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거의 다 봤다.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 '노아', '마더' 그리고 이 작품 '더 웨일'까지. 어느 장르의 예술 작품이든 주제, 내용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형식도 중요할 때가 있다. 영화에서는 '미장센'이라고도 하는데, '더 웨일'에서는 이렇다 할 '미장센'은 없지만, 필름 포맷 자체가 영화의 특징을 드러낸다.
요즘 영화에서 4:3 포맷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4:3 포맷을 유지한다. 이 화면은 주인공 찰리의 거대한 몸집이 더 커보이는 효과를 만들고, 상대적으로 공간이 비좁게 느껴지는 효과도 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영화가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영화 끝나고 올라가는 타이틀롤에서 사무엘 D 헌터가 쓴 극본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을 영화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각본도 원작자인 사무엘 D 헌터가 직접 썼다.
영화는 돈을 거의 들이지 않은 초저예산(300만 달러)으로 만들었고, 무대는 오로지 낡은 주택의 내부 공간 뿐이다. 등장인물도 주인공 찰리를 포함해 리즈, 엘리, 토마스, 메리 그리고 잠깐 나오는 피자 배달부 댄이 전부다. 연극으로 만들어도 작은 무대와 소품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공간이면 된다.
제목은 중의적 의미를 내재한다. '고래'는 주인공 찰리를 의미하면서, 찰리의 딸 엘리가 쓴 에세이의 주제이기도 하다. 엘리가 어릴 때 쓴 에세이는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 딕'에 관한 내용인데, 딸을 끔찍히 사랑하는 찰리는 엘리가 쓴 이 에세이를 외우고, 딸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믿는다.
엘리의 에세이 첫부분에 주인공 이스마엘과 남태평양 원주민 퀴퀘크가 한 침대에 누웠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건 '모비 딕'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 코드로 읽힌다. '모비 딕'에서 이스마엘과 퀴퀘크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또한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났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래잡이 배를 타고 고난을 함께 한다. 상징으로 가득한 '모비 딕'에서 두 남성이 고난의 여정을 함께 하며, 서로 의지하고, 끝까지 살아남는건 두 사람의 우정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동성애 코드로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허먼 멜빌의 시대에는 동성애를 언급하는 게 금기였고,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라도 사회가 금기한 코드를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었으리라.
찰리가 이 에세이를 자기 목숨처럼 아끼고 좋아하는 이유는 딸 엘리가 썼고, 엘리의 글쓰기 재능이 돋보이기 때문이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에세이의 첫 대목에서 이스마엘과 퀴퀘크가 함께 침대에 누웠다는 내용에서 자신과 죽은 남자친구를 떠올리며, 그때를 그리워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찰리는 대학생들에게 에세이 수업을 한다. 즉, 글쓰기 수업을 하는데, 나도 글쓰기 강의를 한 경험이 있어 조금 더 관심있게 봤다. 찰리는 대학의 종신교수는 아니다. 그는 아마 강사 정도의 수준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기초 글쓰기를 가르치는 걸로 보인다.
찰리는 줌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가능한 솔직하게 쓰고, 써 놓은 글을 많이 고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드러내지 않는다. 이건 자기모순인데, 찰리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솔직하라고 말하는 모순을 보인다. 찰리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는 어떤 결심을 굳힌 다음이다. 그는 초고도비만으로 혐오스러운 자기 모습을 카메라로 보여주면서, 글쓰기도, 대학생활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오로지 자기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솔직하라고 말한다. 이건 찰리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시작부터 거의 끝나기 직전까지 자신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솔직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 작가와 감독은 주인공 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찰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건 관객마다 다르다. 찰리를 동정할 수도 있고, 역겨워할 수도 있으며, 비난할 수도 있다.
찰리는 자기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오래 만나지 못한 딸 엘리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엘리에게 자기가 가진 재산 전부를 주겠노라고 말한다. 12만 달러. 엘리에게는 큰 돈이다. 찰리는 엘리에게 돌이킬 수 없고,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엘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아버지 찰리를 증오한다.
