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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더 하우스

by 똥이아빠 2022. 2. 8.
더 하우스
  • 의식과 자아의 분열과 파괴의 내면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고딕, 호러 영화를 계승하면서,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다. 스톱모션 방식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윌러스와 그로밋'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도 있지만, 팀 버튼의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기이한 세계를 다룬 작품들도 여럿 있다. 팀 버튼 이전에 이미 '퀘이 형제'의 작품들은 작품성에 있어 높은 차원의 수준을 보였고, 팀 버튼은 오히려 대중성에 성공한 경우다. '퀘이 형제', '팀 버튼'과 함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각광받는 '라이카 스튜디오'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팀 버튼과 라이카 스튜디오는 협업으로 '유령 신부'를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 '더 하우스'는 '퀘이 형제'와 '팀 버튼', '라이카 스튜디오'의 세계관을 가져오면서 보다 세련한 스톱모션 기법과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 작품은 '집'이라는 주제로 묶여 있는 연작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집'이라는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는 같다.
'더 하우스'는 각각 작품이 보여주는 서사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 강한 알레고리를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알레고리는 프로이트로 시작하는 정신분석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분열하는 자아와 의식의 파탄 또는 해방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각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1. 거짓의 속삭임
몰락한 집안의 가장인 레이몬드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친척들이 방문해 레이몬드가 살고 있는 집을 보며 비웃는다. 한때 성처럼 큰 집에서 살았던 레이몬드의 몰락을 비웃고, 형편 없이 살아가는 레이몬드를 질책한 것이다.
레이몬드는 친척들이 떠나자 술을 마시고 밤길을 걷다 건축가이자 부자인 반 슌비크를 만난다. 그리고 다음 날, 반 슌비크의 비서가 레이몬드 가족을 찾아와 '대저택'을 지어주겠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평안히 사시면 된다'고 계약서를 내민다.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순간, 레이몬드의 가족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이끌린다.
'대저택'이 완성되고, 레이몬드 가족은 그곳에서 귀족처럼 살지만, 집은 어딘가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숨어서 공사하고 있고, 레이몬드와 그의 아내도 점차 이상하게 변한다. 딸 메이블과 이소벨은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집이 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부모들도 점차 기괴하게 변해가는 걸 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의자와 커튼으로 변한 부모가 벽난로에서 튀어나온 불길에 타들어가는 걸 보면서 메이블과 이소벨은 탈출한다.
 
레이몬드는 친척들의 비난에 자존심이 상하고,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지어진 집은 당연히 레이몬드의 상상이며, 레이몬드는 자기 의식 속에 갇혀 서서히 죽어간다. '대저택'은 레이몬드의 자의식이자 과대망상이다. 그의 열등감과 분노가 만든 상상의 공간이며, 불안과 분노로 지어진 이미지다.
대저택 안에서 항상 어디선가 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레이몬드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걸 의미한다. 레이몬드 가족이 예전에 살던 작은 집은 사라지는건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의미한다. 레이몬드와 페니가 집안을 구성하는 소품-의자와 커튼-으로 변하는 건 탐욕의 결과다. 두 사람은 각자 욕심을 부린 소품들이 있었고, 그 소품처럼 변해갔다. 욕망과 불안이 그들을 잠식한 것이다.
그나마 두 딸 메이블과 이소벨은 탐욕이나 불안에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졌기에 아버지가 만든 과대망상의 공간에서 탈출한다.
 
