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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국내여행을 하다

서울 나들이

by 똥이아빠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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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서울 나들이

 

<서울> 서울나들이-01
일요일에 서울을 나오는 것은 퍽 드문 일이다. 저녁에 모임이 있어, 겸사해서 일찌감치 서울에 나와 구경을 좀 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정작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변두리에서 살았고, 그나마도 어려서 서울의 외곽, 산동네로 이사해, 다시는 서울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했으니, '서울'은 내게 늘 먼 곳이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나 '구보씨의 일일', 이상(김해경)의 수필을 보면 서울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늘 서울 나들이는 감히 그 작가들을 흉내낼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의 '풍경'으로 담아보았다.
먼저, 중앙선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내려 2호선 전철로 옮겨 타서 을지로3가역에서 내렸다. 전철역을 나오면서 곧바로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거대한 설치작품인데, 옆에 서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거인의 크기처럼 보인다.
뒤에 보이는 '백병원' 건물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임교수이던 '백인제'가 1932년에 세운 외과병원을 모체로 성장했다. 백인제는 한국전쟁 중에 실종되었고, 그의 아들인 백낙조와 백낙환이 운영했는데, 내 아버지의 성함에도 '낙'자가 들어 있고, '낙'자 돌림이 수원 백씨 집안에서는 꽤 높은 항렬이어서,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종씨들과 만나면 나는 거의 고조할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뻘이 된다.
나는 3연(혈연, 지연, 학연)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고 있으니, 굳이 백병원이 '백씨'의 소유라는 것을 말할 이유는 없지만, 의술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니 반갑기는 하다.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의 그 '을지'를 따서 만든 길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황금정'으로 불리웠고,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구리개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의 한성부 남서(南署)의 광통방(廣通坊), 회현방(會賢坊), 훈도방(薰陶坊), 대평방(大平坊), 성명방(誠明坊), 낙선방(樂善坊), 명철방(明哲坊) 지역이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선 서울의 중심지이고, 바로 옆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한 블럭 옆이 종로여서, 교통이 번다한 곳이기도 하다. 일요일이어선지,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도로 옆 가가들도 문을 닫아 한산했다.

<서울> 빌딩들
서울에는 높은 빌딩이 많다. 남산에서 보면, 좁은 서울 바닥-4대문 안-에 크고 작은 빌딩들이 바닥에서 불규칙하게 융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형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아주 짧은 역사-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에 매우 빠르고 획기적인 경제 성장(이것을 '압축성장'이라고 말하지만)을 이루면서 서울의 공간은 심하게 왜곡되었다.
빌딩만 놓고 보자면, 빌딩들 하나하나는 주변 건물과 아무런 조화도 이루지 못하고, 건축디자인은 매우 수준이 낮으며, 건축적 미려함이나 섬세함 따위는 보기 어렵고, 오히려 대단히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빌딩이 그 사회의 '건축 문화'로 작동하길 바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그것이 저열한 문화의식 때문이든, 아니면 오로지 돈 때문이든-지금의 결과물은 사회 전체에 '시각적 폭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빌딩은 '자본의 상징'이기 때문에 초고층 빌딩을 지어 그것을 과시하든, 아니면 빌려주고 돈을 받든, 자본의 총체적 기능을 하게 되어 있다. 저 빌딩들과 어떤 인연도 없는 평범한 서민들은 지나가면서 빌딩 아래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밟으며 주눅들게 되어 있다.
빌딩은 '자본'의 상징이고, 자본의 '권위'이며, 자본의 '권력'을 드러내는, '발기한 자본'의 형상물이다. 저 높은 빌딩들 주변은 의외로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이 마치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 '자본의 권위'를 민망하게 만든다. 그게 꼭 자본가의 잘못은 아닐진대, 오로지 '자본'만이 불쑥 솟아있기 때문에-그들만의 독주로 인해-스스로 망신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은 매우 기형적이고 밸런스가 무너진 건축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을 전혀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서울을 걷다보면 뒤틀린 건물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매우 곤혹스럽게 느껴질 정도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건축물은 단지 공학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예술로 마무리를 할 때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 바탕에는 당연히 인간에 대한 예의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서울> 삼일빌딩
을지로3가 전철역을 나와 종로쪽으로 꺾어지면 삼일빌딩이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명한 건축가인 김중업이 설계를 했고, 1970년에 준공한 이후 여의도에 63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한국 최고의 건물이었다.
지하2층, 지상 31층으로 높이는 114미터이다. 이 건물도 벌써 4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대 건축물은 콘크리트의 물성이 100년 정도를 지탱한다고 할 때, 이제 반 정도 도달했다. 70년대에는 삼일빌딩 주변으로 높은 건물이 없어서 단연 독보적으로 높아 보였지만, 이제는 삼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워낙 많아서, 그저 소박한 건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삼일빌딩 앞으로 지나가던 청계천 고가도로로 사라지고, 복개 되었던 청계천도 (비정상적으로) 복원되었으니, 이 부분에서는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모습은 대부분 철거되었다고 봐야겠다.
일요일이라 도로가 한산하다.

