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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써스펙트

by 똥이아빠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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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스펙트
원제는 The Pledge. 제목의 의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숀 펜 감독의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기는 특징이 있다. 그가 연출에서 주목하는 것은 영화의 줄거리나 이야기의 구성, 스릴러 같은 미장센 보다는-물론 그것도 잘 하지만-사람의 심리 특히 주인공의 심리를 깊게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리 역으로 잭 니콜슨을 선택한 것은 탁월하다. 다 늙어서 한물 간 배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잭 니콜슨은 그러나 그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람'에서 보여준 놀라운 연기만큼은 아니어도 젊었을 때의 감각과는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영화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퇴직을 6시간 남겨둔 형사 제리는 자신의 은퇴 축하파티가 열리는 시간에 어린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그곳에서 잔혹한 장면을 보고, 그 어린이의 부모를 만나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약속한다. 6시간이 지나고, 제리는 경찰에서 퇴직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었지만, 그는 과거 기록을 뒤지며 이 사건이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연쇄살인범의 소행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범인이 적어도 세 명의 어린이가 살해당한 지역에 여전히 살고 있다는 걸 육감으로 느끼고, 범행 장소 근처에 있는 주유소를 구입해 장사도 하면서 오가는 사람들, 차를 주의깊게 살핀다.
 
제리가 다니는 근처 카페에는 딸을 키우며 일하는 여성이 있는데, 그녀가 남편에게 폭행당하고 제리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제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리고 그녀의 8살 딸에게 연쇄살인범이 접근하고, 제리는 그를 잡기 위한 마지막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고, 그를 도와주러 왔던 경찰도 시간이 많이 지나자 포기하고 돌아가고, 어린 크리시가 혼자 있다는 말을 들은 엄마가 달려와 제리를 비난하고 떠난다. 범인을 잡기 위해 딸을 미끼로 내몰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그에 대해 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시간, 연쇄살인범은 운전을 하고 공원으로 오다 트럭과 충돌해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제리는 여전히 주유소를 운영하며 범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지만, 그들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범인을 추적하는 제리의 태도가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제리의 행동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다. 제리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평생 경찰로 복무했다. 그의 퇴직 파티에 경찰서 직원이 많이 참석해 축하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꽤 훌륭한 경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퇴직을 몇 시간 남겨두고, 제리가 자기 책상 앞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그의 삶 전체를 일별한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참전 군인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전역한 이후 경찰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어쩌면 매우 단순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경찰로는 유능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서 가족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딱 한 번, 두 번 이혼했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자식은 있을까.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에게 자식도 없고, 오로지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외로움 사람이다. 이 철저한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연쇄살인범을 끝까지 추적하도록 만든 힘이기도 하다. 제리는 자기 집으로 찾아온 카페에서 일하는 여주인과 아이를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인다. 그건 제리의 마음이 너그럽기도 하지만 그가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녀의 딸 크리스를 내세워 연쇄살인범을 잡고 싶은 제리의 욕망도 내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참고로, 제리가 경찰로 일했고, 평생 살아가는 네바다주는 인구가 3백만 명에 불과한 작은 주다. 면적은 한국보다 넓은데, 인구는 매우 적다. 그나마도 도박으로 유명한 라스베거스가 있어 인구가 늘었는데, 1900년대 초기에는 불과 10만 명 밖에 살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이었다. 
3백만 명의 인구 가운데 대부분이 라스베거스와 주도인 카슨시와 리노에 살고 있는데, 이곳은 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를 잇는 80번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제리가 근무하는 경찰서는 리노 경찰서로, 라스베거스 다음의 큰 도시다. 리노의 베커 카운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제리는 퇴직까지 아직 여섯 시간이 남았다며 사건 현장으로 간다.
 
살해당한 소녀의 부모에게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제리가 맡는데, 다른 경찰들이 하기 꺼리는 일을 퇴직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제리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살해당한 소녀의 부모에게 범인을 꼭 잡겠다고 약속한다. 제리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걸고' 범인을 잡겠다고 맹세하는데,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격앙된 피해자 부모에게 그런 약속을 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는 없고,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범인을 목격한 소년의 신고로 몽타주가 만들어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용의자를 체포한다. 제리의 동료 형사는 용의자를 취조하면서 자백을 받아내고, 구치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용의자가 경찰의 총을 빼앗아 자살한다. 용의자가 자살하면서 사건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제리는 퇴직 휴가를 떠나려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공식 퇴직 시간인 오후12시가 되려면 이제 1분이 남았다. 제리는 시계를 보고, 그가 타려던 비행기는 출발한다. 제리는 휴가를 보낼 비행기를 타지 않고, 피해자 주변 사람을 만난다.
그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동료 형사를 찾아가 네바다 주를 비롯해 다른 주에서 발생한 어린이 살해 하건, 특히 어린 여자아이이면서 백인이고, 금발 머리를 한 피해자가 더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여러 건의 사건이 나타나고, 제리는 연쇄살인범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판단한다.
제리는 동료 경찰에게 자살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며, 진짜 범인은 연쇄살인범이고, 진범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료 경찰은 제리에게 퇴직했으니 휴가를 즐기라고 말하고, 그 사건은 공식 종결했다고 말한다. 동료 경차들이 수사하지 않고,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외면하자, 제리는 혼자 범인을 잡기로 작정한다.
 
제리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모두 투자한다. 범죄 현장 근처에 주유소를 구입해 먹고 살 방안을 마련하고, 시간이 걸려도 끝까지 범인을 잡겠다는 집념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바란대로 범인은 크리스에게 접근하고, 크리스에게 접근한 범인은 친절한 마법사 이미지로 아이에게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공원에서 엄마 모르게 마법사를 만난다는 걸 알게 된 제리는 범인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확신하고 후배 경찰과 함께 매복을 하지만, 범인은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제리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흘러간다. 그는 피해 아이의 부모에게 맹세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겠노라고.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하지만 그는 그가 선 자리에서 꼼짝 못하는 운명에 놓인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맹세는 자신을 구속하는 도구가 된다. 범인은 자동차 사고로 죽지만 제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운명은 누구에게 잔혹하게 작동한다. 그것은 우연이겠지만,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잔혹한 운명에 맞닥뜨릴 확률은 높아진다. 우연으로 발생한 사건이 인간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 영화는 잔혹한 운명과 우연이 결합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허무하다면 허무하지만, 제리의 삶을 천착하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제리보다 나을 것이 있겠는가를 묻는다. 제리는 살해 당한 어린 소녀의 부모와 한 약속을 지키려 다른 어린 소녀를 제물로 만드는 비정하고 부도덕한 짓을 한다. 더구나 그 소녀가 유사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는 딸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제리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제리가 범인을 잡으려 기다리는 시간, 남아 있는 그의 삶은 그에게 형벌과 같다. 그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막연하고 덧없는 기다림 속에서 스스로 자책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건 그가 선택하고, 저지른 비정함에 대한 대가다. 제리는 크리스 엄마의 말대로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가 되었을 수 있고, 동료 경찰이 말한대로 술주정뱅이에 불쌍한 광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이런 모습이 그의 죄책감에서 비롯한 걸까. 그가 잡겠다고 약속한 범인을 잡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의 내면에서 오래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과거가 지금의 그를 만든 걸까. 그는 훌륭한 경찰이었지만, 행복한 개인이 되지 못했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고, 제리의 내면이 어떻든, 사람들은 제리의 행동을 보고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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