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타운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출하고 주연으로 연기한 작품. 그가 대중에게 뚜렷이 각인된 작품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연출한 작품 '바스터즈:거친 녀석들'(2009년)에서 독일군 장교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이후 '장고:분노의 추적자'(2012년)에서도 탈출 노예를 돕는 멋진 현상금 사냥군으로 등장한다.
독일군 장교 한스 란다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하는 듯 보이지만, 듣는 사람의 심장을 조이는 차갑고 날카로운 감정을 내뿜는 연기를 보여주면서, 누구도 발츠를 대신할 수 없는 완벽한 '유대인 사냥꾼'인 잔혹한 독일군 장교를 연기했다.
크리스토프 발츠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고, 1977년, 그의 나이 11세에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했지만,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건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을 기점으로 봐도 좋겠다. 발츠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재능이 있어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오디션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놀래켰다.
이 두 편의 영화로 크리스토프 발츠는 세계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그가 처음 감독으로 만든 영화가 '조지타운'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발츠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지타운'은 실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든 작품으로, 실화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모든 내용은 실제 있었던 사건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
때로 현실이 더 영화같다는 말이 있듯, '조지타운'을 보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경우가 있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많은 실제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화의 상상력이 실제 인간의 드라마틱한 삶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올리히 모트는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사망했다고 911에 직접 신고했으며, 경찰의 심문도 받았고, 자기의 알리바이도 진술한다. 한마디로, 울리히 모트는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전화한 비통한 남편일 뿐이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충격적인 내용이 드러난다. 울리히 모트의 아내는 91세의 노련한 정치부 기자 엘사 브래트였고, 이 할머니는 자기 딸보다 어린 남성인 울리히 모트와 부부로 살고 있었다. 엘사 브래트에게 딸이 한 명 있었고, 딸 아만다는 하버드대학의 법학과 교수로 부임한 상태였으며, 엄마가 사망하자 당장 울리히 모트를 의심한다. 아만다의 의심은 당연히 합리적이고, 그가 하버드대학교 법학과 교수라는 지위는 경찰들도 그의 말을 함부로 듣지 못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게다가, 죽은 엘사 브래트가 워싱턴에서 워낙 유명한 정치부 기자였고, 거물 정치인들과도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라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특별히 다루기 시작했다.
경찰은 울리히 모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단순 참고인 신분이었던 울리히 모트를 용의자로 신분을 바꾸고, 체포한다. 영화의 얼개는 울리히 모트가 법정에서 재판 받는 장면과 변호사를 만나 협의하는 장면, 엘사 브래트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들, 울리히 모트가 살았던 오래지 않은 과거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준다.
울리히 모트는 변호사들에게 자기가 중동에서 이라크 반군을 비롯해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ISIS)와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며, 비정부기관 EPG(Eminent Persons Group)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울리히 모트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크리스토프 발츠가 주인공 울리히 모트의 역할에 매력을 느낀 건, 실제 인물일 수도 있는 울리히 모트의 말과 행동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울리히 모트의 최초 경력은 워싱턴 D.C에서 한 하원의원 사무실의 인턴으로 일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울리히 모트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 아무리 적게 봐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다. 그는 오하이오주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실 인턴으로 일하면서, 방문객에게 의원 사무실을 안내하는 일을 하는데, 방문객들에게 하는 말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거짓말을 섞어 이야기하는 바람에 해고당한다.
울리히 모트가 어떻게 하원의원 사무실의 인턴이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그 이전에 울리히 모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미루어 짐작하는건, 울리히 모트는 아무런 배경 없이 속임수와 사기를 저질러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가 이란에 있었다는 것, 외인부대에서 복무했다는 것도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의원사무실에서 해고당한 울리히 모트는 의원 신분증을 훔쳐 국제회의장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엘사 브래트를 발견하고(그의 지갑을 주워준다) 그 인연으로 엘사 브래트에게 접근한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엘사 브래트에게 접근한 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울리히 모트는 독일인 집안이고, 엘사 브래트 역시 독일에서 이민온 사람이어서 두 사람은 같은 국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친근함을 가질 수 있었다. 울리히 모트는 가끔 엘사 브래트와 만나 식사하며 여러 방면의 지식을 드러내면서 엘사 브래트에게 호감을 얻는다.
엘사의 남편이 사망하고, 혼자 된 엘사가 정서적으로 몹시 힘들어할 때, 울리히 모트가 전화해 클래식 공연장 티켓을 어렵게 구했으니 꼭 나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엘사의 마음을 얻은 울리히 모트는 점차 엘사를 가스라이팅하면서, 엘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울리히 모트는 마치 집사처럼 성심껏 엘사를 모시며 산다. 40년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나면서도 두 사람은 부부로 살아가는데, 엘사의 딸 아만다는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남편이라며 함께 사는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다. 엄마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울리히 모트는 엘사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사기꾼으로 보일 뿐이다.
