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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기록/집짓기 관리

집짓기 전후의 생활

by 똥이아빠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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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 전후의 생활

 

집짓기는 곧 삶의 과정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집을 짓게 된 전후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왜 시골로 이주를 하게 되었는지, 집을 짓게 되기까지 어떤 경로를 걸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선택이 대단한 각오를 한 결과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에게 각별히 인식될 만한 의미있는 과정을 겪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가족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주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귀촌을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2003년을 전후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거의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바꿔놓고야 말았다. 미세한 징후들은 생활 속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나타났지만, 그 사소함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우리 몸을 갉아먹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좀먹고 있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봐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물론 더 큰 행운과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건 처음부터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우리가 선택한 만큼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결혼을 하고 은행대출을 받아 서른 한평짜리 아파트를 부천 중동의 신도시에 마련한 것이 1996년이었다. 그때는 중동 신도시가 막 생기던 때여서 아파트 값이 마구 뛰던 때는 아니었다. 중동 신도시로 간 이유는 오로지 아내의 직장이 여의도여서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마침 그곳에 아내의 친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전후해서 나는 자유기고를 하며 살았는데,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고 몇 달 뒤에 나는 '안철수연구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아이의 돐잔치를 할 때 '안철수연구소'의 모든 직원들이 참석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아내의 회사와 내가 다니는 회사는 비슷한 시기에 여의도와 강남에 있었다. 내가 취직을 한 것은 물론 대단히 기쁜 일이었고, 나와 가족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아이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우리는 맞벌이를 하면서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겼고,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말과 휴가 때 자주 여행을 다녔다.

<사진> 회사 동료들과 회식 자리에서. 우리는 술집보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자주 갔다.

 

주중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든 집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의 삶은 바쁘긴 했지만 단조로웠다. 직장에서는 이러저런 프로젝트와 새로운 제품 개발, 서류 작업, 시연, 강의 등으로 바쁘게 지냈지만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삶에 축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직장 생활은 즐거웠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젊고 생동감이 넘치는' IT기업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직장은 직장일 뿐이었다.

 

아이가 돐이 되면서부터 외가가 있는 미국 여행을 시작으로 기회만 되면 주말 여행을 했다. 아이를 위해 '에버랜드' 회원권을 매년 구입해서 주말마다 다니기도 했다.

동생네 가족, 친구 가족과 함께 1박2일, 2박3일의 국내 여행도 꽤 여러 번, 많이 한 기록이 있다. 직장을 다니고, 안정적인 수입이 있고, 주말의 이틀을 쉴 수 있다는 조건은 우리가 '중산층'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갖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행을 하지 않는 주말이면 집 근처에 있는 대형쇼핑몰이나 백화점 등에 가서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주말 행사도 한계가 있고, 매주 여행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평소의 삶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여느 아파트의 가족처럼 회사에서 퇴근해 돌아온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켜 놓고 밥을 먹고, 밤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었다.

 

그즈음 아내와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크게 세 가지였다. 출퇴근 교통 상황, 소음, 불빛.

가장 큰 문제는 출퇴근 교통 문제였다. 부천에서 여의도까지 불과 30분 거리를 아침에는 1시간 40분에서 2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퇴근 시간 역시 출근 때보다는 덜했지만 막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앞뒤로 콱콱 막힌 도로에서 마치 주차장처럼 서 있는 차 안에 갇혀 있던 우리는, 좁은 공간에 갇힌 쥐들이 스트레스로 서로를 물어 뜯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말다툼을 하고, 감정이 상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를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에서 쏟아져나오는 자동차의 소음과 불빛,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 마치 백야처럼 어둠을 몰아냈다. 도시의 밤에는 진정한 어둠이 내려지 못한다. 사람들은 새벽에도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폭주한다.

아파트에서 살던 약 8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빛과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감각에 무디게 반응하겠지만, 설령 의식하지 못한다해도, 우리의 몸은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진> 회사에서 영덕게를 대량 주문해서 게 파티를 연 적도 있었다. 이런 점은 벤처기업의 장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생활의 스트레스가 주말이면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체 반응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하려는 방어기제가 있으므로, 도시가 아닌 보다 조용하고 깨끗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탈출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이 8년 가까이 되는 동안 생활에 변화는 없었다. 시나브로 우리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을 것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평범한 생활이었다.

 

 

나는 직장 동료를 제외하면 친구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친구'로 만나는 벗들은 군대동기 몇 명 뿐이었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한 두명 정도 있었다. 나는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친구가 많은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과 약간의 결벽증,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친구가 없다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도시 속의 아파트는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내가 찾지 않는 한, 아파트는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관문만 걸어 잠그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밖에서는 알지 못하니 말이다.

'친구'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중에 시골로 이주하고 나서 나를 둘러싼 인간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친구라는 인간 관계가 전혀 없었지만 시골로 이주하면서는 확실하게 변화가 생겼다.

