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워터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감독 톰 맥카시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배우로 출발해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감독으로도 여러 작품을 연출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 '아버지의 깃발'에서 제임스 브래들리 병사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톰 맥카시다.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품은 '스포트라이트'로,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톨릭 보스톤 교구에서 벌어진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보도한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으로 톰 맥카시는 수많은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작품상을 받았다.
다만 아쉬운 건, 톰 맥카시의 시나리오나 연출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가 '뛰어난 감독'이라고 부르는 영화감독들의 특징은 자기 세계가 분명하고, 연출한 작품의 수준이 일정한 품질을 유지한다. 즉 믿고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 박찬욱, 봉준호, 마틴 스콜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크리스토퍼 놀란, 조지 밀러,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임스 카메론, 드니 빌뇌브, 미카엘 하네케, 장 뤽 고다르, 리들리 스콧, 켄 로치...
톰 맥카시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명작을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 범작도 많이 연출하고 있어서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런 와중에 이 작품 '스틸워터'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다.
이 작품은 2007년 11월,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실제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했는데, 그 사건은 당시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적 뉴스거리였다. '아만다 녹스' 사건으로 불리는 살인 사건은 미국인 아만다 녹스가 룸메이트를 살해한 것으로 재판을 받다 마지막에 무죄로 풀려난 사건이다.
피해자인 영국인 룸 메이트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만다 녹스와 그의 애인, 지인으로 모두 세 명이었다. 결론만 보면, 아만다 녹스는 2015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자서전을 냈고, 프리랜서 기자로 생활하고 있으며, 넷플릭스에 '아만다 녹스'라는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했다. 톰 맥카시 감독은 '스틸워터'가 '아만다 녹스' 사건을 모티프로 한 건 맞지만, 모든 내용은 '아만다 녹스'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밝혔다.
오클라호마주 스틸워터에 사는 빌 베이커는 시추공으로 일한다. 하지만 시추공 현장이 줄어들면서 일자리를 잃고 공사장 잡부로 일하면서 살아간다. 참고로 오클라호마주는 미국에서 존재감이 낮은 주 가운데 하나다. 미국 중남부에 있으며, 유명한 텍사즈주와 경계하고 있지만 텍사스주는 유명한데, 그 위에 있는 오클라호마, 캔자스, 네브라스카, 사우스다코타, 그 위에 캐나다와 경계한 노스다코타주까지 중부에 있는 주들은 인구도 적고,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낮은 주들이다.
이곳에서 사는 빌 베이커(맷 데이먼)는 미국 백인의 평균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무식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며, 정치에 무관심하고, 기독교인이며, 가족 중심의 사고방식이 전부인 인물이다. 중하층 노동자이면서 노동자의 자의식도 없고,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데 급급한 인물이다.
나중에 프랑스에서 만난 이웃집 여성 버지니가 '극장(연극)에 가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 베이커는 가난해서이기도 하지만, 문화, 예술 쪽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베이커의 배경은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베이커는 집에 돌아와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간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해 어떤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로비 직원이 '돌아오셨군요'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베이커가 이전에도 이곳에 묵었음을 알 수 있다. 베이커는 교도소를 방문해 면회 신청을 하고, 기다리다 감옥에 갇혀 있는 딸 앨리슨을 만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앨리슨은 재판에서 9년 선고를 받고 지금 5년째 복역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앨리슨은 베이커에게 쪽지를 몰래 전달하며 르마르크 변호사를 찾아가 쪽지를 전하라고 부탁한다. 이 쪽지는 사건이 시작되는 단서이자 출발점이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지난 5년 동안 베이커는 정기적으로 프랑스에서 아파트를 얻어 한동안 생활하며 딸 앨리슨을 면회하고, 필요한 물품과 돈을 전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베이커는 르마르크 변호사를 만나지만, 앨리슨의 재심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새로운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는 판사가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말한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베이커는 오로지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는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어 의사소통이 되지만, 그외 생활에서는 불편함을 겪는다. 이때 베이커의 태도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탓하는가 하면, 영어로 말하라고 강요하거나, 영어를 못한다고, 알아듣지 못한다고 짜증을 부린다. 이런 소소한 그의 태도는 영화의 마지막과 맞물려 의미를 갖는다.
베이커가 생활하는 아파트 옆집에 아이 마야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 버지니를 알게 된다. 버지니는 연극배우이고, 영어를 꽤 잘 하는 사람이어서 베이커는 버지니의 도움을 받는다. 베이커가 버지니에게 답례할 수 있는 건 집안의 전기를 고치거나, 화장실 변기 부속, 씽크대 배수구 교체 같은 소소한 집수리인데, 이건 별 게 아닌듯 해도 버지니에게는 매우 고마운 상황이다. 인건비가 비싼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부르기만 해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작은 공사까지 하면 가난한 사람은 부담이 크다.
