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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 문학예술 산책_02_이광수의 흔적

by 똥이아빠 2022.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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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천문화재단 길동무에서 마련한 문학예술 산책 프로그램 두번째는 주로 이광수의 흔적을 쫓는 내용이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무더웠고, 습기가 많아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다. 그래도 1회에 이어 많은 분이 참석했고, 강사 김남일 선생님의 설명은 구체적이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배울 점이 많았다.

 

■산책코스: 효자동 허영숙 산원-->창의문-->백사실계곡(점심)-->이광수 홍지문 별장--> 소림사-->석파정 별당-->반계 윤웅렬 별장-->현진건 옛 집터-->윤동주문학관 (해산)

 

모임 장소는 경복궁 한쪽에 있는 고궁박물관 옆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였다. 우리처럼 도시를 탐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이번에도 1회와 비슷하게 약 1만6천보 정도를 걸었다. 서울이라도 처음 가보는 곳이 많았고,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고궁박물관'이 나오는데, 고궁박물관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넓은 공간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모여 오전 10시 조금 넘어 출발했다.

가는 길에 경복궁의 담과 이어지는 '영추문'을 봤다.

'영추문'은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부른다. 경북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에 있다. 동쪽은 봄에 해당하여 ‘춘(春)’이라고 하였는데, 가을에 해당하는 서쪽 문이어서 ‘추(秋)’를 붙였다. 주로 승지 등 관료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이용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복궁영추문(景福宮迎秋門))]

197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고, 2018년까지는 수경사 30경비단이 통제하다 공개해서 지금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영추문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예전 '진명여고' 터에 도착했다.
1906년 4월 엄준원(嚴俊源)에 의해 사립 진명여학교로 설립되었다. 엄준원은 여성의 신교육을 목적으로 누이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부터 교지를 하사받아 창성동에 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기존의 사립여학교들이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 반하여 진명여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였다. 설립 당시 2년제 보통과에 8∼15세의 여학생 70명이 입학하였으며, 1908년 제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하였다.
그때까지의 교과과정은 아직 사숙(私塾)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여 수신(修身)주 01)ㆍ국어ㆍ한문ㆍ산술ㆍ재봉ㆍ수예ㆍ창가ㆍ도화(圖畵)주 02) 등이 주된 교과목이었다. 같은 해 9월 유치과ㆍ예비과ㆍ중등과를 설치하여 유치과에서는 유아교육을, 예비과에서는 종전의 보통과 교육을 실시하였다.
중등교육과정의 3년제 중등과에서는 보통과 졸업생 10명을 편입시켜 1911년 중등과 졸업생 10명을 최초로 배출하였다. 1912년 보통과는 4년제의 진명여자보통학교로, 중등과는 3년제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유치과는 폐지되었다.
1913년 설치된 2년제 기예과(技藝科)는 12세 이상의 부녀자들에게 보통교육과 함께 수예 등을 가르치다가 1922년 3년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경성여학원으로 개편되었다. 1922년 당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과목은 수신ㆍ국어ㆍ한문ㆍ일본어ㆍ영어ㆍ역사ㆍ지리ㆍ수학ㆍ이과ㆍ도화ㆍ가사ㆍ재봉ㆍ음악ㆍ체조ㆍ수예 등이었으나, 1938년에 국어와 한문은 폐지되었다.
1928년진명여자보통학교와 경성여학원을 폐교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만을 운영하면서 4학급에서 8학급으로 학급을 증설하였으며, 1931년 5월말 재학생 수는 410명이었다. 1938년진명고등여학교, 1947년진명여자중학교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다.
그 뒤 「교육법」 개정에 따라 1951년진명여자고등학교와 진명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진명여자중학교는 1987년 폐교되었다. 1989년 8월서울시 양천구 목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2001년 도서관인 의석관을 개관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

 

진명여고 터 앞에는 이승만이 쓴 '삼일당'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진명여고에서 가까운 곳에 이광수의 아내 허영숙이 병원을 개업한 자리가 있다. 이 내용은 아래 기사로 대신한다.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여성 개업의 허영숙

(서울=연합뉴스) "재작년에 동경녀자의학뎐문학교를 졸업하야 조선에 처음으로 녀의(女醫)가 된 허영숙 녀사는 이번에 서대문뎡 일뎡목에 녀의원을 내이고 금일부터 개업을 한다는데 병원 일훔은 영혜의원(英惠醫院)이라 하며 이로써 조선녀자가 의원을 개업하기는 처음이라 하겟더라." ('허영숙 여사 개업' 동아일보 1920. 5. 1.)

