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의 왕
마틴 스코시지 감독 작품. 오래 전 이 영화를 보고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영화를 읽는 총체적 지식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만 마틴 스코시지 감독 작품인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를 봤고, 이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 '코미디의 왕'도 내가 잘 모르지만 뭔가 훌륭한 작품일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본 '코미디의 왕'은 역시 뛰어난 감독의 훌륭한 작품이었다.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연출은 정통 드라마 방식이라서 오히려 이 영화의 비극성과 블랙코미디를 돋보이게 만든다.
루퍼드 펍킨은 백수다. 그는 이제 서른 한 살이 되었고, 변변한 직업이 없으며, 돈을 벌지도 못하고 있지만, 반듯한 슈트를 입고, 가방을 들고 방송국 앞으로 출근한다. 최고의 쇼를 진행하는 제리 랭포드 쇼의 주인공 제리 랭포드를 만나기 위해서다. 방송국 앞에는 제리 랭포드를 보고 싶은 팬들로 발디딜 틈이 없고, 아이돌보다 더 인기가 많은 제리 랭포드는 그런 팬들에 둘러싸여 난감한 상황이다. 빨리 차에 타고 싶지만, 팬들은 제리를 쉽게 놔주려 하지 않는다. 겨우 차에 도착하지만, 차안에는 기괴한 표정을 한 여자(마샤)가 제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루퍼드가 제리 주변에 있는 극성팬들을 밀어내고, 차안에 있던 여성을 끌어낸 다음, 제리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제리를 따라 차에 오른다. 제리는 이런 상황이 싫지만, 5분만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루퍼드의 말을 믿고, 차를 출발한다.
루퍼드는 제리의 팬이라고 말하고, 제리가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자기도 잘 할 수 있으니,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제리는 과거에도 이런 말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정중하게 '비서를 찾아오면 연기를 봐주겠다'고 말하고 루퍼드를 떼어 놓는다.
루퍼드 펍킨은 대스타가 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제리 랭포드가 루퍼드에게 쇼에 나와달라고 부탁하는 처지가 되었고, 루퍼드는 시간이 없어서 쇼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들의 대화 사이에 루퍼드의 엄마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이 장면이 루퍼드의 상상이라는 걸 관객은 알게 된다.
루퍼드는 한 주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일하는 바텐더 리타를 만나러 간 것인데, 리타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 한참 보고나서야 루퍼드 펍킨이라는 걸 알아본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리타와 루퍼드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루퍼드는 변변한 직업 없이 '스타'를 꿈꾸며 사는 백수이고, 리타는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루퍼드는 학생 때부터 리타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건 학창시절에도 루퍼드는 인기 없는 학생이었고, 주변에서 맴도는 '아웃사이더'라는 걸 뜻한다. 리타가 일하는 주점을 찾아온 것은 루퍼드가 졸업 이후에도 줄곧 리타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뜻이고, 우연인 척 하지만, 루퍼드는 리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루퍼드는 리타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하고, 리타도 동의한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루퍼드는 리타에게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름을 대보라고 말한다. 리타가 '마릴린 먼로'라고 말하자 루퍼드는 커다란 싸인북을 꺼내 '마릴린 먼로'의 싸인을 보여준다. 그 싸인북에는 유명한 영화배우의 싸인이 가득했는데, 그건 루퍼드가 스타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싸인을 받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 싸인북에서 복잡한 싸인을 발견한 리타는, 싸인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 루퍼드는 자기 싸인이라며 그 싸인을 찢어 리타에게 건넨다. 리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루퍼드를 바라보는데, 루퍼드의 자뻑과 일방적인 태도가 부담스럽다.