  1. 아무도 모르는 진실
쥐를 의인화한 것은 늘 불안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가진 돈을 다 투자해 그럴 듯한 집을 한 채 지었다. 그는 이 집을 가능한 빨리, 비싸게 팔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은행에서는 계속 대출금 상환 독촉 전화가 오고 있고, 그가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하면 파산한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전화를 하는데, 알고보니 변호사였다. 변호사는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은 주인공에게 경고한다. 정작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주인공은 경찰의 도움은 커녕 무시를 당한다.
기술자를 부르면 인건비가 비싸서 혼자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다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고 멋진 집이 되었지만, 부엌 서랍장에서 곤충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곤충들은 곧 집을 잠식한다.
집을 팔기 위해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집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날, 사람들은 집구경을 하고 돌아가고, 한 부부가 남아서 침실을 차지한다. 뻔뻔한 부부에게 오히려 쩔쩔 매는 주인공. 어떻게든 집을 팔아야 하는 처지여서 스스로 비굴함을 알지만 참는다.
집을 무단으로 점거한 이상한 부부가 벌레들의 변신이라는 걸 알게 되고, 살충제를 뿌리지만 주인공은 기절해 병원에 실려간다. 겨우 깨어나자 그 뻔뻔한 부부가 주인공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는 그 부부(벌레)의 동족들이 차지했다. 집은 곧 망가지고, 주인공은 오븐 안쪽으로 땅을 파고 들어간다. 그는 더 이상 문명인(쥐)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겉으로는 번지르하고 깔끔해 보이는 집은 인간의 허위의식이다. 불안한 인간은 다른 사람 -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곧 나와 만나는 사람으로, 가족, 친척, 친구, 직장 동료 등이다 - 에게 자기 진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가 멀쩡하다는 걸 보이려 한다. 꾸미고, 가꾸고, 그럴 듯하게 보이고, 모든 것이 원만하고, 정상으로 보이도록 치장한다.
하지만, 그런 집(허위의식)의 내면에서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주인공이 집을 더 깨끗하고, 깔끔하게 가꿀수록 벌레는 들끓는다. 개인이 갖고 있는 불안, 두려움, 이중성은 원인이 있겠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맞닥뜨려 해결하지 않고, 회피하려다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방치한다. 그 결과 집(의식)을 빼앗기고, 자기정체성을 잃게 되며, 스스로 굴(자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이 맞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 귀 기울이면 행복해요
로사(고양이를 의인화했다)는 건물주다. 그는 자기 집을 보기 좋게 리모델링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 공사하고 있다. 그의 집에는 두 명의 세입자가 살고 있는데, 엘리아스와 젠은 월세를 돈으로 내는 대신 생선과 돌멩이를 준다. 젠은 친구이자 스승인 코스모스가 방문한다는 걸 알리고, 코스모스가 도착한다. 집에 머무는 대가로 집수리를 해주겠다는 코스모스의 말에 로사는 기뻐하지만, 코스모스는 마루바닥을 뜯어 배를 만든다.
로사는 화를 내지만, 이미 엘리아스와 젠, 코스모스는 배를 타고 떠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로사의 집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로사는 코스모스가 만든 장치를 통해 집이 떠오르도록 하고, 자신도 집을 배처럼 운행하며 항해를 시작한다.
 
집은 로사의 무의식이다. 로사는 자신의 삶에 집착한다. 집을 끊임없이 수리한다는 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닌, 현재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소극적 행위를 뜻한다. 한 곳에 안주하려는 로사의 마음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거나,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현재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세를 내지 않으면서 같은 집에 거주하는 엘리아스와 젠은 로사의 분열된 자아다. 로사는 무의식에서 엘리아스와 젠처럼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하지만, 의식(이성)이 그런 본능을 억누르고 있다. 그러다 외부에서 '코스모스'가 찾아오면서 로사의 삶에 변화가 발생한다. '코스모스'는 이름처럼 외부 세계이며, 외부의 자극이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충격이다. 로사는 코스모스의 행동 - 마루를 뜯어 배를 만드는 -에 화가 나지만, 결국 그것이 로사를 살리는 것임을 나중에 깨닫는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로사의 무의식(집)은 집(무의식)이 떠내려감으로써, 무의식의 억압에서 해방된다. 불안과 강박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가를 로사는 깨닫는다. 우리 개인들은 스스로 움켜 쥐고 놓지 않는 무의식이 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세계관으로, 정체성으로 드러나지만, 정작 개인은 그것의 정체를 모를 수 있다. 이런 고정관념과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더 하우스'의 연작들은 '집'이라는 공통 주제를 담고 있으며, 그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집'에 종속된, 피동적 인물들로 보인다. 영화 '샤이닝'에서 잭의 가족이 한겨울, 아무도 오지 않는 오버룩 호텔에 머무는 동안 잭이 서서히 미쳐가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때 잭의 불행한 과거-성공하지 못한 작가, 알콜중독-가 원인이지만, '오버룩 호텔' 자체가 갖는 불행과 광기의 동인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집(호텔도 물론)은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집을 지어 놓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그 집은 존재 의미가 없다.
'더 하우스'에서 집은 인간의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도 '집'을 심리구조의 메타포로 규정한 바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집'으로 표현하는 건 자연스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 편의 연작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서사를 보이지만, 인간의 심리, 의식과 무의식,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훨씬 풍부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집(의식과 무의식)의 주인은 분명 '나'인데, 세 작품 모두 집주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을 보이지 못한다. 즉, 자아의 확립이 충분하지 않은 개인의 불행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개인'이 모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다.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내가 생각한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은 아닌지, 외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주입된 정보'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혼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의식이 없고, 스스로 만든 세계관, 가치관이 없고, 비판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누군가의 말에 부화뇌동하고, 쉽게 좌우를 오가고, 쉽게 변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나 '생각의 힘'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은 일상 생활은 영위하지만, '정치적 좀비'가 될 확률이 거의 99%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자존감 없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자존감을 대신 채워줄 대상을 찾는다. 우상을 숭배하고, 절대자를 만들며, 절대자에 복종하고, 대리만족한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영혼을 판다. 쥐인간은 벌레(외부의 힘)에게 집을 빼앗긴다. 그나마 로사는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더 하우스'는 당신의 집(의식과 무의식)은 얼마나 튼튼한가를 묻는 가볍지 않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