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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저수지의 개들 또는 창고의 개들

by 똥이아빠 2022. 4. 18.
저수지의 개들 또는 창고의 개들
 
서너 번 봤다. 볼 때마다 새롭다. 영화나 음악은 어떤 환경에서 보고 듣는가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르다. 영화는 관객(나)의 감정 상태와 물리적 환경에 따라, 음악도 그렇지만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두 장르 모두 극장과 공연장에서 보고 듣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영화도 소리의 영향이 가장 크다. 과거 무성영화 시기에 자막과 음악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변사가 배우의 대사를 대신 읊어주었다. 영화 그 자체는 움직이는 그림이고, 여기에 대사, 효과음, 배경음 등을 넣어야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 뻔한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로 구입한 헤드폰으로 들으며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래 되었지만 외장형 사운드카드를 통해 '헤드폰 앰프'를 거쳐 나온 소리를 들으니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가 영화에서 들렸다.
가장 신선하게 느낀 건 역시 음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에 쓰이는 음악을 자신이 직접 고르는데, 이 영화는 그의 데뷔작이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서 영화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미국 음악이 나올 때는 그가 영화 뿐아니라 음악에서도 얼마나 해박한 지식을 가졌는지 알게 된다. 특히 극중에서 음악을 소개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디제이(DJ)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음성인 것을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새삼 느꼈다. 
 
이 영화는 홍콩영화 '용호풍운'을 오마주했다. '용호풍운'은 홍콩영화가 한창 잘 나가던 때인 1987년에 개봉했는데, 이 영화는 나중에 '무간도'와 '신세계' 같은 경찰이 조폭 집단에 잠입해 활동하는 느와르 영화에 영향을 준다. '용호풍운'의 주인공도 홍콩 최고 배우인 주윤발과 이수현이다. 이들은 2년 뒤에 홍콩영화의 전설로 남은 영화 '첩혈쌍웅'에도 함께 출연한다.
'저수지의 개들' 인트로에서 조가 수첩을 보면서 '토니웡'이라고 몇 번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토니웡'은 '첩혈쌍웅'에 나오는 인물로 그룹의 총재다. 이런 깨알같은 장면에서도 쿠엔틴은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했다.
'저수지의 개들'이 '용호풍운'을 오마주한 건 맞지만, '표절'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다. 경찰이 범죄조직 내부로 잠입해 비밀수사를 하는 상황, 보석상을 터는 상황, 창고에 모여서 세 명이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 등이 비슷할 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쿠엔틴이 영화 제목을 지을 때,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이라고 했는데, 쿠엔틴이 감독이 되기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할 때, 한 손님에게 영화 '굿바이 칠드런(Au revoir les enfants)'을 추천했는데, 그 손님이 제목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고 '창고(Reservoir)' 영화는 볼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쿠엔틴은 그 단어가 퍽 인상 깊게 남아서, 영화를 만들면 반드시 '창고(Reservoir)'라는 단어를 쓴 제목을 붙이겠다고 마음 먹었고, 데뷔작에 'Reservoir'를 붙였다. 여기서 '저수지'라는 단어와 '창고'라는 단어가 같은 창고'Reservoir'여서, 최초 번역이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쿠엔틴의 의도는 '용호풍운'에서처럼 '창고'에 모인 '개들'을 상징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영화 인트로에서 레스토랑에 모여 밥을 먹고 잡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쿠엔틴(미스터 브라운)이 마돈나의 노래 'Like a Virgin'에 관한 해석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수위 높은 음담패설인데, 쿠엔틴의 수다스러움과 테이블에 앉은 일곱 명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가벼운 농담처럼 들린다.
레스토랑 인트로는 길지 않지만,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스터 브라운의 음담패설도 있지만, 그보다 조 캐벗이 음식값을 치르고, 팁은 각자 1달러씩 내라고 했을 때, 이들 가운데 미스터 핑크는 팁을 내지 않겠다고 반발한다. 웨이트리스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했으며, 무조건 팁을 주는 건 옳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반면 다른 여섯 명(이때 조 캐벗은 음식값을 계산하러 카운터로 간 상태)은 무조건 팁을 주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진 여성이 당장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웨이트리스이며, 그들은 매우 적은 임금을 받고, 팁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으니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팁은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범죄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는 건 신선하다. 이들이 범죄자이면서도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누가 사회적 약자인지를 구분하고 있고, 그럼에도 미스터 핑크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덟 명 가운데 두 사람, 조 캐벗과 그의 아들 에디는 정장을 입지 않고, 여섯 명의 사내는 모두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마치 장례식에 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은 검은색 선글래스를 쓰고 있다. 이쯤되면 이들이 평범한 남자들로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리얼리티는 떨어지지만 스타일은 살리는 클리셰를 선택했다고 본다.
레스토랑 인트로가 끝나고 곧바로 총에 맞아 헐떡이는 미스터 오렌지가 보이고, 그를 부축하는 미스터 화이트가 창고로 그를 끌고 들어온다. 직전까지 레스토랑에서 한가하게 농담을 떠들던 장면에서 곧바로 피투성이가 된 인물의 등장은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그리고 이들이 나눈 대화에서 이미 미스터 브라운과 미스터 블루는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즉 두 사람은 레스토랑 인트로에만 등장한다. 등장인물을 줄인 건 저예산의 한계와 이야기를 보다 핍진하게 풀어가려는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이 영화는 거리 장면이 매우 적고, 거의 모두 창고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이어서, 영화지만 연극의 무대와 거의 같다. 즉, 큰 변화 없이 연극으로 만들 수 있는데, 실제 쿠엔틴은 이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연극으로 만들고, 등장인물은 모두 흑인으로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레스토랑 인트로에도 웨이트리스가 한번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고, 딱 한 번, 여성이 등장하는데, 미스터 오렌지가 탈출하는 장면에서, 거리를 뛰던 미스터 오렌지와 미스터 화이트가 달려오는 차에 총을 겨누고 차를 뺐는데, 그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었다. 이 여성이 미스터 오렌지를 총으로 쐈고, 미스터 오렌지도 반사적으로 총을 쏜다. 

