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정재영을 처음 본 건 류승완 감독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깡패로 등장하는 정재영의 연기를 보는 순간, 충격과 감동으로 소름이 끼쳤다. 저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있었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정재영의 연기는 대단했다.
정재영은 어떤 캐릭터를 해도 그 인물로 빙의하는 듯한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 함춘수'라는 인물 역시, 정재영이 아니라 '함춘수' 그 자체인 것 같은, 대단한 연기였다.
김민희는 생각보다 영화에 많이 출연하지 않았는데, 그가 출연한-출연작이 모두 주연이었다는 것이 놀랍지만-영화 열편 가운데 나는 다섯편을 봤다. 김민희는 자칫 특징 없는 배우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는, 눈에 띄는 연기를 보인 적이 드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에서 김민희는 자신의 색깔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배우 김민희 뿐 아니라, 인간 김민희의 모습이 영화에서 중첩되어 보이는데, 물론 김민희는 연기를 하고 있지만, '윤희정'이라는 인물과 배우 김민희에게서는 거의 같은 인물인 것 같은, 그래서 '윤희정'이라는 캐릭터가 곧 김민희 그 자신으로 환원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함춘수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윤희정과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까를 고민했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윤희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많이 궁금해졌다.
'함춘수'는 감독 홍상수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관객은 대개 알고 있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거의 모두 영화감독이고, 그것은 감독 홍상수의 페르소나이며, 홍상수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사건들을 변주하는 방식으로 '비슷한' 영화들이 생산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도 여자 주인공은 등장하지만, 그동안 그 인물에 대한 배경과 관심이 컸던 적은 드물다. 기존의 영화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관계'에 더 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 역시 두 사람의 '관계'가 주제이긴 하지만, 유독 '윤희정'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은 아마도 '김민희'라는 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민희는 성장하는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배우다. 그는 모델로 시작했는데, 영화 초기와 최근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성형수술을 한 것인지, 자연스러운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김민희의 외모는 자연스럽고 보기 좋다.
두 사람의 연기는 훌륭했고, 두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고, 재미있었다. 영화는 영화다. 사실 홍상수의 영화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늘 실패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홍상수 영화에서 홍상수는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인'을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돼지가...'의 충격적인 반전은 영화가 가진 드라마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임에 분명하다. 이후 홍상수의 영화는 데뷔작과는 달리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의 작품은 '일상의 변주'이자 '리얼리즘의 재현'인데, 홍상수의 리얼리즘은 영화에서 '초현실주의'로 드러난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민낯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전략이긴 하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대개 형식에 갇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쩌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지 말아달라는 감독의 의도가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홍상수의 영화는 초기와는 다르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민낯의 뻔뻔스러움과 날것의 감정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지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홍상수 영화는 '시시한 일상 따위'나 그리고 있어 형편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홍상수의 일관된 작업은 한국영화는 물론 세계영화에서도 독특한 의미가 있긴 하다. 물론 홍상수 영화가 '걸작'은 아니다. 대작도 아니고,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영화는 사회의 반영'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경우, 홍상수의 영화는 그런 면에서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미학적'인 면에서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니, 앞으로 홍상수의 영화가 어떻게 읽힐 지는 두고 볼 여지가 많다. 별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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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영화감독 함춘수는 수원에 하루 일찍 내려간다. 다음날 특강을 기다리며 들른 복원된 궁궐에서 윤희정이라는 화가를 만난다. 둘은 윤의 작업실에 가서 윤의 그림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회에다 소주를 많이 마신다. 거기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 다른 카페로 이동한 두 사람은 술을 더 마신다. 거기서 누군가의 질문 때문에 함은 자신의 결혼한 사실을 할 수 없이 말하게 되고, 윤은 함에게 많이 실망하게 된다… 이런 비슷한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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