루퍼드는 제리의 사무실에 전화한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그곳에서 답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그의 기대는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루퍼드는 제리의 사무실을 찾아가고, 제리의 비서를 만난다. 제리의 비서는 '테이프가 있느냐'고 묻는다. 오디션을 보기 위한 기본 자료로, 자신의 연기를 보여줄만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건 기본인데, 루퍼드는 그런 기본적인 포트폴리오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루퍼드는 '테이프(오디오 테이프)가 있다고 말하고, 당장 내일이라도 제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루퍼드에게 그런 오디오 테이프가 있을 리 만무지만, 루퍼드는 당장 집으로 돌아와 녹음을 해서 테이프를 만든다. 그리고 다음 말, 다시 비서를 만나 테이프를 전달한다.
루퍼드의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떤 면에서는 매우 순진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런 순진함이 때로는 엽기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루퍼드는 매우 집요하고 끈질긴 태도를 보이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루퍼드를 이상하게 여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루퍼드는 자주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그는 이미 대스타였고, 제리와 매우 친한 친구이며, 제리와 함께 방송을 공동 진행하고 있고, 자신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방송에 나와 리타와의 결혼식 주례와 피아노 반주를 해주는 등, 평소 루퍼드가 가지고 있었던 소망을 실현한다. 이 상상 장면은 현실과 다르지 않다. 즉, 상상과 현실이 루퍼드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동기화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퍼드는 상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곧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루퍼드에게 비극이지만, 루퍼드는 그것이 비극인지 모르고,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루퍼드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테이프가 비서에게 거절당하고, 제리의 사무실을 찾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루퍼드 펍킨의 이름을 틀리게 부른다. 사람들이 루퍼드의 이름을 바르게 부르지 않거나 못하는 건 단지 이름이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루퍼드의 존재가 그들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이름'은 존재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름이 올바르게 불려지지 못한다는 건 그의 존재가 그만큼 희미하다는 증거다.
결국 루퍼드는 제리의 사무실에서 쫓겨난다. 루퍼드는 제리가 자기를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고 - 루퍼드의 상상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 리타와 함께 제리의 집을 방문한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며칠을 묵겠다고 생각하고, 트렁크까지 가져간다. 당연히 제리의 집을 관리하는 집사가 제리에게 연락하고, 제리가 돌아와 루퍼드에게 화를 내며 쫓아낸다. 리타는 이미 눈치 채고 화가 나서 혼자 나가버린다. 리타는 다시 루퍼드에게 속았고, 일말의 기대를 했던 자신의 속물성에 짜증이 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루퍼드는 제리가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제리의 열렬한 팬인 마샤와 함께 제리를 납치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제리를 납치한다. 다만 제리를 납치하는 목적이 돈을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리의 방송 시간에 루퍼드가 잠깐 무대에 선다는 조건이었다.
제리를 마샤의 집에 묶어두고, 루퍼드는 방송국으로 향한다. 이미 FBI와 경찰이 그를 쫓고 있었고, 그가 방송국에 나타나자 FBI와 경찰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범인이 제발로 나타난 것에 기뻐한다. 루퍼드는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방송 출연을 제안하고, 우여곡절 끝에 루퍼드는 소원이었던 제리쇼에 출연한다.
묶여 있던 제리는 마샤와 둘이 있게 되는데, 마샤는 제리를 유혹하고, 제리는 묶인 걸 풀어주면 원하는대로 하겠노라고 제안한다. 마샤가 제리를 풀어주자 제리는 마샤를 한 대 때리고 탈출해 방송국으로 향한다. 마샤는 제리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샤의 집이 부유해서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마샤의 부모는 부유하지만, 마샤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자란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루퍼드는 생방송 출연을 마치고 경찰과 함께 리타의 술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리타가 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을 켜고, 방송에 출연한 자신의 모습이 나오는 걸 리타와 함께 시청한다. 루퍼드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결과로 보면 성공이다. 사람들이 많이 웃었고, 루퍼드 역시 침착하고 재미있게 공연을 마쳤다.