찰리는 엘리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으며, 엘리가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엘리는 자존감이 낮고, 거의 외톨이처럼 보이며,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지만, 찰리는 딸을 온전히 믿으려 한다. 찰리나 엘리는 인간의 다중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어떤 사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불투명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기를 규정하지 못하는 존재,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밑도 끝도 없는 이기적이고 상황에 따라 돌변하는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특히 찰리는 끝까지 스스로 기만한다. 찰리는 집으로 찾아온 딸 엘리와 전처 메리에게 좋았던 시절을 말하고, 자기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솔직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처와 딸을 속이는 건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말이다.
찰리의 집은 엉망진창인데, 오직 방 하나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찰리와 동성애인이 함께 생활할 때, 애인이 쓰던 방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있고, 찰리는 그때를 여전히 그리워하며, 동성애인을 마음에 담고 있다.
전처와 딸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의 삶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동성애인과 함께 지내던 때라는 걸 그 깨끗한 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방과 함께, 찰리가 초고도비만이 된 이유도 동성애인이 자살해서, 그 고통을 잊으려 폭식하고, 죄책감, 죄의식에 대한 대가를 폭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찰리가 진정으로 딸 엘리를 사랑하고, 딸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초고도비만인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 노력해야 할텐데, 정작 찰리는 그런 노력은 하지 않는다. 엘리를 사랑한다는 찰리의 말은 거짓이거나 진심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찰리는 아내와 딸을 두고 새로운 동성애인을 만나 새로운 살림을 차렸다. 딸 엘리는 아버지가 자기와 엄마를 버렸다며 원망한다. 찰리 역시 그때의 자기가 한 짓을 후회하는 말을 한다. 찰리는 자기 내면의 이중성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사람들이 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찰리는 전처와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동성애인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비가 내린다. 여기서 비는 바다를 상징한다. 찰리가 '고래'를 상징하듯, 고래가 있어야 할 곳은 바다이며, 그는 바다에 있을 때만 살아갈 수 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하는 딸 엘리가 있기 때문인데, 엘리가 결국 찰리를 용서하지 않고 떠나려 할 때, 문을 열자 찬란한 햇빛이 비춘다.
여기서 '빛'은 다시 두 가지 메타포다. 고래가 바다를 떠나면 살 수 없듯, 찰리(고래)는 엘리(비)가 떠나면 살 수 없게 된다. 비가 그치고, 빛이 드리우는 찰리의 집안은 찰리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종교적 분위기를 배경에 짙게 드리우지만, 정작 종교는 영화에서 소품에 불과하다. 찰리를 돌보는 리즈는 찰리의 동성애인의 여동생이고, 자기 오빠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오빠가 사랑한 사람인 찰리를 가장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이다.
리즈와 리즈 오빠는 이단으로 알려진, 종말을 믿는 '새생명 교회'의 목사에게 입양된 아이들이었고, 종말론을 믿는 개신교 교회는 사람들에게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회계하라고 말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곧바로 찰리가 동성애 포르노를 보며 자위할 때, 문을 두드린 건 종말론을 믿는 '새생명 교회'의 신도라고 말하는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거짓말을 하고, 종말론과 교회에 질린 리즈의 독설로 사실을 말하는 토마스의 과거는 좀도둑질을 하고 도망나온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엘리의 솔직함 덕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 토마스를 보면서, 거짓말보다는 가혹한 사실이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다.
찰리가 초고도비만으로 혐오스러운 외모를 하고, 동성애자여서 그가 싫은 게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가족을 버린 행위와 그럼에도 딸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끝내 동성애인을 잊지 못하고 폭식으로 자기를 해치는 행위를 보면서, 찰리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찰리가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라면, 엘리는 자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인물이다. 10대의 뜨거운 반항과 충동,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엘리의 내면에서 분노로 들끓고 있기 때문이지만, 엘리가 아버지 찰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태도는 충분히 공감한다.
내가 찰리라면, 엘리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내가 엘리라면 영화에서보다 더 심하게 찰리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혐오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 찰리는 어린 딸과 아내를 버린 파렴치하고, 야비하며, 악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용서'는 찰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찰리를 비난하고, 그를 끝내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찰리가 후회와 자기혐오 속에 죽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선택을 했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찰리는 용서받지 못한 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찰리가 엘리와 전처에게 용서받고자 했다면,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 생각인가를 알아야하겠지만, 찰리는 그걸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여기는 건 인간의 착각이고, 인간이 만든 허구의 이미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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