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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기록/집짓기 관리

집짓기를 말하다_011_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

by 똥이아빠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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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를 말하다_011_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

 

집짓기를 하다 말고, 뜬금없이 시골 아이들 이야기를 하느냐고 의아하실 분도 있겠다.

1편과 2편에서도 말했듯, '집짓기'라는 행위가 단지 '건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극히 일부분일 뿐, 집을 짓는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을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 생활, 하루하루의 나날과 이웃들과의 관계가 모두 '집짓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시골에서 집을 지으려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내용이 바로 아이의 생활 환경이었음은 분명하다. 도시에서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사교육을 시작할 것이다. 피아노학원, 영어학원, 태권도학원, 발레학원...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때는 온갖 사설 학원으로 아이를 내몰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선행학습을 시키고,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에서 뒤쳐지지 않게 하려는 부모의 눈물겨운 노력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들은 그저 현실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할 뿐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조금 다른 부모이긴 하다.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고, 선행학습이며, 공교육 제도 안에서 앞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지 않았고,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주입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게으르고 무능한 부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싫기 때문에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시골 마을의 분교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생활을 한 아이는, 학교가 그저 노는 곳인 줄 안다.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을 따라 학교 주변의 자연 환경을 구경하고, 탐색하고,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서, 시골 마을의 곳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자주, 많이 다닌 곳은 개울이다. 우리가 시골로 이사 온 2003년부터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2010년까지, 시골 아이들은 도시의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기가 말하자면 학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2000년에 당시 분교였던 정배학교는 폐교 위기에 몰렸다. 이미 많은 분교들이 폐교되었고, 정부에서는 분교나 학생 수가 적은 학교를 폐교시키는 교장에게 지원금을 더 주겠다고 대놓고 광고하던 시기였다. 즉, 작은학교를 살리려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학교를 통폐합해서 학교 수를 줄여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관료들의 생각이었다.

 

교육을 '효율'로 생각하는 저 무지하고 멍청한 교육관료들이 있는 한, 인성을 우선하는 공교육 시스템은 결코 발붙일 곳이 없다. 그렇기에 대안학교가 생기는 것이고, '작은학교' 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떻든 2000년부터 정배분교도 폐교의 위기에 놓였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나섰다. 마을과 교회에서 '폐교 반대 운동'을 활발히 펼치는 한편, 학부모들도 최선을 다해 학교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시골로 내려오던 2003년 무렵도 폐교 반대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시골에 내려와서야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역시 폐교 반대운동에 당연히 동참했다.

 

그 당시의 학교는 전교생이 28명 정도에 불과한, 진짜 작은 시골의 분교였다. 

학부모들은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 작은 버스를 마련하고, 그 버스로 다른 마을에서 다니는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 해마다 가을에는 학교 운동장에 있는 은행나무의 은행을 털어 '은행축제'를 열었다. 거기서 나온 은행을 말려 팔아서 기금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마련하고, 책도 구입하고, 장학금도 주었다.

 

학부모들은 열성으로 참여했지만 그것이 이기적인 치맛바람이 아닌, 지역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음은 분명했다. 그 예로, 분교의 학부모들 대부분은 팔당지역의 생협인 팔당생협의 회원들이었고,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시골의 분교에 아이를 보냈고, 기꺼이 시골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서로 마음도 잘 맞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단지 같은 학교의 학부모들로 만났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들을 공유하고 있었고, 함께 어울려 놀았다.

학생 수도 적었고, 학부모들의 마음도 서로 통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즐겁게 노는 만큼, 학부모들도 함께 어울리는 것이 즐겁고 신났다. 아이들을 위해 캠프를 준비하거나, 은행축제, 작은운동회, 음악회 심지어 아이의 생일잔치까지도 빠짐없이 챙기고, 함께 놀았다.

 

우리 아이 생일에 전교생이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한 것은 기록적인 일이었다. 전교생이 약 30명 정도, 거기에 학부모들까지 약 50-60명 정도가 북적거리며 즐겁게 어울려 논 기억은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아이가 졸업하던 2010년까지 학생은 28명에서 약 80명 정도로 늘었고, 2012년에는 마침내 '분교'에서 '본교'가 되었다. 학생 수는 100명을 넘어섰다.