<서울> 서울 나들이-02
을지로에서 종로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청계천이 흐른다. 지금은 복개를 하고, 치장까지 해놔서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청계천 본래의 자연스러운 하천은 아니다. 게다가 청계천을 흐르는 물도 인공적으로 펌프로 물을 퍼올려 흐르게 한다고 하니, 이건 단지 청계천 흉내만 낼 뿐이지 실제 청계천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가 없다.
청계천을 덮기 전에는 악취만 나는 더러운 하천이었다. 청계천 가장자리로 많은 판자집들이 들어서고, 거기에서 나오는 온갖 오물들이 청계천으로 떠내려 갔으니 '청계'라는 단어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청계천과 나란히 종로 거리가 있는데, 을지로3가 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꺾으면 파고다공원 네거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지만 그보다 먼저 파고다공원 네거리에 있는 '알라딘 헌책방'에 들어가 책을 고른다.
'알라딘 헌책방'은 이제 미국(LA)에도 진출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듯 하다. 이곳 종로지점에는 이미 여러 번 왔었지만, 지난번 강남지점에 들른 이후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 강남점이 훨씬 크고, 책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책이 없어서 만화책만 두 어권 사들고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 인사동 입구에 이르러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눈에 띄는 국수집에 들어갔다. 분식집인 줄 알았더니, 주문시스템이 일본식으로 되어 있고, 음식을 먹는 방식도 벽을 향한 테이블이어서 혼자 먹기 편하도록 되어 있었다.
먼저 메뉴 자판기에서 메뉴를 선택하고 돈을 넣으면 대기표가 나온다. 메뉴를 선택하면자동으로 주문이 되어, 금방 음식이 나왔다. 국수 한 그릇 4천원. 싸다면 싼 가격이지만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김치는 스스로 덜어 먹도록 되어 있고, 음식을 다 먹고 바로 위쪽 선반에 올려 놓고 나가면 된다.
이렇게 일본식 시스템이 도입된다는 것은, 그만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리라. 혼자 들어와서 음식을 사 먹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식탁은 최소 2인용인데 비해, 벽을 향해 테이블을 놓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식사를 하고 나오니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고 인사동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인사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고 있지만, 결코 '전통'을 지키는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이제 인사동을 '전통의 거리'라고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
인사동은 온갖 잡다한 문화가 뒤섞인 잡탕문화이며, 눈에 띄게 먹거리들이 많아진 음식의 거리라고 해야한다. 일요일이라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였지만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 인사동 쌈지길
비 내리는 인사동 거리에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대개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외국인들도 꽤 많았다. 노점에서는 주로 먹는 것들과 장식품들이 많았고, 도로 양쪽으로 커피점, 음식점, 옷가게, 골동품점 등이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우산들이 부딪치고, 사람들 사이로 걷기가 주춤거리며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인사동 중간쯤에 쌈지길이 있는데, 이 안쪽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들어갔다가 엄두나 나질 않아 다시 나왔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이곳을 좋아하는 듯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이렇게 나와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긴 하다. 또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물건도 사고, 음식도 사 먹고 하면서 돈을 순환시키는 역할도 한다. 젊은이들이 88만원 세대라고 모두 가난하지는 않은 듯하다. 손에, 어깨에 들린 카메라는 모두 고급 카메라들이고, 입고 있는 옷이며, 메고 있는 가방이며가 유명 제품들이니 말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물건을 고르는 건 주체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지만,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젊은 여성들은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다니고, 그래서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 지 난감하기도 하면서 '전통의 거리'라는 인사동을 빠져나왔다.
