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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데쓰 프루프

by 똥이아빠 2021. 9. 20.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B급 정서가 화려하게 폭발한 영화.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과 함께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들이 어려서 봤던, 극장에서 동시상영을 할 때 보던 바로 그 영화. 저예산으로 만들었고 화려하지만 어설픈 액션이 폭발하는 B급 영화.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플래닛 테러'를 만들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데쓰 프루프'를 만든다. 저예산으로 만들고, 형식은 세련하지 않지만, 과거 B급 영화가 보여주었던 흥이 폭발하는 정서를 담아보자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과거 B급 영화는 저예산으로 만들어 조악한 품질과 폭력, 섹스가 난무하면서 마초적이고 남성우월주의, 가부장 질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B급 영화의 정서와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내용은 전복시킨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싸이코패스 '스턴트맨 마이크'는 여성들만 골라서 자동차로 살해하는 악마같은 인간이다. 그는 스턴트하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대역을 하며 타고 다니는 자동차인 '데쓰 프루프'를 타고 다니며 자동차 사고로 위장해 여성들을 살해한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극명하게 나뉘는데, 전반부는 여성의 참혹한 죽음이, 후반부는 여성의 복수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이 남성 살인마를 상대로 복수를 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영화는 B급 영화의 형식을 띄고 있을 뿐, 정확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질서를 전복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라디오 디제이 정글 줄리아는 친구들과 신나는 파티를 하러 간다. 이제 막 라디오 디제이로 이름을 알리고, 높은 인기를 얻기 시작한 정글 줄리아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스타가 되어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무엇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특기이자 장기인 화려한 수다와 대사의 핍진함 그 자체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다. 거의 공백 없는 대사와 수다를 통해 인물의 서사를 쌓아나가는 방식은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구체적 장치다.

이 방식은 두 가지 효과를 노리는데, 관객이 인물의 서사를 많이 알게 함으로써 인물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한 다음, 그 인물을 갑작스럽게 제거하는 방식으로 더욱 큰 충격을 느끼게 한다. 

정글 줄리아는 친구들과 동행하면서 가게와 술집에 들르는데, 그때마다 한 남자가 자기 일행을 뒤쫓고 있음을 느낀다. 남자는 처음에 은밀하게 지켜보더니 차츰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술집에서 정글 줄리아 일행에게 접근한 스턴트맨 마이크는 그들과 헤어지면서 정글 줄리아의 친구를 차에 태운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차에 타는 순간 스턴트맨 마이크는 태도가 돌변한다.

그는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을 함부로 대하듯, 칸막이에 갇힌 여성을 학대한다. 이 장면은 자동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저항할 수 없는 여성을 우리에 가두고 학대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자동차 내부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스턴트맨 마이크는 곧바로 정글 줄리아 일행이 탄 차를 뒤쫓는다.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파티할 생각으로 들떠있는 정글 줄리아와 친구들은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국도를 달리고, 스턴트맨 마이크는 정글 줄리아가 탄 차보다 먼저 앞쪽에 도착해 이들이 가까이 올 때를 기다린다. 전조등을 끄고, 저 멀리 직선도로에서 정글 줄리아 일행의 차가 달려오는 걸 본 스턴트맨 마이크는 출력을 최대로 높이면서 질주한다. 그리고 정글 줄리아 일행의 차와 충돌하기 직전 갑자기 라이트를 켜고, 자동차 두 대는 극적으로 충돌하면서 완전히 파괴된다.

이때, 충돌 장면은 정상 속도의 장면과 슬로모션을 번갈아가며 여러 번 보여준다. 이 장면을 두고 여성 혐오를 의도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인 여성들의 사지가 찢겨나가고, 온몸이 참혹하게 갈리는 장면이어서, 보안관의 말을 빌면 '거인이 씹다 뱉은' 끔찍한 장면인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단역이긴 하지만, 스턴트맨 마이크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를 찾아온 두 명의 보안관(아버지와 아들이다) 가운데 아버지 보안관이 추측한 내용이 정확하게 맞았지만, 정작 스턴트맨 마이크를 범인으로 잡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14개월이 지나고, 스턴트맨 마이크는 완치되어 테네시주 레바논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연이지만 한 가게 앞에서 세 명의 여성이 탄 차를 발견한다. 이때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어 있다. 줄곧 컬러 화면으로 보고 있던 관객이지만, 이 짧은 장면이 흑백이었다는 걸 의식하기는 쉽지 않다. 스턴트맨 마이크가 애버나시의 발가락을 핥는 변태행위를 한 다음 차를 빼서 사라졌다가 잠시 뒤 다시 길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 화면은 다시 컬러로 바뀐다. 이 짧은 흑백 장면이 특별히 의도하는 바는 없지만, B급 영화들이 필름을 이어붙여 촬영을 했던 추억을 보여준다. 화면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줄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 효과다.