폐교 반대운동을 하고 불과 10여년이 흘러서 본교가 된 것은 경기도에서 두 번째의 일로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학생 수가 늘어나고, 분교에서 본교가 되는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다. 많은 학부모들은 분교에서 본교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받아들였지만, 그 흐름을 거부하고 억지로 막아보려는 학부모도 몇 있었는데, 그들이 보여준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태도 때문에 많은 학부모들이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런 무지막지한 사건이 있은 뒤로, 학교도, 학부모들도 예전의 밝고 활발한 모습을 잃었다. 게다가 새로 들어오는 학부모들의 성향이 예전과는 달라져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던 몇 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아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가 조금씩 이름이 나고,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라는 소문이 돌면서, 어중이 떠중이들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마을을 떠났다. 그들에게 시골마을은 그저 불편할 뿐이었을 것이다. 마치 유행처럼, 아이가 시골학교에 다니는 것도 마치 쇼핑을 하듯, 그렇게 이기적인 태도로 스쳐갔다.

 

학교의 분열, 정확히는 극소수 학부모의 비이성적인 일탈로 학교가 분열되기 전에는 작지만 활발한 공동체가 있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학부모들이 모이고, 학교 행사에 지역주민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마을행사에는 또 학부모들이 참석하는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여름에 가장 신나는 놀이는 역시 물놀이였다. 우리 마을 앞으로는 중미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있는데, 중미산 휴양림을 거쳐 내려오는데, 마을 위에는 기도원이 하나 있고, 우리 마을이 첫번째 마을이어서 오염원이 거의 없다. 

한여름, 학교 수업이 끝난 어린이들은 집에 가방을 던져 놓고 개울가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늘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들이 있기 마련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에 있는 간식을 싸들고 나오면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다 배고프면 나와서 간식을 먹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컵라면, 수박, 감자, 옥수수 등이 주된 간식이었는데, 아이들은 적게는 십 여명에서 스무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지친 엄마, 아빠들도 물에 발을 담그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물속에 들어가 천진하게 놀았다. 대개는 엄마들이 많지만 가끔 아빠들도 있었고, 손자를 봐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물속에 들어가 조금 지나면 추워졌다. 계곡물은 차가웠고, 뜨거운 날씨를 쉽게 잊었다. 심지어 물속에 조금 오래 있으면 입술이 파랗게 변하고 이를 덜덜 떨 정도로 물은 차가웠다.

한여름에 이렇게 시원한 계곡물에서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대단한 축복이며 특혜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 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혜택이다. 그런 점에서 시골에 내려와 사는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만, 주말이 되면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계곡 개울에 가지 않았다. 주말에는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계곡을 메웠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쓰레기와 흙탕물로 넘쳐났다.

공교롭게도,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던 시기에는 계곡에도 물이 적당히 있었다. 심하게 가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비가 내린 다음, 개울물이 깨끗하고 수량이 풍부하게 흐를 때는 아이들이 개울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학생 수가 늘어나고, 마을과 주변으로 새로운 집들이 늘어나면서 개울의 물도 줄어들었다. 그것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의 개울은 예전의 개울이 아니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개울의 물이 많이 줄었다.

올해가 유난히 가뭄이 심한 탓도 있지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개울의 물이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런 현상이 마을 주변의 개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 마을 위로는 중미산 휴양림이 있는데, 휴양림과 마을 사이에 새로운 펜션 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주변으로도 펜션과 단독주택이 많이 늘었다. 

 

여름이면 폭우가 쏟아져 계곡을 깨끗하게 쓸어내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계곡이 넘칠 듯 폭우가 한번씩 지나가면 개울은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싱싱하고 새롭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그런 폭우도 내리지 않았고,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주택과 펜션 건설이 많아지면서 개울이 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정배학교 어린이들도 예전처럼 개울가에서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 개울이 말라 물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깨끗하고 차가운 개울물이 다시 흐르면 아이들이 개울을 찾겠지만 그렇게 되려면 비가 내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듯 하다.