 

첫 장면에서 피투성이가 된 미스터 오렌지의 상황이 여기서 시작한 것으로, 이때 관객은 모르는 상태지만 미스터 오렌지가 잠입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관객은 충격을 느낀다. 경찰이 범인을 잡으려고 범죄자 행세를 하다 시민의 총에 맞고, 시민을 사살하는 상황은 어떻게도 풀 수 없는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오렌지가 맞닥뜨리는 딜레마는 더 있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미스터 화이트가 경찰차를 향해 총을 난사하고, 두 명의 경찰이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스터 블론드가 탈출하면서 경찰 한 명을 납치해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오는데, 이 경찰을 창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다음 미스터 블론드, 미스터 핑크, 미스터 화이트가 구타하는 장면을 미스터 오렌지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상태다.
나중에 미스터 블론디 혼자 창고에 남아 경찰을 고문하고 기름을 끼얹어 불태워 죽이려 하자 참지 못한 미스터 오렌지가 미스터 블론디를 사살한다. 납치당한 경찰은 미스터 오렌지가 잠입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고문당하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미스터 화이트는 이 작전을 설계하고 사람을 모은 조 캐벗과 친한 인물인데, 마지막 장면에서 미스터 오렌지를 옹호하며 조 캐벗과 대립한다. 두 사람이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조 캐벗은 미스터 오렌지를 경찰 끄나풀이라고 주장하고, 미스터 화이트는 미스터 오렌지가 결코 경찰 끄나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조 캐벗은 자기의 직감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조의 아들 에디는 창고에서 죽은 미스터 블론디와 매우 친한 관계이고, 이제 막 감옥에서 4년을 보내고 나온 미스터 블론디가 조 캐벗을 위해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것을 높게 평가했는데, 미스터 오렌지의 말에 따르면 조 캐벗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창고에 오면 모두 죽이고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망가겠다고 말한 것은 비논리적이며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에디의 말을 들으면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미스터 화이트는 미스터 오렌지를 옹호한다. 그건 미스터 화이트가 미스터 오렌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행동하면서 느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립은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 세계관이 충돌하는 장면이다. 같은 범죄자이고, 서로 오래 알아왔지만 결정적 순간에 두 사람(조 캐벗과 미스터 화이트)은 불화한다. 범죄자의 세계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무하고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스터 핑크가 보석 가방을 챙겨 창고 밖으로 빠져나가고, 부상을 당한 미스터 오렌지와 미스터 화이트가 피투성이가 된 채 서로 끌어당기는데, 미스터 오렌지가 자기를 믿고 지켜준 미스터 화이트에게, '내가 경찰이에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창고 바깥 장면이 들린다. 경찰차 싸이렌 소리와 총소리, 미스터 핑크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매우 작은 소리여서 주의해서 들어야만 들린다. 이번에 구입한 헤드폰으로 들으니 예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서 신기했다.
결국 미스터 핑크도 체포당하거나 사살당하는 것으로 나오고, 창고 안에 있던 미스터 오렌지도 미스터 화이트의 총에 죽고, 창고로 들이닥친 경찰의 총에 미스터 화이트가 사살당하면서 이들의 작전은 실패한다.
 
레스토랑 인트로는 쿠엔틴의 데뷔작이라는 점, 여덟 명이 모두 모인 유일한 장면이라는 점, 이 장면이 영화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등장 인물의 관계와 사건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장면이고, 새롭고 신선한 연출이다.
잠입 경찰인 미스터 오렌지를 제외하고, 일곱 명의 악당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렀다는 점에서 영화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비켜서 있다. 즉, 등장인물이 죽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안쓰러움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관통하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범죄자 또는 범죄를 다룬 작품이 많고, 그들 대부분은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나쁜 짓을 저지른 놈은 죽어도 싸다는 게 쿠엔틴의 작품 철학이다. '데스 프루프'에서 여성만 골라 자동차 사고로 살해하는 마이크를 스턴트 연기를 하는 여성들이 때려죽이고, '비스터즈:거친 녀석들'은 미군이 독일군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내용이다. '장고:분노의 추적자'도 현상금 사냥꾼 슐츠와 장고가 힘을 합해 노예로 끌려간 장고의 아내 브룸힐다를 구출하는 내용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도 찰스 맨슨 일당에게 살해당한 로만 폴란스키를 추모하며 영화로 대신 복수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쿠엔틴의 영화에서는 도덕적 딜레마 없이 마음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관객은 폭력 장면에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나쁜 짓을 한 놈은 죽어도 싸다는 보편의 상식과 감정에 충실한 영화들이라 영화를 보는 동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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