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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로크

by 똥이아빠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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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완벽한 모노 드라마. 톰 하디 한 사람만 등장하고,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여러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는 내용이 전부다. 모노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인물을 둘러싼 서사가 충분한 개연성을 가져야 하며, 관객이 주인공 한 사람만 보면서 모든 상황을 추리, 추론, 상상, 납득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사건의 긴박함과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느껴야 한다.
모노 드라마 영화는 연극의 영상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연극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입체극이라면, 영화는 영상으로 움직이지만 평면, 2차원의 예술이다. '로크'는 연극으로도 충분히 공연할 수 있는 내용이며, 연극과 영화가 거의 똑같은 효과를 갖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린다면, 무대 가운데 자동차가 있고, 뒷벽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한밤의 고속도로 풍경과 자동차들이 달리는 영상이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유일하게 등장하는 로크(톰 하디)가 자동차에 앉아 운전하면서 통화하고, 그 통화 상대는 무대의 양쪽에서 번갈아 나오면서 통화를 하고, 통화할 때는 조명이 스폿라이트를 비춘다. 통화가 끝나면 조명이 꺼지면서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퇴장하고, 다음 상대가 반대쪽에서 나오는 방식으로 연출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로크(톰 하디)는 운전을 하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감독인 스티븐 나이트가 직접 쓰고 연출했는데,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시도하기 어려운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선 감독의 의지와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관객은 주인공 로크(톰 하디)만을 보지만, 로크가 통화하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대단하다. 단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목소리에 담긴 생생한 감정을 통해 관객은 어딘가에서 통화하고 있는 배우의 존재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심지어 플래시 백도 없이, 오로지 현재 장면 즉 로크가 운전을 하며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전화 통화하는 장면만을 보여준다.
로크를 연기하는 톰 하디는 조지 밀러 감독의 놀라운 걸작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주인공 맥스로 등장한 걸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밴드 오브 브라더스' 시리즈에서 '자노벡 이병'으로 데뷔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게다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명작 '블랙 호크 다운'에도 출연해 랜스 트웜블리 상병 역할을 했다. 이 두 작품이 모두 2001년 작품이고, 걸작이며, 톰 하디가 영화배우로 입문한 영화라는 점에서, 톰 하디의 선택이 탁월했거나 운이 좋았다고 본다.
톰 하디는 가이 리치 감독의 '락큰롤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다크 나이트 라이즈', '덩케르크',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같은 명작에 출연하면서 최고 배우로 이름을 알렸는데, 이 영화 '로크'는 상대적으로 매우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출연했다.
 
거대한 건설공사 현장이 조감으로 보이고 곧바로 현장에서 사람들이 퇴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업복을 입은 한 사내가 반짝거리는 새차 BMW SUV에서 옷과 신발을 갈아 입고, 어디론가 출발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동차와 연결한 스마트폰의 블루투스 기능으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데, 관객은 이 사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 그가 건축공사장에서 나온 건 알고 있지만 - 어디로 왜 가는지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내가 통화하는 대화만으로 주인공의 처지와 서사를 이해해야 한다.
이건 일종의 '엿보기'와 같아서, 관객은 로크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 그의 통화를 엿듣는 기분이 든다. 로크는 운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는다. 방금 떠나온 현장에 남아 있는 부하 직원의 전화다. 내일 아침에 가장 중요한 공사를 하는데, 대체 지금 현장을 떠나 어디로 가느냐는 항의다. 로크는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다면서, 부하 직원에게 대신 현장 감독을 하라고 지시한다. 능력이 부족한 부하 직원은 당연히 항의하지만, 로크는 차분하게 그를 설득하고 용기를 준다.
집에서 온 전화는 아들이었고, 곧 축구 경기가 시작되는데, 아빠는 언제 도착하냐고 묻는다. 저녁에 가족이 모두 모여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함께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보기로 약속했지만, 로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실망한 아들들과 아내에게 사과하는 로크. 이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관객도 눈치챈다.
 
다시 전화. 이번에는 로크가 일하는 회사의 고위 임원이 전화해 당장 현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이 공사 현장이 '본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모르느냐고 다그치지만, 로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55층 빌딩을 세우는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공사의 콘크리트 타설을 앞두고 있다는 걸 관객도 알게 되고, 그게 유럽연합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사이며, 미국의 '본사'가 공을 많이 들인 프로젝트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로크는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관객은 로크가 하는 몇 번의 통화만으로 삶은 밤고구마를 물도 없이 다섯 개는 먹은 것같은 답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로크는 왜 이런 답답하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을까.
로크는 한 여성과 통화하고, 그 여성이 지금 산부인과 병원에 입원했으며, 로크가 가는 곳이 이 병원이라는 게 드러난다. 앞에서 통화한 내용으로 보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될 공사 현장에 책임자로 있어야 할 로크는 현장을 떠났고, 또 가족이 함께 모여 신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저녁 시간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가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관객은 의문을 갖는다. 
더구나 그 여성은 로크의 아내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라는데, 일과 가족 모두를 포기하고 곧 세상에 나올 아기를 보러 가는 걸까. 이 이상한 상황이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로크가 놓인 상황은 지금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그는 운전을 하면서 이 모든 긴급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로크는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혼잣말을 한다. 백미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는 듯 말한다. 아니, 아버지를 비난하고, 원망한다. 로크의 독백을 통해 관객은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로크는 유복자였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는 외롭게 로크를 낳았고, 길렀다. 엄마 혼자인 외부모를 두고 성장한 로크는 트라우마가 있고, 그가 아내와 자식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것도 이런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런 로크가 '실수'를 했다고 아내에게 고백한다.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 며칠 숙소로 쓰던 곳에서 일을 도와주던 중년 여성과 감정 없이 하룻밤을 보냈고, 그 여성이 임신을 했으며,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임신을 한 아이가 자기의 아이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로크는 아내에게 말한다.
로크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로크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었고, 복잡하게 꼬인 상황도 모두 로크 자신이 만든 상황이다. 그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테고, 그가 해고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맛있는 소시지와 맥주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보면, 가족 모두가 행복했을테다.
그럼에도 그런 '합리적 상황'을 모두 무시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이 낳을 아이를 보러 달려가고 있다. 그는 회사 임원에게 해고한다는 통보를 받았고, 아내에게는 이혼할테니 집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운전을 하는 두 시간 사이에 운명이 바뀌었고, 삶의 차원이 달라졌다.
로크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기가 이룬 모든 성과와 결과를 무시하고, 배반했지만, 그건 로크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로크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아이를 위해서 한 행동이 결국 아이가 불행해지는 원인이 된 건 아닐까. 역설적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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