개울물이 말라가는 것이 사람들이 지역을 개발하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일이라면, 앞으로 예전의 그 맑고 차가운 개울물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지 모른다. 그것은 누구의 탓이라기 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이 훼손되는 것은 일정부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고, 가능하다면 자연 환경을 의식적으로 풍요롭게 가꿔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어떤 정책으로,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자연이 훼손될 수도 있고, 예전보다 더 아름답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점에서 유럽의 여러나라, 특히 독일의 예를 본받을 필요가 많다.

 

한국은 도시에 큰 공원이나 호수가 드물지만, 독일은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숲이 있고 호수가 있다. 크고 작은 공원이 도시 곳곳에 있고, 주택가도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은 자연이 스스로 자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들여 가꾸고 만든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자연은 아직 건강하고, 스스로 치유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사람들이 오히려 자연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 놀 수 있는 자연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하는 환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을 가꾸고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연을 망가뜨리면서 개발을 하는 것은, 자연의 가치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의 논리일 뿐이다.

오히려 오래도록 높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존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자연이 주는 부가가치는 인간이 개발하는 이익보다 훨씬 크고, 오래가며,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이롭다. 그러나 사람에게만 이로운 '개발'은 자연을 해치고 끝내 인간에게도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돈', '물질'로 세상을 바라보는 극도의 이기적인 인간들이고, 자연의 고귀함,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들이다.

 

우리 아이들은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자연과 함께 행복한 한 시절을 보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어렸을 때, 자연과 함께 했던 기억이 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행복한 추억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 우리(부모)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어렸을 때의 중요한 시기를 아이와 부모가 모두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시간이다.

부모는 아이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좋고, 아이는 동무들과 함께 어떤 억압이나 부담 없이 자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차피 삶은 선택이다. 도시에서 사느냐, 시골에서 사느냐도 선택이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삶은 그 사람의 본성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도 많지만, 자기에게 맞지 않는 환경으로 잠시 들어왔다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집을 짓는 동안에도, 집을 짓고 나서도 아이가 마을 앞 개울에서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나는 모습을 보면서 시골에 들어온 것을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시골의 풍성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도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피자와 닭고기 튀김을 먹지만, 그래도 옥수수와 찐감자를 먹으며 물놀이를 하던 추억을 잊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을 앞 개울은 마당의 확장이다. 나는 시골에 집을 지었지만, 마을 앞 개울은 수영장이고, 뒷산은 넓은 정원이며, 마을 전체는 산책로다. 집에 울타리를 두르지 않은 것은, 집의 외연이 자연스럽게 마을로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집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고, 경계가 사라지고, 마을 주민 누구나 이웃이라는 것을 시골 사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가 관심을 갖고 키우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 온 우리 어른들의 교육관이었다.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잘못하면 야단치고, 잘하면 칭찬하는 마을 어른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랐다. 내 아이가 귀하면 남의 집 아이도 귀한 줄 아는 것이 예전 우리 부모들이었다.

 

지금은 '내 아이만 귀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좀 더 보편적인 상식과 인간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가족', '내 아이'만을 사랑하는 태도는 인간의 이기적인 단면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좋지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식이나 무지는 경계해야 한다. 내 아이를 사랑하듯 남의 아이를 사랑하고, 내 가족을 아끼듯 남의 가족도 아끼는 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공동체의 삶이었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는 필연적으로 익명성이 발생하고, 익명은 타인을 배제하려는 배타성과 이기심을 만든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는 익명성이 자리잡기 어렵다. 그것이 '개인주의'를 확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도, 공동체를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된다.

결국 행복한 아이, 아이가 행복하다는 것은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마을 어른들, 이웃들, 아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 아이가 자라던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마을에서는 꽤 바람직한 환경이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쉽게도 예전과 같은 환경이 아니다. 마을의 자연환경도 달라졌고, 심지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파괴되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고, 논밭은 줄어들고, 산은 깎이고 파였다.

개울물도 예전 같지 않고, 개울을 찾는 아이들도 사라졌다. 이 사진처럼 아이들이 행복한 시절이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지 않는 한, 자연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골에서 집을 짓는다고 산과 자연을 파헤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자연을 파괴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반성한다. (그래서 마당에 나무를 가능한 많이 심으려고 했다.)

'집짓기'가 자연에 반하는 이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마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집, 마을, 자연이 우리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낸다는 것을 믿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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