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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파워 오브 원

by 똥이아빠 201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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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원(1DISC) - 10점
존 아빌드슨 감독, 모건 프리먼 외 출연/워너브라더스


한 사람의 힘.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이런 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시절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과 시대일수록 한 사람의 힘이 갖는 의미는 각별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열 사람이 한 숟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별 것이 아니지만 그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하고, 민중의 힘이라고 한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87년의 그 뜨거운 태양을 무색하게 한 울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 행진을 떠올릴때마다 벅찬 가슴이 된다. 그 언덕을 넘어, 땅에서 이글거리며 올라오는 열기에 흔들리는 노동자들의 물결, 그것은 거대한 폭포보다도, 그 어떤 해일보다도 더 무서운 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나 선량하고 쓴 소주 한잔에 눈물을 흘릴줄아는 순박한 아저씨들이라는 것을.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할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노동열사 ‘전태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도 그렇다. 그를 역사에서 아주 작게 평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물결을 이루는 원천이 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박종철, 이한열, 임수경, 문익환, 문규현신부, 권인숙씨, 그리고 또 많은 한 사람, 한 사람들. 
 정작 영화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내 존재도 잠시 잊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The Power of One]은 어느 백인 소년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그리 흔하지 않은, 흑백갈등과 인종차별,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이야기이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흑백분리주의 - 아파르트헤이트 - 를 실시하기 18년 전인 1930년, 남아프리카의 한 영국인 농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꼬마의 이름은 PK, 그러나 본 이름은 피터 필립 케네스이다. 피터가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독일인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그 기숙학교에서 피터는 온갖 모욕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프게 되고 잠시 집에 돌아와 있을 때, 흑인 유모는 어린 도련님을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굿을 흑인 무당에게 맡긴다. 흑인 무당은 어린 피터를 위해 토속적인 제사로 줄루족 용사의 투혼과 용기를 피터에게 불어넣어준다. 피터는 이 용기를 가지고 다시 기숙학교로 돌아가지만 곧이어 세계제 2차 대전이 발생한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온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이곳 머나먼 아프리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식 기숙학교에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피터는 독일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위험에 처하나 선생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어머니마져 돌아가신 뒤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할아버지에게 간 피터. 그곳에서 그는 스승 ‘닥’을 만난다. 닥은 독일인으로 피아니스트였으며 선인장을 기르는 선량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피터는 그곳에서 부모를 잃은 슬픔을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묻은 발톱은 이곳까지 찾아와 독일인 선생 닥을 영국인들이 가두어 놓게되자 피터는 선생을 따라 감옥을 드나든다. 형무소 소장은 닥이 비록 독일인이지만 선량하고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해 많은 편리를 제공한다. 꼬마 피터는 자유롭게 형무소를 드나들며 선인장도 키우고 음악도 배운다. 스승 닥은 피터를 위해 복싱을 가르친다. 피터의 복싱 스승은 도둑질을 한 죄로 40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는 흑인(이름이 생각안나네요.)이었다. 그는 간수에게 온갖 박해와 협박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동족 흑인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존경받는 흑인이었다. 
 피터는 어려서부터 흑인유모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그의 부모들도 흑인들을 노예처럼 다루지 않았고 존중해주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모두 평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피터가 자라면서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백인들은 흑인을 인간취급도 안하고 마구 대했으며 짐승보다 못하게 학대했다. 
 어린 피터의 눈에도 이런 불평등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갔다. 형무소 안에서 복싱을 배운 피터는 흑인들을 위해 편지도 써주고 친절하게 말도 하며 조금도 그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흑인들은 어린 피터에게 ‘레인메이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이 ‘레인메이커’는 흑인 부족들 사이에 오래된 전설인데, 그들을 이끌어줄 지도자와 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피터는 흑인들이 자신을 레인메이커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과 부담을 느끼지만 흑인들은 피터를 믿고 따른다. 
 어느날 형무소에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형무소장은 닥에게 음악회를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피터의 복싱스승인 흑인이 자신들, 흑인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닥과 피터는 그들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이 음악은 흑인들 모든 부족을 단결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가사는 피터의 복싱스승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가사는 간수들을 빗대어 ‘이랬다 저랬다 겁장이 바보들’이라는 것이었다. 
