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레보스키 - 코엔형제
주말 저녁, 아무 일도 없는 휴일이 기다리고, 느긋하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 마음이 잘 맞는 친구 두세 명과 맥주를 마시며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다.
코엔 형제가 던지는 농담을 낄낄거리며 듣다보면 영화는 어느새 끝나 있다. 코엔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작은 역을 맡은 인물이라도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캐릭터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라는 점이 독특하다. 보통은 '이야기' 즉 '서사'를 미리 구축하고 서사에 맞는 캐릭터를 생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코엔 영화의 특징은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며 '서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존 터투로를 예로 보자. 이 작품에는 코엔 형제들과 함께 하는 '코엔 사단'으로 불릴 만큼 코엔 영화에 자주 나오는 배우들이 거의 다 출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지저스 퀸타나'(존 터투로)는 이 영화에서 단역인데, 볼링장에서 듀드(제프 레보스키의 별명) 팀과 상대하는 볼링팀의 멤버다. 그는 볼링장에서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우아한 몸짓으로 볼링공을 던지는데, 이 장면을 보면 문득 그가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감독은 어떤 암시도 하지 않지만, 단지 존 터투로의 연기만으로 암시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런 장면은 영화의 내용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다시 생각하면, 코엔의 영화는 이런 엉뚱한 장면들이 모여서 한편의 영화로 완성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듀드 삼총사 가운데 하나인 '도니'(스티브 부세미)는 자주 나오기는 해도 잠깐 나와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존 터투로와 비교하면 오히려 비중이 낮은 편에 든다. 비슷하게 상류층의 집사인 브랜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포르노 배우 울리(피터 스토메어)도 이 작품에서는 비중이 적은 배역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90년대 로스엔젤레스에 제프 레보스키(제프 브리지스)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듀드'라고 불러달라고 말하고,스스로도 듀드라고 말하는 남자다. 그는 백수인데, 뭘 해서 먹고 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는 결혼한 적도 없고, 가까이 지내는 가족도 없으며,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괴한이 쳐들어와 듀드에게 '네 마누라가 빌려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아끼는 양탄자에 오줌을 싸고 사라진다. 황당한 듀드는 볼링장에서 친구인 월터(존 굿맨)와 도니(스티브 부세미)에게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고, 양탄자 값을 받아야 한다고 하소연한다. 듀드는 괴한들의 말을 종합해서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레보스키'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가는데, 신기하게도 이름과 성이 똑같은 동명이인이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고, 그는 매우 부자였다.
제프리 레보스키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이었는데,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자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이었다. 듀드는 '댁과 내 이름이 같아서 내가 피해를 봤으니 변상을 해달라'고 말하지만, 제프리 레보스키는 건달들은 때려잡아야 한다는 단호한 보수주의자여서 그냥 쫓겨나고 만다. 그 와중에 듀드는 집사인 브랜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에게 '회장님이 아무 양탄자나 가져가라'는 거짓말을 하고 고급 양탄자를 자연스럽게 들고 나온다.
그러다 수영장에서 젊은 여성을 만나는데, 그녀가 제프리 레보스키의 아내 '버니'(타라 레이드)였다. 듀드는 동네 볼링 리그전을 치르고 있어서 세 친구가 자주 만나게 되고, 월터와 도니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월터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월터는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로, 다혈질에 원칙주의자이며 감정조절을 못하는 인물인데, 그건 그가 전쟁터에서 생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이런 세부적인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은 인물의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인물이 발화하는 단어와 문장을 통해, 그 사람의 전인격을 이해해야 하는데, 코엔 형제의 작품에서는 이런 디테일이 잘 살아 있어서, 인물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월터는 커다란 덩지에 다혈질로 언뜻 난폭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다. 그는 삼총사 가운데 가장 박식하며, 유대인으로(이건 코엔 형제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삽입한 설정으로 보인다) 종교적 행사를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듀드는 어떻든 새 양탄자 - 예전 양탄자보다 훨씬 고급한 물건이다 - 가 생겨서 기분이 좋고, 딱히 손해본 것 없으니 이 정도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제프리 레보스키가 전화해서 보자고 하고, 듀드가 찾아가니 아내 버니가 납치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범인들이 보낸 협박편지를 보여주고, 100만 달러를 범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아내 버니를 찾아오면 수고비로 2만 달러를 주겠노라고 말한다. 듀드는 당연히 승락한다.
