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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세 편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by 똥이아빠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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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사건이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처럼 '전쟁은 고도의 경제행위'이므로, 전쟁의 목적은 폭력을 써서 상대를 공격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다. 따라서 얻을 게 많은 만큼 많은 걸 잃게 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전쟁도 그렇다.
전쟁을 낭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전쟁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다. 전쟁은 집단과 집단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전쟁터는 개인과 개인이 맞닥뜨리고, 모르는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하는 현장일 뿐이다.
이때 개인이 모르는 사람을 죄의식 없이 살해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기본이 '애국심'이다. 전쟁을 시작한 국가는 '애국심'을 부추기고, 침략 당한 국가는 '조국 수호',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집단(국가)과 개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경우, 전쟁은 일종의 '도박'으로 변질된다. 중세 '십자군 전쟁'으로 불리는 유럽 기독교인 군대가 이슬람 지역을 침략한 사례가 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지역을 침탈해 그들의 재산을 뺐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 돈을 벌려는 목적이었다.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서 군인들이 약탈하거나 군인이 아닌 사람을 해치는 건 전쟁 범죄에 해당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본질은 '약탈'에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나라를 침략해 노략질을 해서 이익을 챙기거나 자기 목숨을 잃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도박을 했다.
 
아주 오래 전, '씨족' 단위의 집단에서 발생한 전투에서 개인이 '씨족'의 한 단위로 참전하는 건 곧바로 그 집단의 생존이 곧 개인(자기 자신)의 생존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씨족 단위의 전투는 집단의 크기를 늘리려는 종족 보존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으며,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도 안전하다는 걸 인류는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최소 부족 단위 규모가 되면서 인류는 남성 중심의 전투원을 구성해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일 때는 이들 남성 중심의 전투원을 투입했고, 평상에서는 남성이 수렵을 통해 식량 확보와 전투 훈련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집단이 나라 단위로 커지면서 '군인' 즉 싸우는 사람을 따로 모집해 보다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시키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훈련과 실습을 통해 개인의 전투력을 향상했다.
'전쟁'은 두 개 이상의 집단이 극렬한 물리적 충돌에 이르는 상황인데, 전쟁을 일으키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갈린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전쟁을 일으킨 집단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고 가정할 때, 한국이 힘이 없어 일방으로 침략당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한국이 모든 힘을 동원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이때,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전쟁으로, 역사에서 '임진, 정유 전쟁'이 대표적인데,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조선은 이런 일본의 야욕에 맞서 미리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전쟁을 치러야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조선 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아가서 중국의 당나라, 수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이 있는데, 이때 방어전은 침략당한 나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쟁이다.
즉, '모든 전쟁은 나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전쟁을 일으킨 집단은 나쁘지만, 침략에 맞서 싸우는 건 정당한 방어이기 때문에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모든 전쟁이 흑과 백처럼 선명하게 악과 선으로 구분되는 건 아니다. 시대 배경, 정치 상황, 전쟁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집단과 집단 사이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이런 고려 없이 어느 한쪽을 일방 비난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현대의 시작은 1차 세계전쟁'이라고 에릭 홉스봄은 정의했다. 이 전쟁 이전까지 약 100년 동안은 유럽에서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기였고, 그때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발전, 성장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5년 전쟁 기간에 무려 1,500만 명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가 나온 전쟁은 1차 세계전쟁이 최초였다.
무엇보다 근대에서 현대를 가르는 건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이었다. 개량된 자동 소총과 기관총, 수류탄, 대포, 탱크, 화염방사기, 비행기가 등장했고, 개량한 첨단 무기는 사람의 생명을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죽일 수 있었다. 10대, 20대, 30대 남성이 대부분 죽었으며, 이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손자이며 친구였다.
전쟁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하는 건 물론, 사람의 생명을 잔혹하게 끊는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와 연결된 가족, 친척, 이웃과 연결되며 마을 단위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이렇고, 전쟁은 인륜, 도덕, 윤리와 같은 인간의 정체성은 물론 가치관, 세계관을 망가뜨리며, 사회 질서의 붕괴, 역사의 단절, 세대와 세대의 연속성을 무너뜨리고 과거의 문명까지 모두 파괴한다.
 
전쟁을 낭만으로 바라보는 작품은 매우 많고, 너무 많아서 사람들은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다. 전쟁터에는 늘 영웅이 있고, 영웅이 모든 걸 해결하는 미국 영웅주의 영화가 그렇듯,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와 참혹함, 끔찍함을 외면하고 낭만을 찾거나 그런 시각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오히려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외면하려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1차 세계전쟁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은 곧바로 2차 세계전쟁의 불구덩이에 휩쓸렸고, 1차 세계전쟁보다 무려 세 배나 많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서야 전쟁의 끔찍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2차 세계전쟁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이 단일 전쟁으로 한 민족 구성원이 무려 최소 100만 명 넘게 죽었고,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훨씬 많았던 전쟁이었다. 민간인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한국전쟁이 이념전쟁이자 강대국의 이념전쟁의 대리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국제적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빛을 잃어가면서 2000년 이후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들이 나타났다. 전쟁의 낭만적 환상은 상당히 벗겨지고, 전쟁의 실체가 사람들에게 주로 영상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시작으로, 전투의 사실성 즉 참혹함, 잔혹함, 끔찍함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나왔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 레마르크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1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10년 지나서 나온 소설은 곧바로 미국(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했다. 작가 레마르크는 독일인으로 1차 세계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이 소설은 세계 전쟁문학 가운데 반전 소설로 유명하다.
레마르크가 전쟁 경험을 토대로 반전 소설을 썼다면, 레마르크와 비슷한 경험을 한 히틀러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이다. 레마르크와 히틀러는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1차 세계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으며 부상당한 경험이 있고, 훈장을 받은 것도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전쟁을 혐오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소설을 쓴 레마르크와는 달리, 히틀러는 1차 세계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전후 국가배상금으로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며, 불만이 많은 독일인을 상대로 증오를 부추기며 권력을 움켜쥔다.
레마르크는 1929년에 이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때 이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로 권력을 차지한 히틀러는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을 싫어했고, 그가 국가수상이 된 1933년 이후 레마르크의 소설은 분서 목록에 올라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나찌의 탄압으로 레마르크는 스위스로 망명하지만 그의 여동생 엘프레데는 평범한 노동자로 살다 반역죄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는데, 히틀러가 레마르크에게 직접 복수하지 못하자 그의 여동생을 살해한 것으로 본다.
 
레마르크의 소설은 발표하자마자 미국(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었다. 1930년작 영화는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가까운 사실성, 현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30년 작품과 1979년 작품은 미국(헐리우드)에서 제작했기에 등장인물이 모두 영어로 말하는 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세 편의 같은 영화 가운데 내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은 건 1979년판 영화다. 소설 원작 그대로, 총성이 멈춘 서부전선에서 나비를 쫓다 적의 저격수 총에 맞아 전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선명하다. 최근에 개봉한 2022년판 영화는 앞의 두 영화보다 미장센은 훨씬 훌륭하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반전 메시지도 명확하고, 앞의 두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긴장감과 압축, 전쟁 장면의 묘사가 뛰어나다. 다만 마지막 장면은 1979년판과 사뭇 다르다.
영화는 2시간 남짓 서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영화만 보고도 소설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소설의 감동을 다 느끼지는 못한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원작 소설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구체적인 인물의 일상, 전쟁에 반대하는 평범한 민중의 목소리,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이 바로 우리 형제, 친구, 동료, 이웃이라는 구체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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