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차
넷플릭스. 첩보 액션 영화라면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다. 두 영화에서 공통점은 '국정원', '남한 첩보원', '북한 첩보원'이 등장한다는 것이고, 이들이 움직이는 도시는 '베를린'과 '중국'이다. '야차'에서는 일본 첩보원이 등장하는 대신 미국 정보부(CIA)는 등장하지 않고, '베를린'에서는 그 반대다.
두 영화 모두 '첩보 액션'인데, '베를린'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야차'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제작비나 연출의 문제를 말할 수도 있고, 시나리오의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다. 핵심은 리얼리티의 핍진성, 리얼리티의 완결성이다. 온갖 더러운 일을 맡아 해결하는 '블랙팀'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 과거 미국 CIA에서 다른 나라 정치에 개입할 때, 미국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수법을 썼고, 최근 영화로 '시카리오'도 그런 블랙팀의 존재를 다룬 내용이다. 그러니 한국 정보국에도 '블랙팀'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가능하고,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도 나올만 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가 중요하다.
'베를린'에서는 '블랙팀'이 아니라 정규 정보원들이 활동한다. 이들은 도청, 감청을 통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무기 밀매,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추적 같은 구체적 사건을 쫓아간다. 두 영화에서 '액션'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첩보 액션' 영화에서 '첩보'와 '액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어느 쪽에 있는가를 알면, 판단하기 쉽다.
'야차'가 '베를린'보다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보이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주인공인 지훈이 검사라는 것,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기업 회장의 범죄를 추적한다는 점이 비현실적이고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재벌과 언론을 등에 없고 스스로 정치권력이 된 검사들이 마침내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정의로운 검사'라는 설정은 이 영화가 리얼리즘에 바탕한 영화가 아니라 '환타지'라는 걸 보여준다.
야차 지강인은 북한, 일본을 상대로 첩보전을 벌이는데, 주로 비합법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래서 '블랙팀'이지만, 이들은 늘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건 지강인이 죽은 부하 가족에게 충분한 위자료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럼에도 '야차'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액션'을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액션의 리얼리티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지 못하고, 주인공들이 죽을 위기에 놓인 경우, 액션은 작위적으로 바뀐다. 반면 '베를린'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액션은 보여주기가 아닌, '실제 액션'에 가까운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몸과 몸이 부딪치고, 총알이 날아다니거나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아주 찰라의 순간에 연출의 작위성은 리얼리티를 훼손한다. '베를린'에서는 그런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관객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정도로 끝나지만, '야차'에서는 이런 작위적 장면이 자주 눈에 띄면서 영화에 몰입하는 걸 방해한다.
'야차'에서 지훈은 이방인이다. 그는 중앙정보국에서 파견한 감찰 감사여서 '블랙팀'과는 적대적 관계를 이룬다. '베를린'에서도 이방인이 있는데, 청와대에서 파견한 조사관(곽도원)이 그 역할을 한다. 청와대 파견인이 주로 걱정하는 건 첩보전이 노출되면서 여러 나라와 외교 분쟁이 생기는 것인데, '야차'에서는 '블랙팀' 내부의 부정을 감찰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현직 검사가 정보국의 요청을 받아 외국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블랙팀'을 감찰한다는 설정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쉽게 노출되는 팀을 '블랙팀'이라고 하는 건 좀 우스워보인다. 지훈은 강인에게 자료를 달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쉽게 일을 할 수 있는 거라면 한국에서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이방인, 외부인인 지훈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가 검사로 있을 때도, 중앙정보국의 파견 검사로 일할 때도 들어본 적 없는 상황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쫓아가는 '블랙팀'의 활동은 당연히 이해하기 어렵다.
'시카리오'에서 FBI 요원 케이트가 미국 '블랙팀'으로 들어가면서, 미국-멕시코 국경을 사이로 상상할 수 없는 마약전쟁을 보면서 받는 충격을 보자. 매우 훈련된 케이트도 멕시코 마약집단이 벌이는 범죄를 보면서 심하게 충격받는데, 지훈은 평범한 검사로 일하던,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블랙팀'의 테스트를 무난히 통과한다. 즉, 지훈이 평범한 남성이 아니라면, 그 전에 지훈의 캐릭터 특징을 미리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런 장면 없이 지훈이 격투도 잘 하고, 사격도 잘 하고,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도 무난히 해내는 '블랙팀'의 요원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은 '대한민국 검사는 수퍼맨이구나'라고 생각하라는 걸까.
외부인의 역할은 지켜보는 것이다. 그들이 섣불리 상황에 개입하는 순간 일은 꼬이게 되어 있다. 지훈이 문병욱의 딸을 구출하면서 쉽게 끝낼 수 있었던 작전은 엉망진창이 된다. 오죽하면 '블랙팀' 내부에서 지훈을 없애버리자는 말이 나왔을까. 그건 지훈만이 아니라, 이미 이전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외부자가 간섭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고, '블랙팀' 팀원이 죽는 일이 발생하면 작전은 실패한다. 블랙팀원은 오랜 경험과 팀워크를 거쳐 탄생하므로, 한 명의 팀원이 죽으면 그 팀은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지훈은 영문도 모른 채 작전에 개입하고, 간섭한다.
지훈은 맡은 일에서 성과를 내고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길 원하기 때문에 절박한 마음이 있었고, 중국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 줄 몰랐을 것이다. 강인과 팀원들이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중국에서 돌아가는 첩보전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지훈은 외부인에서 '팀원'으로 결합한다.
'시카리오'에서 케이트는 끝까지 외부인으로 남는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블랙팀'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블랙팀'에서도 케이트가 쓰고 버리는 도구일 뿐, '블랙팀'의 팀원으로 활동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전제했다.
지훈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를 중국으로 보낸 중앙정보국의 책임자가 일본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북한의 외교관이 일본의 정보국에 매수되어 이중간첩이 되고, 그가 가진 간첩 리스트가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 서버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문병욱의 딸이어서 그가 서버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억지스럽다.
당장, 상파울루 대학 서버의 관리자는 그 정보를 모를까. 몇 개의 서버를 거쳐야 한다지만, 그것도 비현실적이다. '야차'는 한국 '블랙팀'의 활약을 그린 첩보 액션 영화라기 보다는, '야차'라는 별명을 가진 '블랙팀' 팀장 지강인의 카리스마에 더 초점을 맞췄다. 강인의 태도는 하드보일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냉정한 인물의 전형이다. 그가 왜 그렇게 차가운 인물인지, 그가 쏟아지는 총알 속을 천천히 걸어갈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관객은 전혀 알지 못한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로저 '버벌' 킨트는 전설의 인물 '카이저 소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가 그렇게 공포와 악마의 현현같은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 자기 자식과 아내를 죽이고, 적대 조직의 모든 조직원과 그 가족을 살해했기 때문인데, 이후 '카이저 소제'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공포의 존재로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야차'인 강인이 왜 '야차'인지, 그가 과거에 어떤 일에 휘말렸으며, 무엇이 그를 '야차'가 되게 했는지 관객을 설득할 만한 장면이 없어 몰입을 방해한다. 강인의 과거와 관련 없이 그가 본성이 냉혹한 인간이라면, 그건 그대로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의외로 강인은 인정도 많고, 합리적 인물이다. 팀원들이 그를 목숨을 내놓고 믿고 따를 정도라면, 그에게는 단지 냉혹함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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