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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시리어스 맨

by 똥이아빠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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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 맨

 

코엔 형제 작품.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설파했던 것은 지혜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멀리서 바라보는 산과 자연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숲으로 들어가면 온갖 벌레와 동물들이 우글대는 위험한 곳이라는 말과도 같다. 즉, 미시적으로 접근할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어느 정도 굴곡은 있을 지라도, 대체로 무난한 삶을 살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제3자가 보기에 드라마틱하고 우여곡절이 심한 삶이란 어떤 경우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인트로는 아주 짧은 우화를 보여준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는 교훈이 등장하고, 유대인 부부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거위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눈길에 빠진 마차를 뺄 수 있도록 도와준 랍비의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는 그가 이미 3년 전에 죽은 사람이며, 악령과 이야기를 해서 저주를 받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 랍비가 문을 두드리고,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던 랍비의 가슴에 여자가 얼음송곳을 꽂는다. 송곳이 가슴에 꽂힌 채 랍비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로 나가고, 여자는 악령을 물리쳤으니 신이 축복할 거라고 말한다.

 

주인공 래리의 삶은 어떨까. 그는 미네소타주에 있는 작은 대학의 물리학 교수다. 1967년의 미국의 작은 도시는 소박하다. 래리는 유대인으로, 유대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안정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과거 삶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그가 지금 '대학교수'이며, 곧 '종신재직권'을 부여받을 정도로 대학에서 신임을 얻고 있다는 것 분명한 사실이다.

래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론이나 '불확정성 원리' 같은 물리학과 수학 이론을 가르치는데, 물리학 교수가 될 정도면 상당히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그의 남동생은 좀 아둔하고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동생은 신장투석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도박, 음주, 동성애 같은, 당시로는 금기였던 행위를 하다 경찰에 체포당한다. 동생은 '모든 재능은 형에게만 주고 자기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항의하는데, 래리는 그 재능만큼 불운도 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학을 수강하는 학생 가운데 한 명이 래리에게 성적 이의 신청을 한다. 그 학생은 한국인으로, Clive Park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중간고사 성적이 나빠서 F학점을 받았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따지러 온 것이다. 사실, 이 학생의 주장은 터무니 없고, 무례하다. 자기가 실력이 없어서 시험을 못 보고는 교수에게 성적을 올려달라고 말하고 있다. 래리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학생은 '망했다'면서 래리의 방을 나가는데, 봉투가 하나 남는다. 그 봉투에는 무려 3천 달러가 들어 있다. 1967년에 3천 달러는 매우 큰 돈이다. '클라이브 박'의 집이 상당한 부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내는 래리에게 이혼하자고 선언한다. 래리의 친구이기도 한 '사이'라는 남자와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래리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이혼 선언에 황당한데, 아내는 래리를 비난한다. 래리의 딸은 지갑에서 돈을 조금씩 훔치고, 래리의 아들은 비싼 레코드판을 구입하면서 아버지의 계정으로 결재하고, 래리의 동생은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닌다. 래리의 이웃 사람은 집과의 경계를 놓고 래리의 신경을 건드린다. '클라이브 박'의 아버지가 찾아와 합격 점수를 주지 않으면 래리를 고소하겠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 아내가 결혼하겠다던 '사이 에이블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사이'의 장례비용을 래리가 내야 한다. 게다가 아내는 부부공동명의의 은행계좌에 있던 돈을 다 빼내갔다.

래리는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드는 불행을 두고 랍비를 찾아가 상담하지만, 랍비라는 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다. 최고의 랍비 마샥을 만나려 하지만, 만날 수 없고, 래리의 아들이 마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샥은 딱 한 마디를 한다. '착하게 살아라.'