영화에서도 베이커와 버지니가 저녁 데이트를 하려고 베이비시터를 불렀을 때, 겨우 몇 시간 마야를 봐주고 60유로를 받는 걸 보면서 베이커가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생활하는 장면이 곳곳에 배치된 건, 베이커가 딸 앨리슨이 죄가 없이 감옥에 갇혔다고 믿으며, 어떻게든 석방이 되도록 애쓰는 중심 이야기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베이커는 앨리슨이 건넨 쪽지를 시작으로, 버지니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 가운데는 앨리슨의 룸메이트를 살해했다고 의심하는 아킴도 있다. 아킴은 중동에서 이주한 이주민으로, 가난한 사람들, 주로 이주민이 모여 사는 '칼리스트'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미국으로 보면 '할렘' 같은 곳이다.
베이커는 버지니와 함께 아킴의 행방을 찾으러 다니는데, 앨리슨의 친구나 아킴을 아는 사람들은 베이커의 태도를 경계하며 쉽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베이커에게 사건을 해결해주겠다며 브로커가 접근하고, 자신이 전직 경찰이라고 말한다.
베이커는 버지니와 그의 딸 마야를 알게 되면서 점차 두 사람을 사랑한다. 버지니 역시 베이커를 사랑하는데, 버지니의 딸 마야는 버지니가 '하룻밤'을 즐긴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라고 말한다. 영화 '로크'에서 주인공 로크가 '하룻밤'을 보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자기의 모든 삶을 버리고 태어나는 아이에게 달려가는 상황이 떠오르는데, 버지니의 상대였던 남성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베이커와 버지니는 데이트를 하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장면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새미 스미스(Sammi Smith)가 부르는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이다. 이 노래는 퍽 의미심장한데,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1969년 처음 노래를 만들어 발표할 때, 이 음악의 가사는 '여자와 하룻밤을 즐긴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노래를 만들고 발표했지만, 1970년에 새미 스미스를 시작으로, 짐 에드 브라운, 엘젤버트 험퍼딩크, 올리비아 뉴튼 존, 린 앤더슨, 글래디스 나이트, 엘비스 프레슬리, 존 홀트, 조니 캐시, 타미 와이넛, 톰 존스, 앤 머레이, 브라이언 아담스, 미셸 부블레, 글랜 캠벨, 도티 웨스트, 존 바에즈, 제리 리 루이스, 머라이어 캐리, 레이 스티븐스, 윌리 닐슨, 스콧 매튜, 레나 자바로니, 켈리 존스, 조 사이먼, 노라 존스 등 많은 유명한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명곡이다.
나는 2002년 앤 머레이가 발표한 음악을 자주 듣는데, 이번에 여러 버전을 들어보니 존 홀트의 레게 버전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이 노래를 새롭게 알린 윌리 닐슨의 창법이 훌륭했다.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은 베이커와 버지니의 운명을 예고하는 노래로, 역시 영화의 결말에서 베이커의 회환과 맞물린다.
세 사람은 점차 '가족'을 이룬다. 베이커는 버지니의 집으로 들어가 생활하고, 마야는 베이커를 아빠처럼 따른다. 버지니도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일거리도 많아져, 마야를 돌보는 건 주로 베이커가 한다. 베이커는 마야와 함께 축구경기장에서 축구를 보다, 우연히 아킴을 발견한다.
베이커는 아킴을 폭행하고 집 지하실에 가둔다. 아킴의 DNA를 확보해 사건 브로커에게 보내고 돈을 지급한다. 이 과정에서 함께 있던 마야가 목격자가 되고, 베이커는 마야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말이 부탁이지, 강요와 같다.
아킴은 진실을 말하고, 베이커는 충격받는다. 아킴이 실종되자 아킴의 부모와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프랑스 경찰이 베이커를 찾아온다. 지하실에는 아킴이 있고, 경찰은 베이커를 앞세워 지하실을 수색하지만, 아킴은 그곳에 없었다. 결국 베이커는 무사하고, 베이커가 확보한 아킴의 DNA에서 앨리슨의 친구가 살해당한 장소에서 발견한 DNA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증거만으로도 앨리슨은 석방되고, 베이커와 앨리슨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마야에게 거짓말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버지니는 베이커를 쫓아내고, 아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한 앨리슨은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왜 이럴까요'라고 말하는 앨리슨의 말에 베이커는 대답하지 못한다. 딸의 거짓말로 많은 걸 잃었지만, 베이커는 자신도 거짓말을 했고, 그 결과 버지니와의 행복했던 관계가 파탄났기 때문이다.
베이커의 운명은 외부에서 들이닥친게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만든 결과라는걸 알 수 있다. 베이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지켜야 할 삶의 태도를 저버렸다. 목적을 위해 옳지 않은 수단을 썼으며, 자기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강요하는 부도덕한 짓을 함으로써, 스스로 업보를 만들고, 그 결과가 다시 엄청난 비극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누명을 썼다고 믿은 딸을 위해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는 '훌륭한 아버지'로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휘두르고 거짓말을 하는 '역겨운 아버지'가 되어 버린 베이커의 삶은, 그럼에도 앨리슨을 감옥에서 나오게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베이커가 점잖게 합법적 방법만으로 앨리슨을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결과로만 보면, 앨리슨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영화는 베이커가 놓인 운명의 한 지점에서 많은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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