 음악회날, 흑인들이 모이고 닥과 피터는 높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훌륭하게 음악회를 갖는다. 흑인들의 합창과 춤이 그들을 단결시키고 밝은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피터의 복싱스승은 그를 노리고 있던 간수에게 걸려 맞아 죽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피터. 그는 교내 복싱 챔피언이 되고 학장에게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국비장학생이 되도록 추천을 받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복싱장에서 본 아름다운 소녀 마리아에게 반한 피터는 그가 극우파의 지도자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 하고, 그녀 또한 영국인이고 고아인 피터를 좋아한다. 피터는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기 위해 마을에 있는 전문 체육관을 찾아가서 테스트를 받고 도장에 다닌다. 그 체육관 관장을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이었고 그 체육관에는 흑인들도 함께 운동을 했다. 하지만 당국의 인종차별정책은 더욱 심해지고 흑인들은 도시 변두리의 빈민가에서 아무런 혜택도 못받은 채 소외 당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된 피터는 친구들과 흑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을 하는데, 이를 알고 있는 당국에서는 철저하게 방해한다. 이런 소동 속에서 피터가 좋아하던 마리아가 경찰에 맞아죽고 체육관은 경찰들에 의해 불에 타고 만다. 모든 것이 피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던 중, 마침내 옥스퍼드 대학 입학허가서가 나오고 그는 떠나기 전에 흑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흑인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흑인 친구들의 말과 자신의 생각을 정하고 옥스퍼드 대학을 포기한다. 그럴때 경찰의 습격을 받는다. 흑인 마을이 불타고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하며 흑인들을 학살한다. 그 가운데서 피터를 붙잡으려는 집요한 추격이 시작되고 흑인들은 피터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다. 마침내 마을을 벗어나 흑인 친구와 어디론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검붉은 실루엣으로 사라진다. 
 영화의 줄거리를 얘기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줄거리를 쓰고 말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리차드 라이트의 소설 [막다른 골목(원제:검둥이 소년)]이 생각났다. 소재는 다르지만 흑인이 등장하고 억압 당하고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주제는 같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실이 어째서 문명사회라고 하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왜곡되고 무시 당하고 모욕 당하고 파괴 당하는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자칫, 자칫이 아니라 매우 가능성이 많은 이야기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라스꼴리니꼬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나 유대의 선민의식처럼 자신들만 잘나고 우월하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이 바로 인종차별과 같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 - 아주 잔인하고 비열한 코미디 -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살바도르]나 [니콰라과의 영웅들], [플래툰], [하얀전쟁], [JFK], [미싱(실종)], [미션], [뮤직박스],[Z]와 같이 인간의 역사적 범죄행위를 담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있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간단하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파괴자들은 바로 인간을, 민중을, 도구로 생각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간단하게 처치해버릴 수있는 소모품.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바로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력. 권력을 장악하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바로 짐승의 논리이지 사람의 논리는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리석다는데 있다. 즉, 정신적 사고방식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문명을 발달시키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한편 동물적 본능을 내세우고 동족을 학살하며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한다. 야누스니, 프랑켄쉬타인이니, 지킬박사와 하이드, 늑대인간이니 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중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중성이 곧바로 동족을 학살하거나 인종을 차별하거나 인간 그 자체를 도구화하는 논리는 궤변이며 학살자의 자랑일 뿐이다. 
 민족과 인종 사이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은 없어야 한다. 서양의 문명이 발달한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미개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열등한 민족은 결코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흑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굴종을 겪으며 그래도 낙천적이고 착한 마음을 가진 그들을 보면서, 인간은 잘나고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고도 악한 것보다는 아무 것도 가진 것없고, 배운 것없고, 어리석어도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정있는 사람들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배웠다. 
 문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히틀러의 망령을 믿는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외국인을 학살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박해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잔인하게 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인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한 사람의 힘이 세계를 변화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간의 싸움은 역사를 거스르는 소수의 반역자들과 그들을 이겨내고 역사를 밀고가는 다수의 민중들 사이에 있으며 남아프리카와 같이, 남미의 제3세계 국과들과 같이, 아시아의 독재국가들과 같이 억압받는 민중들이 많은 곳에서는 바로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워 오브 원
감독 존 G. 에이빌드슨 (1992 /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미국)
출연 스티븐 도프,존 길거드,모건 프리먼,가이 윗처,사이먼 펜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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