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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안티 크라이스트

by 똥이아빠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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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작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은 서사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서사에 내재되어 있는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보는 이유인데,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서사보다는 알레고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1) 아기의 죽음, 2) 에덴의 숲, 3) 아내가 연구하던 주제인 중세의 마녀, 4) 남편을 폭행하는 아내, 5) 사슴, 여우, 까마귀의 등장, 6) 클리토리스, 7)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 8) 산딸기 같은 키워드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논란이 되는 장면은 아내가 스스로 자기의 클리토리스를 가위로 자르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 부부의 정사 장면이 많은 것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인트로에서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과 격렬한 정사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섹스의 욕망과 절정의 오르가즘이 자식의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암시하고, 이 사건이 결국 뒤로 가면서 부부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징벌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결국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고 스스로 가위로 자기 혀를 자른다. 말로 지은 업보를 해결하려고 말을 하는 '혀'를 자르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행위다. 육체적 욕망에 탐닉해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자기의 성기를 자르는 아내의 행위도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아이가 추락해 죽고, 여자는 비탄에 빠지는데, 반면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 담담해 보인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심리치료를 하는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다독이고, 심리 치료를 맡는다. 원래 아주 가까운 가족에게는 심리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그걸 어기면서까지 남편이 아내의 심리 치료를 하는 것은, 적어도 남편은 아내에게 심리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한 어린 생명이 '물리적'으로 생명활동을 멈춘 것이지만, '아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면 뒤에 나타나는 엄마이자 아내였던 여자의 비탄과 이상 행동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즉, 융이 말하는 것처럼, '아기'를 원형적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작품에서 '에덴의 숲'이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의 형식은 아이를 잃은 부부의 비탄, 고통, 절망에 관한 이야기지만, 원형의 서사로 보면, 신이 창조한 인간의 태초에 아담과 이브는 신으로부터 원죄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이 누리던 '낙원' 즉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다시는 과거의 아름다운 땅(시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천형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특히 아이의 엄마이자 여성이 더욱 큰 비탄과 고통, 절망에 빠지게 되는가를 묻게 되는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바라보는 '여성관'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이 남성보다 감성, 감정이 더 풍부하다는 일반론과 함께,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는 당사자이고, 아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일체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여성, 어머니는 자기가 임신해서 출산한 아이 - 자기의 삶터인 낙원 - 에 대해 더 깊은 애착을 갖게 되고, 정서적으로 일체화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이걸 '모성애'라고 부르지만, 원형의 서사에서는 분리되지 않은 '낙원'을 상징한다. '모성'은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모성애'는 낙원까지를 포함한 '자연'이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낙원'이 타락하는 - 아이는 위에서 아래로 추락한다 - 걸 보면서 비탄에 빠지는 것이다.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아내는, 깊은 슬픔, 불안한 정서, 심리적 고통 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 어두운 에너지를 육체적 욕망으로 전이한다. 남편에게 수시로 섹스를 요구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오히려 아내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 아내가 논문을 쓰려고 갔었던 '에덴의 숲'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사방이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에 도착한 남자는 숲속에서 사산한 새끼를 매달고 다니는 사슴을 만난다. 사슴은 '고통'이다. 새끼는 죽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어미는 새끼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 즉,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믿음이 바로 '고통'인 것이다. 남자는 눈앞에서 '고통'의 실체를 보면서도 그것이 고통인 줄 모른다. 아이가 죽었고, 낙원은 사라졌으며,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낙원을 잊지 못하고, 낙원에 연연하는 남자와 여자의 집착이 바로 '고통'인 것이다.

남자는 숲속에서 아내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의 실험을 하면서, 아내가 심리적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아내는 조울증을 앓는 사람처럼 밝은 모습을 보였다가 갑자기 우울해지는 모습을 반복한다. 아내는 숲에서 죽어야 하는 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자연이 사탄의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다 숲으로 달려가는 아내를 쫓던 남자는 죽은 여우를 발견한다. 남자가 여우를 만지려 하자, 여우는 갑자기 살아나 남자를 바라보며 '혼돈이 지배하리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여우는 '절망'을 상징한다. 남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아내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고, 그럴 희망도 없어보인다.

