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5월. 출판사 가족들과 야유회를 갔다.
출판사의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열심히, 최선을 다 했다. 일기를 쓰고 있어서 당시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1991년 2월 19일 화요일
업무라고 할 것도 없는 나날이다. 긴장감이 없는 상태인데,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아침에 여민사와 학원에 들러 귀찮은(?) 일을 끝냈다. 책을 부담없이 만들어 낼 날이 언제쯤일까. 제작비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광고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동안 내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해왔는데,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를 믿고 맡긴 형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투자한 돈도 상당한데, 내가 마치 실습비로 쓴 것같아서 더욱 미안하다. 이제는 조금 감각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어렵다. 일단 투자되는 돈도 돈이려니와 기획이나 편집이 아직도 멀었다. 영업을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언제쯤 이런 모든 일들이 잘 풀리겠지. 열심히 해보자.
사무실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1991년 4월 28일 일요일 사무실이 이사를 하느냐고 정신이 없다. 종로에서 잠실로 이사를 하면 출근하기는 조금 나아질 것이다. 요즘 뭔가 속이 빈 듯이 살아가는 것같다.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일을 만들지도 않는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 데 어떤 구체적인 것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인가. 원인은 한 가지. 나의 게으름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도 부지런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고 특히나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할려면 더욱 많은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지껏 한 가지 일에만도 지치고 힘들어서 허덕거렸다. 언제나 지나고 나서의 후회와 분석. 안되는 일을 가지고 분석이나 하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나는 일이 안되는 원인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을 추진하려는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이 부족한 것이다. 지금이 어쩌면 나에게 가장 좋은 시기인지 모른다.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다시한번 실천을 촉구한다. 1991년 5월 12일 일요일 일기를 쓴 지도 꽤 오래된 것같다. 지나가는 나날들이 모두 출판사를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지금이다. 많은 것들을 하고 있는 것같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나에게 무슨 의미로 남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는 소멸성 이야기들, 고목에 피는 잎처럼 그 뿌리와 가지만이 남을 뿐, 무수한 가지들은 사라져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 잎새들이 바로 나무가 있음을 증명하고 아름답게 하지않는가. 그러나 나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 데에 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급박하고 중요한 시기인가. 그럼에도 나는 냉소와 방관으로 다만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냉소주의. 나에게 결여된 것은 역사의식이 아니라 ‘열정’이다. 이 열정은 정치적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에도 적용되고 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가 없다. 막대한 책임감과 부담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내가 다만 월급을 받는 직원의 입장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주인’임을 뜻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 성향이 조직과 집단의 규율과 의무를 얼마나 다할지는 자신이 없다. 내가 하고싶은 개인적인 작업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미련을 가지고 있는 한, 내 정신적인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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