다만, 루퍼드가 한 코미디의 소재가 루퍼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한 것이고, 그의 현재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과거 루퍼드의 삶이 드러난다. 루퍼드는 뉴저지주 클리프턴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곳은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 마을이다.
루퍼드의 엄마는 알콜중독자였고,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다. 루퍼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랐고, 동네 아이들에게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도 맞으며 살았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루퍼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비극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슬픔을 웃음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이것은 루퍼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개그'라고 볼 수도 있지만, 루퍼드가 자신의 삶을 극복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루퍼드가 보였던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집착과 광기 비슷한 행동은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든 대중에게 전달하고픈 강렬한 열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루퍼드는 줄곧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쇼 비즈니스'라고 말한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는 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다. 만약 루퍼드가 이 마지막 부분까지를 생각하고 이 모든 일을 행동에 옮겼다면, 그는 뛰어난 천재인 것이고, 뒷부분이 우연의 결과라 해도 루퍼드가 생각한 '쇼 비즈니스'는 성공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루퍼드는 결과적으로 옳았고, 그가 바라는대로 된 것이다.
생방송으로 공연을 마치고 루퍼드는 납치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6년형의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다. 그는 감옥에서 회고록을 썼고, 원고료로 100만 달러를 받는다. 그리고 2년 9개월을 복역하고 출감하는데, 이때 이미 루퍼드는 유명한 스타가 되어 있었다.
루퍼드가 당대 가장 유명한 스타인 제리 랭포드를 납치한 것은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의 쇼에 나가서 생방송으로 자신의 연기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것 역시 그가 스타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것을 루퍼드는 미리 알고 계획했을까. 단지 자기의 연기를 보여주려는 욕심 하나만 가지고 무작정 행동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걸까. 어느 쪽인지 관객을 알지 못한다.
이런 마지막 장면 역시 루퍼드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행적에 미루어, 루퍼드의 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루퍼드가 제리의 쇼에 출연한 것까지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 모든 것이 루퍼드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긴 하다 - 경찰에 체포된 이후 일련의 사건들은 그것이 실제인지, 루퍼드의 상상인지 확실하지 않고, 또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루퍼드는 불우한 환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고, 그런 강렬한 욕구로 드러나는 것이 강박적 행동이다. 사실 루퍼드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에서 본질도 아니고, 중요한 의미를 갖지도 않는다. 루퍼드 개인에게 있어 '성공'의 개념은 돈을 많이 벌거나,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불행과 고통의 억압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 방식이 대중 앞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이 루퍼드의 상상이라 해도, 실제 그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틴 스코시지 감독은 루퍼드를 통해 미국 방송의 '쇼 비즈니스'를 풍자하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명해지기만 하면 대중은 그를 스타로 받아들인다. 제리 랭포드는 거대한 방송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스타'가 기능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루퍼드는 그런 시스템을 모두 무시하고 단번에 대중에게 스타도 등극한다. 이는 제리 랭포드로 대표하는 과거의 '스타 시스템'이 무력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스타 탄생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의 경우만 해도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과거에 '공중파' 방송이 유일한 경로였다면, 지금은 인터넷 매체도 많고, 방송도 수십 곳에서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의 재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다. 좋은 의미의 '스타'도 많지만, 악행으로 이름을 떨쳐도 스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연쇄살인범의 팬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감옥에서 수많은 선물과 편지를 받고, 결혼을 하자는 여성도 있다. 악행을 해서라도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면, 그때부터는 '인플루언서'가 되어 대중의 여론을 주도하게 된다.
루퍼드는 제리를 납치한 납치범이지만, 대중은 그가 납치범이라는 사실보다는 그가 회고록으로 100만 달러를 벌고, 재미있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루퍼드는 영리한 사람일수도 있고, 대책없는 '관종'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시청률로 먹고 사는 방송국에서는 루퍼드의 성격이나 성향보다는 그가 얼마나 '인기' 있는 '스타'인가가 더 중요할 뿐이다. '쇼 비즈니스'에 관한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