 

래리는 경찰에 체포된 동생의 변호사 선임비용 편지를 받아보고는 '클라이브 박'의 점수를 고친다. 대학에서는 래리의 '종신재직권'이 통과되었음을 알리고, 아내와 결혼하겠다던 '사이'는 교통사고로 죽고, 래리 앞으로 밀려오던 불행과 고통이 이제는 자기 뒤로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며 안도하는데, 검강검진을 한 의사의 전화가 온다. 태풍이 밀려온다는 예보와 함께 먹구름이 일고, 바람이 불어온다.

 

래리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럴 것이, 유대인 공동체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동체가 지양하는 규율을 잘 따라야 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내면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듯하게 생활하면서 머리도 좋아 물리학 교수가 된 래리는, 결혼하고, 아들과 딸도 둔 중산층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삶일까. 무사하고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삶의 나날이 이어지는 래리의 삶은,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자신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유대인 공동체 밖에서의 삶은 상상도 하지 않으며, 익숙하고 낯익은 공간에서 애벌레처럼 살아가는 래리의 삶은 그의 동생 아서와는 사뭇 다르다. 아서는 형에게 모든 재능과 행복을 빼앗겼다고 말하면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금기한 짓들을 골라서 한다. 도박, 음주, 동성애 같은, 그들에게는 금기지만,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일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늘 진지하고 반듯하게만 살려는 래리의 삶은 그래서 답답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는 옆집에 이사 온 여성에게 접근하고, 불륜을 상상하지만,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다. 래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의 삶은 늘 진지하고, 세상은 온통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 그것을 해야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 특별한 취미도 없으며, 주변 사람들과 농담을 나누지도 않고, 학교에서도 거의 외톨이처럼 혼자이고, 이웃에도 가까운 친구가 없고, 보통사람들처럼 저녁에 술집에서 맥주 한 병 놓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과 학교, 학교와 집을 오가는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래리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말할 때도, 이혼하자고 말할 때도 래리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웃지 않는 만큼, 화 내지도 않는다. 즉, 감정을 표현하지 않거나, 못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이혼변호사 앞에서였다. 그것도 잠깐.

 

세상을 진지하게만 살려는 사람은 멀리서 바라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다. 그는 도덕적이고, 사회질서를 잘 지키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회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래리의 삶이 그렇다. 그는 대학교수로, 실력 있는 물리학 교수이며, 중산층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두 자식과 잘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지만, 정작 래리의 내면은 바삭하게 메마르고, 그에게는 생활만 있을 뿐, '삶'이 없는 것이다.

마치 폭풍처럼 그의 앞에 한꺼번에 나타난 문제들 - 뇌물봉투, 아내의 이혼 요구, 아내 남자친구의 죽음, 딸과 아들이 만드는 자잘한 사고, 동생 아서의 체포와 변호비용 등 - 이 그를 혼란하게 만들지만, 래리는 어떻게든 그 폭풍을 뚫고 나온다. 그렇게 이제 안도의 숨을 쉬려는 순간,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그를 다시 '심각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에게 닥쳤던 폭풍 같은 문제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암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래리는 이제 어떤 표정으로 더 큰 폭풍을 맞게 될까. 우리의 인생은 폭풍을 견디는 것 뿐만 아니라,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는 순간의 연속일 수 있다. 그 파도가 크고 작으냐의 문제일 뿐. 

그래서 래리의 삶은 불쌍하고, 래리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래리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지금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생 나쁜 짓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에게 닥친 것이 아주 좋지 않은, 불행한 결과라면, 그의 삶은 과연 무엇일까. 단지 불행은 우연일 뿐이고, 누구에게나 일정한 확률로 발생하는 경우의 수에 불과하다면, 래리처럼 진지하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도 래리에게 진지하게 인생을 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래리는 그래서 억울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심지어 래리 자신의 잘못도 없기 때문에, 래리의 인생에 찾아온 불행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막연하고 답답한 상황이다. 코엔 형제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와 아이러니의 연속. 평생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인간도 있지만, 대부분 래리처럼 닥쳐오는 불행에 맞서 싸우다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인간은 모순된 동물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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