 

비가 내리는 날, 아내가 잠들어 있을 때, 남자는 2층으로 올라가 아내가 쓰던 논문 자료를 살펴본다. 중세 마녀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던 아내여서 그곳에는 마녀사냥과 관련한 참혹한 이미지들이 많았다. 중세의 마녀는 대부분 돈 많은 과부들이었고, 이들은 마녀로 몰려 화형, 수형, 거열형 등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과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은 모두 가톨릭 교회로 귀속되었다.

남자는 비옷을 챙겨 입다가 주머니에서 죽은 아이의 부검결과서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벽난로 옆에 두는데, 다음 날, 아내도 그 부검결과서를 보고는 기억에서 사라졌던 순간을 떠올린다. 아이가 눈 내리는 날 창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서도 육체의 쾌락에 집착했던 여자는, 그것이 단지 육체의 쾌락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부검결과서에 나온 것처럼, 아이는 한쪽 발이 미세하게 기형이었고, 논문을 쓰겠다고 '에덴의 숲'으로 아이와 둘이만 온 것도 실제로는 이 숲에서 아이를 죽이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모른 척 한 것 역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자연)는 낙원이 타락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낙원'을 타락시켰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우는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여자'라고 스스로 남자에게 말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남자도 깨닫게 되자, 여자는 남자의 급소를 둔기로 때려 기절시키고, 드릴로 남자의 다리에 구멍을 뚫은 다음 맷돌을 매단다. 왜 맷돌일까. 맷돌은 곡식 - 서양에서는 밀 -을 갈아서 음식(빵)을 만들어 먹는 도구다. 자연(신)은 타락한 낙원에서 쫓겨난 남자에게 농사와 노동의 의무를 지운다. 다리에 맷돌을 매다는 건, 남자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평생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상징이다.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만, 한쪽 다리에 맷돌이 매달려 있고, 미쳐버린 아내를 피해 집 근처 여우굴로 들어간다. 그 여우굴 안에는 까마귀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까마귀는 '비탄'이다. 남자는 낙원에서 쫓겨났고, 분노한 여자에게 쫓겨났고, 평생 땀흘려 노동해야 하는 벌을 받았다. 이렇게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 그는 몸부림치고, 비탄을 극복하려고 - 까마귀를 죽이려고 -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까마귀는 더욱 큰소리로 울고, 여자는 남자를 찾아내 다시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나를 죽이고 싶었냐'고 묻지만, 여자는 '아직 세 명의 거지가 오지 않았고, 세 명의 거지가 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는 다시 조울증으로 흐느끼면서 벌거벗고 남자와 섹스를 한다. 그리고 절정에 이를즈음, 아이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막지 않았던 걸 떠올리고, 가위로 자기의 성기(클리토리스)를 자른다.

남자는 힘겹게 다리에 묶인 맷돌을 빼내고,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그리고 아내의 사체를 불에 태우고, 산장을 빠져나오며 산딸기를 따 먹는다. 산딸기는 '사과'와는 반대로, 그가 '원죄'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때 세 명의 거지(사슴, 여우, 까마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숲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에덴의 숲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본다.

 

아이의 죽음 즉 낙원의 타락을 여성에게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것이 감독의 의지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기독교 성경에서 가져온 선악의 원형과 여성(모성)의 근원적 힘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아이의 죽음(낙원의 타락)을 여성(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남성은 여성과는 달리 '신'의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남성은 여성(신)처럼 창조의 능력 - 출산 -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낙원을 타락시킬 능력도 없다. 남성은 여성을 돕는 존재이며, 신의 창조와 파괴에 간섭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성이 여성(신)을 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신의 존재가 인간(인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는 남자의 운명을 노래한다. 이 음악은 헨델이 작곡한 오페라 '리날도'의 2막에 나오는데, 적군의 여왕 아르미다에게 사로 잡힌 알미레나가 자유를 염원하며 부르는 아리아로 가사는 이렇다.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이여, 나의 잃어버린 자유에 난 한탄하네, 이 비애가 내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해주소서

남자는 신에게 얽매여 있었고, 낙원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신과 에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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