 

2003년이 되었고, 막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날, 당시에는 유일했던 친구 녀석이 찾아왔다. 돈이 있으면 시골에 있는 땅을 사라고 했다. 뜬금없었지만 녀석의 성화에 못이겨 그냥 구경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주말을 이용해 땅이 있다는 경기도 양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사진> 할머니와 손자의 행복한 한 때.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시골의 조용한 연립주택에서 살 때의 모습이다.

 

부천에서 양평까지는 먼 거리다. 아무리 빨라도 두 시간은 걸리고, 오가는 길이 막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주말에 김밥을 싸서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양평을 향했다. 

신기한 우연이자 인연이지만 양평은 내게 두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할 때, 함께 근무했던 동기의 고향이 양평이었다. 양평 토박이인 동무는 우리 동기 모임의 종신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전역을 하고도 동기들 몇몇은 줄곧 붙어다니며 이십대를 함께 보냈다.

이십대 때 막연하지만 나도 양평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꿈이 현실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동기들은 양평 동무의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한동안 살다시피 했다.

게다가 더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형이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쓴 시 가운데 '양평'이라는 시가 있었다. 그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양 평 

 

양평에나 갈까

아니 평양에

거기 눈빛 고운 아이를 찾아

시나 읊어주고

낚시나 할까 

구름 그림자가 물로 들어서

싱싱한 물고기로 튀어오르고

아버지가 물가 저편에서

하하하 웃으시는 웃음이

쩔렁거리며

흔들려 오는

물많은 동네 

란이는 이미 시집가고 없지만

피난온 아버지와 의형제 맺고

우리를 서로 맺어주기로 했다는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어머니가 해주시는 채나물밥

소주한잔 걸치는 매운탕이 좋아서

마음이 적적할 때면 버스를 타고 가보는

또다른 고향 

제일 추운 곳이면 어떠냐

평양에나 갈까

아니 양평에

물그림자는 하늘로 올라

아버지 얼굴이 되고

뚝뚝 듣는 그이를

내가 듣으리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고 지역이니까 잘 알고 있지만, 2003년 당시만 해도 양평은 낯선 곳이었다. 우리는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하남에서 팔당대교를 건너, 팔당터널 여섯 개를 지나고, 양수교를 건너 양수리를 거쳐 북한강을 끼고 한참을 달려 다시 산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봄이 시작되고, 양수리부터 북한강을 끼고 도로 양쪽으로 벚꽃이 만발했다. 북한강도 좋았고, 도로 옆에 피어 있는 벚꽃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깨끗한 공기가 좋았다.

우리는 소풍을 가듯, 주말이면 김밥을 싸서 양평을 찾았다. 친구가 알려 준 땅은 결국 구입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역시 우연이지만 그 무렵, 아내와 내가 다니던 회사가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강남에서 양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좋은 것은 출퇴근 교통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마음이 움직였다. 도시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만 팔 년 동안 정들었던 아파트 단지의 몇몇 이웃들과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이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가 사람을 잘 사귀고, 인기도 많아서 어디를 가든 문제는 없었지만, 오래 사귄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제 막 들어간 아들의 유치원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친구를 사귀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아이에게 어느 날 그 인연을 끊으라고 강요할 권리가 부모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사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퍽 드문 사진이다. 어린 아들이 찍어주었기에 더욱 귀한 사진이다.

 

정든 이웃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시골로 이주하려는 마음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도시에서의 삶이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주말마다 가는 양평으로의 소풍에서, 땅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해 3월부터 8월까지 주말마다 양평에서 부동산중개업자의 도움을 받으며 많은 땅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소박한 수준이었다. 아이가 걸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거리여야 하고, 어머니가 외롭지 않도록 노인들이 가까이 살고 있는 곳에 집을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밖에 다른 요소는 거의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로, 시골의 삶에 관해 꽤 무지한 상태였다.

 

시골로 이주하는 문제를 두고 아내와 나는 의견이 잘 맞았다. 이것은 퍽 다행한 일로, 지금도 귀촌, 귀농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녀의 교육문제와 함께 배우자의 의견이 다른 것이다.

귀촌을 결정하자, 모든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를 부동산에 내놓자마자 사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것이,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전철역이 생긴다는 뉴스가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아파트 가격이 계속 가파르게 뛰고 있었기에, 입지가 좋은 우리 아파트는 나오기 무섭게 팔렸다.

하지만 시골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교가 있는 마을 근처에 전세집을 얻고 싶었지만 실패하고, 면소재지에 새로 지은 연립주택을 사서 들어갔다.

<사진> 시골로 이주하고 처음 살았던 연립주택. 전세를 구하지 못해 신축 연립을 샀다.

 

아이는 시골 분교의 병설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통학 버스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양평에서 강남으로 출퇴근을 했다. 중동 신도시에서 출퇴근할 때보다는 거리가 멀었지만 막히지 않았기에 시간도 적게 걸렸고, 무엇보다 운전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 가장 살만했다.

이곳에 약 일 년 정도 살면서 땅도 샀고, 집도 지었다. 2003년 봄에 우연히 양평의 땅을 소개 받은 것부터, 그해 여름에 도시의 아파트에서 시골로 이주하기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의 인생에서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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