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를 보다/미국영화

바빌론

by 똥이아빠 2024. 3. 22.
728x90
바빌론
 
'위플래쉬', '라라랜드'를 연출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 작품. 화려하고 강렬한 장면들이 특징인데, 이 영화에서도 감독의 연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영화 시작과 끝이 화려한 파티 장면인데,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의 파티 장면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듯 보이면서도 우아하면서 퇴폐적인 장면들과 함께 놀라운 음악으로 강렬한 비주얼을 만든다.
영화에서 음악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특히 시작하면서 나오는 파티 장면에서 화려하지만 퇴폐적이고 뒤틀린 군상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파티에서 분위기를 강렬하게 만든다.
 
메타 영화. 영화를 다루는 영화. 과거 영화 가운데 '시네마 천국'을 비롯,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김지운의 '거미집'이 있다. 영화 예술이 자기를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는 발상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한 모험이다. 영화관을 찾는 관객은 새롭고 흥미로운 영화를 보러 오는데, 영화를 만드는 영화는 식상한 소재라는 선입견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매력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관객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메타 영화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영화 역사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서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1920년대 헐리우드 영화 산업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아직 무성영화가 주류이던 시절, 무성영화 배우들과 제작자들은 '유성'으로 영화를 만든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정작 간단한 음악 소리와 자막만으로 영화를 보는데, 영화를 만드는 제작 현장에서는 온갖 소음과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촬영장을 뒤흔든다.
또한 영화 제작 현장은 화려한 컬러로 보이지만, 정작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흑백이다. 이 도치된 장면은 무성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무성영화 시대에 화려함은 배우와 제작자의 몫이었다. 극장에서 흑백영화를 보며 환호하는 관객들은 아직 유성영화와 컬러시네마스코프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에, 흑백의 세계에 머물러 만족한다. 무성영화이면서 흑백영화 속의 배우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관객을 매료하는 존재였으며, 위대한 스타였다. 그들은 목소리가 없고, 컬러가 없었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무성영화의 대스타로, 그의 작품은 흥행이 보장된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모여 거대한 파티를 하는 장소에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와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헐리우드에서 내노라하는 배우, 감독, 제작자 등이 모여 벌이는 파티는 '바빌론'의 재현이다. 이 장면은 스탠리 큐브릭의 '와이드 아이즈 샷'에 나오는 난교 장면을 오마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에서는 음란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다만 '이미지'로 헐리우드의 타락과 음란을 스케치로 보여줄 뿐이다.
파티 뿐 아니라 영화 촬영 현장도 질서가 없고 엉망진창인 상황이다. 배우가 사라지고, 소품이 준비되지 않고, 촬영용 폭탄이 아무 곳에서나 마구 터지고, 들판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소품과 무대를 만들어 동시에 여러 장면을 촬영하고, 엑스트라 배우는 창에 찔려 죽고...
출연할 배우가 사라진 현장에서는 즉석에서 한 여성(넬리 라로이)이 지목되어 연기를 시작하는데, 감독과 제작진 모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연기를 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다.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던 감독은 카메라 필름을 모두 써버리고, 해가 지기 직전에 카메라를 빌려 온 매니 토레스는 잔심부름만 하던 신세에서 연출부로 승진한다.
대스타 잭 콘레드, 떠오르는 스타 넬리 라로이, 자신이 꿈꾸던 영화 산업에 뛰어들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는 매니 토레스는 1920년대 무성영화 전성기를 향유하던 헐리우드에서 성공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영화처럼 화려한 삶, 부와 명성을 함께 누리며 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지만, 머지않아 헐리우드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이들의 삶도 함께 그 변화에 휩쓸린다.
 
유성영화는 혁명이다. 여기에 흑백영화에서 컬러시네마스코프까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로 이어지는 헐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혁명의 시대였다. 소리가 없던 영화에 '동시 녹음'이라는 기술이 나타나고, 배우와 감독은 동시 녹음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성 영화와 흑백 영화의 스타들은 달라진 제작 시스템에서 좌절한다. 소리를 내야 하고, 대사를 하며, 그들의 모습이 컬러로 보인다. 무성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그 모습을 보며 웃는다.
관객이 웃는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무성영화의 배우가 갑자기 영화에서 말을 하는 장면이 놀랍고, 신기하고, 이상하게 보여서 웃는 것일 뿐이다. 관객도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한다. 무성영화의 대스타 잭 콘래드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위상, 배우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걸 경험하면서 좌절한다.
무명 배우 넬리 라로이는 흑백 영화와 무성 영화의 끝부분에 등장해 화려한 삶을 살다 컬러 영화와 유성 영화가 시작하면서 점차 존재감을 잃고 사라지는 존재다. 넬리 라로이와 함께 영화 제작의 세계로 뛰어든 멕시코 청년 매니 토레스 역시 무성 영화 시대에서 연출 재능을 발휘해 크게 성공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그의 처지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세월이 흘러 그가 다시 헐리우드를 찾았을 때, 한때 삶을 불태웠던 영화 스튜디오를 문밖에서 서성이다 오랜만에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본다. 흑백에서 컬러로, 무성에서 유성으로 바뀐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만들었던 흑백 영화, 무성 영화의 추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사람들은 과거를 추억하며 행복한 장면을 떠올린다. 슬프고 괴로운 기억도 있지만, 부정적 기억보다 긍정적 기억이 남는 건 자기 삶을 합리화하려는 무의식적 반응이 아닐까.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키스 장면을 모은 필름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매니 토래스는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며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은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위플래쉬'를 보고 상당히 불쾌했는데, 그 영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후,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평가를 다시 할 생각을 했고,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을 했다.
'라라랜드' 역시 잘 만든 영화지만, 주인공들의 모호한 선택으로 판단을 유보했는데, '바빌론'은 감독의 다른 영화보다 메시지도 분명하고, 내용도 좋았다. 특히 마지막에 무수히 흘러가는 과거의 유명한 영화 장면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바빌론)가 영화 자체를 오마주하는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다.
헐리우드를 '바빌론'으로 비유한 건, 실제 헐리우드의 역사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도시 바빌론의 역사와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락과 음란함으로 타락한 도시 바빌론처럼, 헐리우드도 환락과 음란함으로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반응형

'영화를 보다 > 미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애드의 다섯번째 파도  (0) 2023.11.06
플라워 킬링 문  (1) 2023.10.31
라이어니스 : 특수작전팀  (0) 2023.09.05
'호파'와 '아이리시맨'  (1) 2023.08.31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0) 2023.08.22
오펜하이머  (0) 2023.08.20
미션 임파서블 : 데드 레코닝 파트1  (0) 2023.07.09
레드 로켓  (0) 2023.06.02
3000년의 기다림  (0) 2023.05.19
탑건 : 매버릭  (0) 2023.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