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만들기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애나 델비'의 본명은 애나 소로킨. 25세 백인 여성이고 영어에 독일, 러시아 억양이 섞여 있으며, 독일에서 프랑스로 와서는 잠깐 패션 잡지사 인턴을 했고, 이후 미국으로 들어왔다.
드라마에서는 애나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장면부터 나오지만 리뷰는 애나의 초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에서 벌어진 이 드라마틱한 사기 사건의 시작은 1990년대 쏘비에트 연방의 붕괴에서 시작한다. 역사에서는 우연한 시간, 우연한 공간에 우연한 사건이 겹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자주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대한 사건은 거의 대부분 계획되지 않은 '우연'으로 발생했다.
쏘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러시아와 동유럽 나라들은 혼돈에 빠졌고, 조국 러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이주한 러시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애나 소로킨의 부모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애나가 독일에서 학교다닐 때는 평범한 여학생이었는데, 어느 순간 애나는 독일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뀐다. 이 배경에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애나의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독일로 왔을 때는 상당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걸로 알려졌고, 심지어 러시아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의 자금을 세탁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애나의 말에 의하면, 독일 초기에 애나의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술을 마시고 점차 폭력적인 아버지로 바뀌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애나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성실하게 일해서 사는 서민이었다. 애나의 부모는 찾아온 기자 비비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자식이지만 마치 남처럼 여겨졌어요'. 애나가 러시아에서 독일로 온 시기는 사춘기여서 애나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처음에는 학교에서도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애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급우들을 압도하는 당당하고 도도하며 냉정한 사람으로 바뀐다. 이때 학생들은 애나의 아버지가 마피아이며, 마을 주민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문이 있다고 믿었다. 그 말을 퍼뜨린 건 누굴까.
애나는 가족과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여러 종류의 패션 잡지를 보며 패션 공부를 독학했다. 부모를 졸라 비싼 옷을 사 입었고, 학교에서도 옷을 잘 입고, 패션 감각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인싸'가 된다.
애나는 아버지가 독일인이며 태양광 사업을 하는 사업가이고, 돈이 많다고 말한다. 자기를 위한 신탁금이 무려 6천만 유로가 은행에 예치되어 있으며, 자신이 만 25세가 되면 예치금을 쓸 수 있다고 주위 사람에게 말하고 다닌다.
애나가 뉴욕에서 상위 1% 부자, 부르주아,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최초의 단서는 스타트업 투자를 받으려는 앱 개발자 남자친구 체이스를 사귀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체이스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체이스는 공교롭게도 1% 부자인 노라 래드포드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체이스도 투자를 받을 목적으로 사기를 쳤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애나도 자신을 하인처럼 부리던 노라의 카드를 훔쳐 거액의 물품을 구입해 횡령한다. 그 사이 노라는 애나를 상류층 사교모임에 데리고 다니며 소개하고, 그렇게 애나는 미국 최상류층 인맥으로 진입한다.
애나는 상류층 모임에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ADF(애나 델비 파운데이션)을 설립하겠다는 꿈을 만들고, 여기에 투자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뉴욕의 오래되었지만 고급한 건물을 임대해 그곳에 상류층을 위한 사교 클럽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약 4천만 달러.
애나는 상류층 인맥으로 알게 된 투자금융사의 거물 앨런을 찾아가 재단에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달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던 앨런은 점차 애나에게 호감을 갖고 자문변호인으로 일하게 된다.
독일에 있다는 애나의 아버지, 6천만 유로의 신탁자금 등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믿으면서, 독일에 있는 아버지 변호사와 통화해 애나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단, 실제 서류와 신탁금의 확인은 직접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대출 승인이 지연되는 것이 이 사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앨런이 독일의 변호사와 통화한 것은 전부 애나의 전화기로 연결된 가상앱이고, 음성은 애나의 변조된 목소리였다. 이런 걸 알 수 없었던 앨런은 대출심사 승인을 해주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앨런이 애나의 말을 '진짜'로 믿었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평생 받게 되는 거액의 수임료의 유혹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어찌되었건 앨런이 대출심사를 승인했지만 실제 대출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앨런의 회사는 손해본 것이 없었다. 앨런은 나중에 진급까지 하는데, 회사에서는 대외적으로 앨런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며, 회사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 앨런의 위상은 추락한다.
이 과정에서 애나는 다른 투자금융사를 통해 무담보, 무신용으로 20만 달러의 대출 서비스를 받는다. 애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그의 부모가 독일에서 사업을 한다는 말만 믿고 20만 달러를 대출해준 것이다.
4천만 달러 대출 승인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20만 달러를 대출받은 애나는 최고급 호텔을 전전한다. 12조지호테러에서 컨시어지로 일하는 네프도 애나를 만나게 되는데, 팁을 한번에 100달러씩 주는 젊은 여성 갑부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프를 보면서, 애나는 네프를 친구처럼 파티와 쇼핑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그렇게 이들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애나가 제출한 카드가 승인되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호텔에서는 밀린 숙박비와 음식값을 값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말하고, 애나는 아버지와 해외송금 탓을 하며 시간을 끈다.
