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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환상의 빛

by 똥이아빠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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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책읽기 모임에서 중편 '환상의 빛'을 읽었다. 

문장마다 스며 있는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독후감보다는 직접 작품을 읽어 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 문장들은 '환상의 빛'에서 가져온 것이다.

 

왜 오쿠노토의 최북단에 있는 쇠락한 어촌으로 시집 갈 마음이 든 것인지, 저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여덟 살이 되는 딸을 데리고 오쿠노토에서 일부러 맞선을 보기 위해 아마가사키까지 찾아온 세키구치 다미오라는 서른다섯 살의 남자에게 마음이 끌려서도 아니고, 공해에 찌든 연기와 사우나나 카바레의 네온사인이 가난 냄새를 풍기는 아파트를 에워싸고 있는 아마가사키라는 곳이 지겨워져서도 아니며, 아직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러브호텔의 시트를 갈아 까는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따라다니는 풍경에서, 소리에서, 냄새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풍어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 이 근방 어부 나부랭이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이라고, 아버님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다미도 가구도 빈틈없이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텐데도, 어쩐지 모습을 바꾼 낯선 방에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명이 다해 미세하게 깜박거리고 있는 형광등을 보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듯한 안도감에 휩싸였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마 그때의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커먼 구름이 점차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자색을 띤 파란 하늘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날씨가 궂어지는 하늘인지, 개어가는 하늘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듯한 구름 벽이 안개비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저는 물방울에 젖은 차창 너머로 흔들흔들 요동치고 있는 광대무변한 일본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몇 개의 조그마한 마을을 빠져나간 차가 다시 해안선으로 나왔을 때 제 눈은 무심코, 처음 본 소소기의 바다에 고정되었습니다. 온통 안개비에 묻힌 그때의 바다색은,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상하게 파도만이 새하얗게 날아오르며 넘실거리는 어두운 바다였습니다.

저는 내버려진 어선에 달라붙은 채 오랫동안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의 흔들림과 함께 제 몸도 흔들흔들 흔들렸습니다. 아마가사키의 그 터널 나가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겨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화창한 아침놀이 늪처럼 고요해진 바다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침놀에 물들어, 불타는 숯불이 전면에 깔린 듯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시뻘건 첫눈이 길에도 지붕에도 방파제에도 모래사장에도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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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의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감독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고, 이 작품이 감독 데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은 주인공 유미코의 남편 이쿠오가 자살한 동기다. 젊은 부부는 가난하지만 아기도 태어나고, 부부 사이나 주변에서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쿠오는 자살한다. 유미코는 남편의 자살이 혹시 자기 때문은 아닐까 고민한다. 유서도 남기지 않은 자살이었고,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유미코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녀는 시간이 흘러 살던 곳에서 먼 바닷가 마을의 어부와 재혼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의 반짝거리는 윤슬을 보면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 역시 콕 찍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그의 남편이 자살하려는 유미코를 구하고, 자신이 자살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의 병'이라고 이해한다. 

어느 날, 누군가 자살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오래 앓아온 마음의 병을 키웠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런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의 냉정함,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혀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의 구조 등이 이쿠오를 죽이고, 유미코 마저 죽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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