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건 씨의 전화기 -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소설을 읽을 때와 조금 다른 느낌인데, 소설은 읽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소설을 재구축, 창조하는 거라면, 영화는 모든 독자가 서로 다르게 구축한 소설의 세계를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상상의 세계를 제한한다. 이건 명백히 소설의 입장에서는 손해지만, 이미지로 구축한 세계가 물적 존재로 구체화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상상보다 서사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작품은 소년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을 담은 이야기이자, 크레이그의 성장 소설이다. 해리건 씨가 어린 크레이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을 때, 크레이그에게는 단순한 아르바이트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의 벽장을 보면서 해리건 씨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아끼고, 지켜본 애틋한 사랑을 느낀다.
그건 해리건 씨도 어릴 때 엄마를 잃었고, 어렵게 혼자 자라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으며, 크레이그도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아빠와 생활하고 있었던 걸 알았기에, 일부러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책 읽는 아르바이트는 단순히 돈을 버는 걸 떠나, 크레이그가 많은 책을 꾸준히 읽음으로써 정신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해리건 씨와 일주일에 세 번씩 만나면서 둘이 나눈 우정이 크레이그가 엄마를 잃고 가졌을 외로움과 슬픔을 다독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리건 씨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돌보는 애틋한 마음으로 크레이그를 지켜봤을 걸로 생각한다. 해리건 씨는 자수성가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는 가족이 없고, 가족을 이루지도 않았다. 그가 가진 재산을 물려줄 가족이 없다는 건 한편 안타깝지만, 그 유산의 일부를 크레이그가 물려 받을 수 있었던 건 크레이그의 태도, 마음가짐, 성품이 해리건 씨에게 좋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충분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미스터리 스릴러로 바뀌는 건 해리건 씨의 전화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때문인데, 그것이 온전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으므로, 사건은 크레이그의 바람과 우연이 겹친 사고이면서 환상 또는 상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크레이그를 괴롭히던 학교 선배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고, 좋아하던 학교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교통사고를 일으킨 운전자가 법의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난 이후, 재활원에서 자살하는데, 이 두 사건에서 공통점은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의 처지를 호소한 이후에 가해자들이 죽게 되는데, 크레이그는 이걸 해리건 씨의 혼령이 초월적 힘을 썼기 때문으로 믿는다.
권선징악. 해리건 씨의 영혼은 크레이그처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 반듯하게 살아가도록 많은 장학금까지 남겨주었고, 크레이그를 괴롭히는 사람을 징벌하면서, 외형적으로는 사회의 규범, 윤리, 정의와 같은 추상적 가치를 지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가 보낸 메시지를 받는데, '이제 그만'하라는 내용이다. 그건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에게 자신의 곤란함, 어려움, 억울함,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뜻이며, 결국 크레이그가 정신적,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크레이그 역시 그 메시지의 뜻을 이해하고, 해리건 씨의 전화기를 바다에 던진다. 이제 크레이그는 홀로 서야 한다. 그를 아껴주던 해리건 씨는 땅속에 묻혔고, 크레이그는 혼자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외롭고, 때로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하려 애쓰고, 서로 따뜻한 온기를 나누려 노력한다. 스티븐 킹은 공포,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을 쓰지만, 그런 이야기의 깊은 곳에는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사랑, 연민, 공감, 우정 같은 이야기를 담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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