울리히 모트는 엘사 브래트의 이름을 빌려 워싱턴의 거물 정치인들을 만날 기회를 얻고, 그들에게 자기가 만든 비영리단체 EPG에 등록해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다. 이때 엘사 브래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인맥을 울리히 모트에게 알려주고, 중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엘사 브래트는 울리히 모트가 워싱턴의 거물 정치인들을 연결해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도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울리히 모트에게 불리한 사건이 발생한다. UN에서 연설을 한다고 뉴욕에 온 울리히 모트와 엘사는 최고급 호텔에 묵는데, 엘사가 친구들을 만나고 호텔로 돌아오니 울리히 모트가 침대에서 어떤 남자와 벌거벗은 채 있는 걸 발견한다. 울리히 모트가 동성애자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동안 엘사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엘사가 울리히 모트를 내쫓는다.
이렇게 끝났다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는 아닌데, 울리히는 그 호텔에서 쫓겨난 이후 2년 동안 종적을 감춘다. 그 사이에 UN 중동 담당부서에는 익명으로 전자메일이 도착하고, 내용은 이라크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는 팀이 있으며, 그 팀을 담당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소개하고, 작전의 내용을 설명한 메일이었다.
메일이 진짜 이라크에서 온 건지, 그 사람이 실존하는 인물인지 누구도 모르지만, 메일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이라크 반군 지도자의 인물을 거론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부 정보를 직접 듣지 않고는 모를 내용을 적었으므로, 담당 부서에서는 이 메일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한다.
울리히 모트는 엘사 브래트에게 쫓겨난 지 2년이 지나서 다시 전화하는데, 자기가 이라크에 있고,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어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엘사가 보고 싶다며, 용서해달라고 빈다. 그렇게 수많은 전화를 통해 엘사를 가스라이팅하는데, 나이 많은 엘사는 울리히 모트가 동성애자이고, 자기를 속이긴 했지만, 집사로서의 생활만을 한다면 도움이 된다는 걸 이미 체험했으므로, 제한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시 엘사의 집에 들어간 울리히 모트는 예전처럼 집사 노릇을 충실히 하는 한편, 예전에 알게 된 인맥을 다시 연결하면서, 집에서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 정치와 군사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엘사 브래트의 딸 아만다까지 초대한 저녁 파티에서 울리히 모트는 온갖 잘난 척을 하며 파티를 주도하는데, 그 꼴을 바라보면서 아만다는 구역질나는 모욕감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아만다는 울리히 모트가 얄팍한 지식으로 잘난 체하는 사기꾼이라는 걸 간파했다.
그렇게 파티가 끝나고, 늦은 밤, 울리히 모트는 정복을 입고 외출하고 돌아와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사망했다며 911에 신고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울리히 모트가 외출해서 만난 사람은 예전의 동성애 상대였고, 울리히 모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침대에서 잠자는 줄 알았던 엘사는 울리히 모트가 지난 2년 동안 중동에 있었던 게 아니라, 가까운 모텔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는 걸 말한다. 끝까지 자기를 속인 울리히 모트를 모욕하며,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자, 울리히 모트는 엘사 브래트를 살해한다.
실제 사건에서 범인은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 살해했다는 법원의 선고로 무려 50년 형의 징역을 살고 있다. 이 실제 사건은 살해 도구나 증거, 증인이 없었지만, 범인인 남편의 과거 행적이 아내를 살해할만한 동기가 된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정황 증거만으로 유죄 판결이 났다.
영화는 실화가 아니라고 했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보면, 실제 범인이 얼마나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지 알 수 있고, 그가 명백히 '리플리 증후군'에 속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거짓말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규정하며, '리플리 증후군'은 정식 병명은 아니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의 작품 인물 '리플리'에서 따온 명명이다.
울리히 모트는 끝까지 자기가 떳떳하다고 주장하며, 엘사 브래트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지 않는다. 그는 거짓말과 사실을 구분하는 기준이 없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도덕적, 윤리적 판단 기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걸로 미루어 그의 과거는 매우 불행했을 걸로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싸이코패스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 다중인격 등의 비정상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어릴 때 부모 또는 주위의 어른에게 많은 학대를 당한 경우가 많다. 어릴 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학대 - 정서적, 육체적 학대 - 를 당하면,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아를 감춘다.
예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싸이빌'의 주인공은 무려 열네 개의 인격체를 가진 다중인격 인물이었고, 그의 과거는 몹시 불행했다. 소설이지만 '리플리' 역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고 고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변해버린 경우다.
여기서 '불행'이란 단지 가난과 학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어도 좋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고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부자에 권력과 재능이 있는 집안이어도 정서적, 육체적 폭력과 학대를 당하며 성장한 사람은 반사회적 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부모를 살해하는 싸이코패스 범인은 집안이 부자였지만 거침없이 부모를 살해한다.
울리히 모트의 경우도 그가 성장한 배경을 알 수 없기에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런 많은 사례를 통해 그의 어릴적 성장 과정과 집안의 배경이 결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매우 드물지만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심지어 권력까지 가진 인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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