인사동 거리는 이제 먹고 마시고 놀기에 좋은, 그저 유흥의 거리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 역시도 '자본'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니.
<서울> 조계사
조계사는 '조계종'에 속한 절이다. '조계종'에 관한 간단한 이력은 다음과 같다.
조계종(曹溪宗)은 한국 불교의 한 종파이다. "조계"라는 낱말은 중국 선종 6조인 혜능(慧能)의 별호에서 유래하였다.
조계종이라는 종파 이름이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때이다. 즉, 신라 때부터 내려온 9산 선문(九山禪門)을 고려 때 합친 것으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수립한 천태종이 종세(宗勢)를 확장해가자 이에 당시의 선종(禪宗)의 제 분파들이 자극을 받아 합쳐져서 성립된 것이 조계종이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이지만 선법(禪法)의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성립된 9산 선문 중 최초로 성립된 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인 도의(道義: fl. 821)국사를 조계종의 초조(初祖), 즉 종조(宗祖)로 여긴다.
대각국사 의천에 의한 천태종의 성립의 영향을 받아 조계종이 성립된 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 백운(白雲) ·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가 조계종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1]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
이후에는 선종(禪宗)의 여러 교파 중 조계종만이 그 법맥(法脈)을 오래 유지하여 오다가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천태종과 총남종(摠南宗)을 조계종과 통합하여 "선종(禪宗)"이라 이름을 고쳤다.
그 후 1941년에 또다시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합하여 단일종(單一宗)으로 만들었다.[1] 이때 혜능선사가 있었던 조계산이라는 이름을 빌려다 조계종이라 명명하고,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종조(宗祖) 또는 중흥조(中興祖)로 삼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 옴)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정작 조계사에는 처음 들어가 봤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이니 산속에 있는 화엄사, 해인사, 송광사처럼 넓은 터를 가질 수는 없을테고, 당연히 풍광은 볼 것도 없을 터이다.
그럼에도 이 절이 한국불교에서 갖는 위치와 상징적 의미는 남달라서,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절만 놓고 보자면 대웅전의 삼존불 위용이 대단하다. 경내에 있는 백송이 특이하고, 회화나무가 근사하다. 탑이며 비석은 오래되지 않아 그다지 볼품이 없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경내에 있는 불교용품 판매점이었는데, 조계사의 명성에 비하면 매우 초라했다. 물론 물리적 공간이야 넓었지만, 불교용품의 종류와 다양성, 반짝이는 아이디어 제품 등으로 보자면 부족함이 너무 많았다.
불교계에서는 불교용품에 관한 협의체를 꾸려보는 것이 어떨까? 나름대로 표준도 만들고, 상품기획도 함께 할 수 있는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사찰과 박물관 등을 다니면 꼭 판매점에 들르곤 하는데, 사찰이든 박물관이든 아이디어 빈곤으로 좋은 기념품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조계사는 신도들도 매우 많고,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사찰이니, 불교용품을 디자인하는 것에 충분히 지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조계사 불교박물관

조계사 대웅전 뒤쪽으로 불교박물관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입구가 있는데, 자동유리문이 열리면 바로 양쪽으로 사천왕 부조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바로 이근세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2007년 작이니, 세월이 꽤 많이 흘렀다. 여기 세운 작품도 꽤 훌륭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 비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아쉬운 것은, 조계사를 둘러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 박물관에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자원봉사를 하는 보살님들이 몇 분 계셨고, 전시실은 조용했다.
이 사천왕 작품도 조명이 잘못 설치되어 있어, 아쉬움이 컸다. 조명에 좀 더 신경을 쓰면 작품이 훨씬 돋보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계사 가시는 분이 있으면, 박물관 입구에 있는 이 사천왕 부조 작품을 꼭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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