무 일 없는 듯 새로운 여자 - 아내가 살았을 때 이미 불륜이었던 - 와 살아가는 이 남성의 내면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더구나, 아내가 살아 있을 때도 불륜 상대를 집으로 데려왔고, 아내를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했던 걸 보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워한 걸로 보인다.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식을 둘이나 낳고 가족을 이룬 건 남자가 욕망하는 '가족'의 모습이 아닌 걸로 보인다. 남자와 죽은 아내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데, 학력, 경력, 집안, 지식 등 소위 말하는 '소셜 레벨'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결합했다. 즉, 이 영화의 비극은 남자와 그의 아내가 - 정확히는 남자가 -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이다.
 
오리지널 '장화, 홍련'에서도 장화, 홍련의 아버지는 아내가 병으로 사망하자 오래지 않아 재혼한다. 영화와 고전에서 공통으로 '계모'의 존재 즉 '계모 설화'의 특징을 보이는데, 계모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전처의 자식들은 집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방해하는 존재이며,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는 직계 혈육이어서 반드시 없애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영화에서 수미는 계모 은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 은주는 수미, 수연의 친엄마가 자살하고, 그걸 발견한 수연이 장롱에 깔려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구하지 않는다. 이때의 기억이 수미에게 트라우마로 남고, 영화의 주제이자 핵심이 된다.
아버지의 존재가 무책임하고 방관자의 입장을 보여준다면, 계모는 가족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사건을 만들며, 가해자가 된다. 계모의 존재는 장화, 홍련, 수미, 수연에게는 그 자체로 이질적 존재이며, 적대적 관계다.
자식에게 친엄마가 사라지는건 아늑한 울타리가 사라진 정글에 있는 것과 같다. 아버지는 자식을 돌보는 것보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하고, 침입하는 적과 싸우느라 바깥으로 돌고 있어서, 자식들은 아버지가 있어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때 계모는 친엄마의 대역으로 가정을 장악한다. 아버지가 바깥으로 돌때, 계모는 울타리 안쪽의 세계를 장악하고, 사라졌지만, 연적인 아이들의 친모를 대신해 유사 친모의 권력을 휘두른다. 영화에서는 계모 은주에게 자식이 없지만, 오리지널에서 계모는 두 명의 사내 아이를 친자식으로 두고 있다. 계모에게 자식이 있을 때, 친모의 자식은 계모 자식의 경쟁자가 되는데, 친모의 자식이 딸이라면 제거할 명분은 더 뚜렷하다. 원작에서 계모가 장화를 살해한 건, 두 딸이 결혼하면서 가져갈 재산(분재)을 탐냈기 때문이다.
 
수미는 부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엄마의 죽음에 아버지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아버지의 불륜으로 자살한 엄마가 불쌍하고, 의도치 않았지만 엄마와 함께 죽은 동생 수연의 죽음까지도 수미는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엄마와 동생을 죽인 사람이 아버지와 계모라고 생각하되, 두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이 수미의 내면을 뒤흔들며, 견딜 수 없는 정신은 살아남기 위해 분열한다.
수미는 응징할 대상을 만든다. 수미의 내면은 슬픔, 괴로움, 분노, 절망,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건 가능하지 않다. 수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담아 계모 은주로 빙의한다. 은주와 수연을 오가는 수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의 혼란과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고, 현실 감각을 상실한다. 
은주의 남동생 내외가 집에 왔을 때, 그들이 보는 또한 관객이 보는 사람은 은주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건 수미의 시각에서 바라 본 장면이다. 수미는 은주로 빙의했고, 남동생 내외가 들으면 기분 나쁠 말만 골라서 한다. 결국 은주의 올케가 발작을 일으키고, 식사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은주의 올케가 쓰러지고, 주방 아래 공간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공포 영화의 실체를 드러낸다. 수미, 수연이 보는 환상, 환각, 귀신, 유령의 정체는 트라우마에서 오는 심리적 반응(공포)이지만, 영화에서는 실체하는 악령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수미의 엄마가 자살하고, 수연이 실수로 죽게 되는 과정에 악령의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미 가족이 사는 '집'은 이미 악령이 깃든 집이고, 수미의 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르거나, 수미의 엄마가 자살하는 것도 모두 악령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건 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외부의 힘에 의한 타율적이고 수동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은주의 올케가 본 귀신(악령)은 그녀가 가진 지병(천식)과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인물을 만나는 스트레스가 작용한 걸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집 곳곳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나타나거나 움직이고 있는 건 사실이다. 
 
수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집으로 돌아온다. 차에서 내리는 자매의 모습, 자매를 맞이하는 계모 은주의 모습은 평범해 보이지만, 이 첫 장면의 복선은 마지막에 반전으로 풀린다. 수미, 수연이 돌아온 집에는 네 명의 가족 - 수미, 수연, 아버지, 계모 은주 - 이 생활하는 걸로 보이지만, 역시 마지막 반전이 놀랍다.
공포(호러) 영화이면서 이렇게 슬픈 내용으로 절절하게 공감하도록 만들기 쉽지 않다. 거의 모든 공포 영화는 알레고리를 내재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좀비' 영화는 국가(정부)에 세뇌된 자의식 없는 인간 군상을 비판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시작했다.
같은 공포 영화라도 서양과 동양에서 공포의 성격과 내용은 다르다. 미국에서 만들어 세계적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한 공포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오멘' 같은 공포 영화는 오로지 악령의 저주와 인간의 대립을 큰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한국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 유령은 저마다 사연을 갖고,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염원을 과정을 다룬다. 
물론,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존재하며, 초자연적 현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그걸 '신' 또는 '귀신' 또는 '유령'이라고 부르지만)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한계로 발생하는 - 이건 인간의 진화 과정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뇌과학의 한 부분으로 본다 -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을 드라마틱한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건 다른 문제이긴 하다.
 
다른 공포 영화와 달리 이 작품은 수미가 겪은 고통과 슬픔을 '공포'라는 미장센으로 보여주고 있고, 공포가 무섭긴 해도, 그 근원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무서움보다는 수미에게 안쓰러움과 연민, 애달프고 슬픔 감정을 공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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