조이가 합류하면서 애버나시, 킴, 리까지 네 명의 여성은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있지만, 잠깐 시간을 만들어 휴가를 즐기고 있다. 코디네이터, 배우, 스턴트우먼으로 구성된 네 명의 여성은 자동차 안에서나 레스토랑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스턴트맨 마이크는 조이 일행의 뒤를 쫓으며 망원 렌즈로 사진을 찍는다. 조이 일행이 식당에서 밥 먹으며 신나게 이야기 할 때, 아주 잠깐 카운터 자리에 앉아 있는 스턴트맨 마이크의 뒷모습이 보인다. 조이 일행은 닷지 챌린저 440엔진 70년형 흰색 차를 파는 남자를 찾아가 시운전을 해보겠다고 흥정한다. 이 차는 영화 '배니싱 포인트'에 나오는 차로, 닷지 챌린저 시리즈의 1세대에 해당하는 쿠페 모델이다. 

 

조이와 킴은 평소 해보고 싶었던 '배의 돛'을 하는데, 스턴트 배우들이라 매우 위험한 자동차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이때 스턴트맨 마이크가 나타나 조이가 매달린 차를 뒤에서 들이박는다. 자동차 보닛에 조이가 매달린 채 빠르게 달리는 장면을 컴퓨터그래픽 없이 실제로 달리면서 촬영했다. 그래서인지 현실감과 긴박감이 대단하다.

계속 밀어부치는 스턴트맨 마이크의 차로 조이 일행은 죽기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까지 내몰린다. 이때 스턴트맨 마이크는 짐승을 사냥하는 것처럼 여성들을 사냥하고 있다. 사냥감을 뒤쫓으며 쾌감을 즐기는 사냥꾼의 심리처럼, 남성 스턴트맨 마이크는 여성을 사냥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그러다 자동차가 부딪쳐 멈추고, 조이가 앞쪽 풀숲으로 날아간다. 스턴트맨 마이크는 적어도 여성 한 명이 사망한 것이라 확신하고 즐거워하며 사라진다. 이때 킴이 총을 쏴 스턴트맨의 팔을 맞추고, 이때부터 상황은 역전된다.

 

스턴트맨 마이크는 팔이 부상당하고, 뒤쫓아온 조이 일행에게 쫓기는데, 이때 킴이 운전하면서 하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킴이 하는 말은, 그동안 남성, 특히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여성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 '엉덩이를 흔들어', '뒤에서 박아줄까' 같은 말은 자동차 액션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평소 되먹지 못한 남성들이 여성을 성희롱, 성추행할 때 쓰는 말과 같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스턴트맨 마이크는 죽기살기로 도망하고, 그 뒤를 역시 만만찮게 쫓아가는 조이 일행. 스턴트맨 마이크는 자기 뒤를 쫓는 여성들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인지 몰랐다가 마침내 뒤쫓아온 조이 일행에게 사과한다. '장난이었다'고. 이 말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남성들이 여성을 추행, 희롱, 폭행한 다음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스턴트맨 마이크는 겨우 조이 일행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안심하지만, 조이 일행은 옆길로 달려와 스턴트맨 마이크의 차를 들이받아 멈춰 세운다. 그리고 차안에서 울부짖는 스턴트맨 마이크를 끌어내 셋이 통쾌하게 폭행한다. 이 장면은 영화사에서도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세 명의 여성이 싸이코패스, 살인자, 여성혐오자를 때려죽이는 멋진 복수 장면이다. 

이 살해 장면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스턴트맨 마이크가 저지른 악행을 관객은 이미 알고 있고, 그동안 수많은 남성 범죄자들에게 당한 여성들의 죽음과 피해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점에서, 이 정도 참혹함은 얌전한 표현이라는 걸 의미하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B급 영화 형식을 빌려 가장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를 만들었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희생당한 여성에 대한 복수이자, 남성 일반에 보내는 경고의 내용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담은 것은 물론, 영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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