이제 사건은 점차 복잡해지고, 인물들과의 관계는 꼬이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 작은 일로 시작해 점차 복잡하고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는 코엔 형제 특유의 서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듀드는 버니 납치사건이 버니 스스로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근거로 버니가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갚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것, 양아치들이 돈을 받으러 버니를 쫓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듀드는 월터와 도니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2만 달러를 쉽게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듀드와 월터는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차에 싣고 범인들이 말한 장소로 향하는데, 월터는 듀드와 상의도 없이 가짜 돈가방을 만들어 그 가방을 범인들이 말한 장소에 던진다. 범인들은 가짜 돈가방을 갖고 사라지고, 제프리 레보스키가 준 돈가방은 차에 있었는데, 그나마도 볼링장 주차장에 있던 차가 도난당해 사라진다.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듀드는 경찰에게 차량 도난신고를 하지만, 돈가방 이야기는 빼놓는다.
그리고 다시 갑작스러운 괴한의 난입으로 기절한 듀드. 깨어보니 양탄자가 사라졌다. 양탄자를 가져간 사람은 마우드 레보스키로 제프리 레보스키의 여동생이었다. 듀드는 마우드의 작업실로 찾아가고, 마우드는 행위예술가, 페미니스트로 자신의 캐릭터를 설정한 인물이었다.
듀드는 마우드를 통해 제프리 레보스키의 실제 상황을 알게 된다. 부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자기 재산은 거의 없는 인물이고, 제프리의 아내 버니는 색정증 환자로 과거 포르노 영화배우였다는 것까지.
그러면서 듀드에게 치료를 해줄테니 의사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마우드를 만나고 오자 제프리 레보스키가 잘린 발가락을 보여주며, 돈을 찾아오지 못하면 버니가 죽을 거라고 말한다. 잘린 발가락을 보고는 듀드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때 경찰이 도난 차량을 찾았다고 연락하고, 차에는 당연히 돈가방이 있을 리 없다. 10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둘러싸고 이미 소문이 퍼졌고, 버니에게 받을 돈이 있다는 포르노 영화 제작자 재키 트리혼에게 끌려가 돈가방을 찾아오면 수수료로 10%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듀드는 재키 트리혼과 마우드 제프리스가 포르노 영화 제작을 하는 동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버니는 그들이 만든 포르노 영화에 출연했고, 어쩌다 제프리 레보스키의 아내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마우드의 계획이 아니라면, 제프리 레보스키가 직접 구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마우드는 듀드를 찾아와 임신을 위한 섹스를 하고, 마우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프리 레보스키가 처음부터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즉, 버니가 사라지자 제프리 레보스키는 아내 버니가 납치되었다고 발표하고, 그가 이사로 있는 재단에서 100만 달러를 인출한다. 돈가방을 듀드에게 건네지만, 그 가방에 돈이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즉 돈을 처음부터 빼돌린 것이다. 실제 납치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제프리는 버니가 집을 나가 며칠 돌아오지 않자 납치 계획을 세웠고, 버니가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듀드가 제프리의 집을 찾아가자 버니는 멀쩡하게 돌아와서 신나게 자기 삶을 즐기고 있었다. 듀드를 계속 미행하던 사립탐정 다 피노(존 폴리토 : 조연이지만 꽤 인상적인 연기를 한다. '아메리칸 갱스터'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주로 텔레비전 시리즈에 많이 등장한다)를 붙잡은 듀드에게 버니의 부모가 버니를 찾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제 버니는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제프리의 집에서 계속 살아갈까.
듀드 일행은 볼링장 주차장에서 허무주의자 그룹인 울리 일행과 한바탕 난투극을 벌이는데, 여기서 도니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다. 듀드와 월터는 도니의 시신을 화장해 바닷가 절벽에서 뿌린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잔잔한 듀드의 일상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쳤고, 친구 도니가 갑자기 죽은 것만 빼면, 듀드의 일상은 다시 잔잔한 삶이 되었다. 그는 볼링장에 가서 볼링을 하고, 가끔 대마초를 하고, 어쩌면 글을 쓸 지도 모르겠다. 알고보면 듀드는 지식인이고, 과거의 삶에서 뭔가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의 흐름 속에서 듀드는 마우드가 임신하게 되면 전혀 뜻하지 않게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건의 연속이고, 그래서 재미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미래는 모두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삶은 조금 더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하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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