이런 방식으로 호텔을 전전하던 애나는 몇 개의 호텔에서 같은 사기를 치고 경찰에 잡히지만, 보석으로 풀려난 다음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로 도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다시 최고급 호텔에 숙박하며 무위도식하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해 병원으로 실려간다. 경찰과 의사는 중독센터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퇴원을 허락하고, 애나는 중독센터로 들어간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때 애나의 비자는 만료 직전이었고, 미국을 떠나야 하는데, 중독센터에 있는 기간은 체류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애나는 알고 있어서 그 헛점을 써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 가운데 애나에게 호되게 당한 레이철이 경찰에 고발하면서 중독센터에 있던 애나는 경찰에게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다. 애나는 자신이 ADF를 설립할 것이며, 성사되기 직전까지 왔노라고 큰소리친다. 과연 그럴까.
아무리 병신같은 투자금융사라도, 4천만 달러를 대출하려면 필요한 조건과 심사가 있게 마련이고, 비록 앨런이 대출승인은 했지만 실제 대출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대출금융사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독일에 있는 애나의 아버지를 만나고, 애나 앞으로 된 신탁자금의 명세와 목록, 실제 신탁자금이 들어 있는 은행의 계좌와 실물을 전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애나는 이 과정에서 포기하는데, 이후 그가 재판에서도 계속 ADF를 설립하겠다고 말한 것은 전부 거짓말이며, 자기가 한 말이 사기라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물론 애나는 4천만 달러가 진짜 자기 계좌에 들어올 거라고 믿었을 수는 있다. 적어도 투자금융사의 앨런과 다른 투자사의 책임자들이 애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잘 될 거라고 장담했기 때문이다.
애나는 자기가 만난 사회의 상류층, 거물급 인사들의 인맥을 통해 임대 비행기를 돈을 내지 않고 타고 다니거나, 최고급 호텔에서 돈을 내지 않고 숙박하거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등 온갖 파렴치한 범죄는 다 저지른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는데, 주위의 친구들은 여전히 애나가 부자 상속녀라고 믿는다. 그 허황된 꿈이 깨졌을 때, 그것이 온전히 애나의 잘못만이 아닌, 그들 자신의 욕망이 애나에게 투사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이 드라마는 애나가 '완전히 죽일 년'이 아닌, 다시 생각할 여지를 만든다.
애나는 왜 그런 행동을 할까. 애나는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겪는 감정, 갈등, 고통, 괴로움, 어려움에 대해 무감각하다. 이건 전형적인 싸이코패스의 감정이다. 애나는 ADF 설립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ADF는 나중에 생긴 꿈이고, 그 전부터 애나는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이용하고, 필요 없으면 뱉어버리는 이기적인 애나의 태도는 싸이코패스와 사기꾼이 결합한 인격체다.
어려서 패션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패션, 미술, 예술 분야에서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많았던 것은 애나의 장점이다. 그걸 활용해 뉴욕 상류층에서도 어느 정도 먹혔고, 예술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도 설득력을 갖는다. 다만 그 꿈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튼튼한 디딤돌이 없었을 뿐이다.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애나를 옹호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애나를 사기꾼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올해 초, 미국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사기 사건의 재판이 있었는데, 이 주인공도 젊은 여성이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사상 가장 큰 사기 범죄를 저질렀다는 엘리자베스 홈즈가 주인공이다. 홈즈는 대학을 중퇴하고 바이오벤처인 '테라노스'를 창업했고, 무려 1조원이 넘는 투자를 받으며 '여자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홈즈의 집안도 중상층이었지만, 최상의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홈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스탠포드 대학에 있다가 중국에서 '사스'가 발생했을 때, 싱가폴의 한 연구소에서 인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으로는 중국어를 매우 잘 했기 때문이었다. 이 연구소에서 힌트를 얻어 피 한 방울로 수십 가지 질병을 검사한다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홍보했고, 홈즈의 외모, 학력, 투자자의 욕망 등이 뒤섞여 한순간에 홈즈는 조 단위의 투자를 받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사기로 만든 회사의 운명이 그렇듯, 홈즈의 회사도 엉망진창이었고, 결국 내부고발자의 고발로 언론사가 취재하면서 홈즈의 사기극이 드러났다. 홈즈의 사기는 세계 뉴스에도 가끔 나왔지만, 애나 델비의 사기극은 너무 하찮아서 미국에서나 뉴스가 되었을 뿐, 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들기 전까지 애나 델비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이 드라마의 실제 인물 애나는 이미 작년(2021년 2월) 복역을 마치고 출감했다. 그는 아직 보호감호소에 있는데, 머지 않아 독일로 강제추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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