1918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의사시험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한 허영숙이 1920년 5월1일 서울 서대문정 1정목 9번지, 즉 서대문 1가 9번지에 의원을 열었다. 주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산부인과, 내과, 소아과 등을 진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 의원이다.

허영숙은 국내 의사 면허를 받은 첫 번째 여성이다. 의사시험에 합격한 첫 여성이자 국내 여성 개업의 1호이다. 전공은 산부인과였다. 그러니 여성 산부인과 전문의 1호이기도 하다.

 
영혜의원 개업 광고

1920년 5월1일 동아일보 4면

영혜의원은 5년 후인 1925년 5월6일 규모를 확장해 한성의원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병원 위치는 그대로인데 이번에는 개성병원 출신의 김기영이라는 의사와 함께 개업했다.

그러다가 1938년 5월31일 효자동 175번지에 해산전문병원 허영숙산원을 열었다. 신문에는 "허영숙씨(여의) 효자정 175번지에 해산전문병원 산원을 개원"(동아일보 1938. 5. 31.)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보면 '조선온돌 산실 완비'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온돌방 입원실이 30실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잡지 월간 '여성'의 기자로 일하던 시인 노천명은 다음과 같은 탐방 기사를 썼다.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고 진명고녀 앞에서 내려 들어가노라면 삼분을 채 못 걸어 바로 길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아담한 순조선식 큰 건물 하나가 있다. 살림집으로는 지나치게 크고 그렇다고 무슨 공무를 보는 집으로는 맞지 않게 아늑하고 다정한 맛을 주는 여기가 허영숙씨가 새로 개업한 씨의 산원이다… 이 산원의 특징은 조선식 온돌방에서 생활하고 또 이 온돌 따뜻한 방에서 해산을 해온 조선부인들이 병원엘 갑재기 들어가 침대 우에서 느끼던 종래의 불편을 일소하기 위해서 여기는 순조선식의 좋은 점을 살려가지고 우리 부인들에게 맞게 설비한 점이라고 한다…" ('허영숙산원 탐방기' 여성 1938. 12.)

노천명의 기사에 따르면 허영숙은 개업하고 있다가 3년 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도쿄 적십자산원에서 공부를 하고 1937년 6월에 돌아와 8월부터 이 산원 건축에 들어갔다.

앞줄 가운데가 허영숙. 왼쪽이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소장한 가족사진에 친지였던 허영숙이 함께했다.

1895년 서울에서 출생한 허영숙은 진명소학교와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학교 부속병원에서 실습하던 중 각혈로 병원을 찾아온 조선 청년을 만났다. 그가 바로 이광수였다. 이광수가 와세다대학교에 재학하며 소설 '무정'을 발표한 뒤였다. 이광수는 폐결핵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는데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소생했다고 한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하고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들어갔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독립신문사의 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1921년 3월 귀국, 허영숙과 결혼했다.

이광수는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허영숙은 1925년 학예부장으로 일하던 이광수가 병으로 눕게 되자 대신 원고정리를 해줄 생각으로 신문사에 나갔다가 기자가 됐다. 그해 12월에는 남편으로부터 학예부장 자리를 이어받아 신문 사상 첫 여성부장이 되어 일하다 1927년 3월 퇴사, 의사 본업으로 돌아갔다.

기자 허영숙은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상식, 육아, 가정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1926년 3월1일부터 6일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한 '가정위생'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어린아이 울 때 어머니의 주의,' '해산과 위험,' '아이를 못 낳는 부인과 남편' 등의 기사가 실렸다.

첨단을 걷는 신여성으로서 여성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 인습을 타파하고 여성의 권익향상과 사회참여를 독려했다. 예컨대 '부인문제의 일면-남자 할 일, 여자 할 일'(1926.1.1), '남자가 여자로=여자가 남자로' (1922.1.2) 같은 기사를 남겼다. 기자가 되기 전에도 수차례 신문에 기고했는데, 성병에 걸린 사람은 법으로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기고문 '화류병자의 혼인을 금할 일'(동아일보 1920년 5월10일)은 한동안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고 혼자서 세 자녀를 기른 허영숙은 말년에 자녀들이 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1971년 75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 1975년 5월 춘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폐렴에 당뇨와 동맥경화증까지 겹쳐 그해 9월8일 사망했다. 허영숙은 3년에 걸쳐 이광수의 유고를 정리하고 자료를 수집해 1963년 20권에 달하는 춘원 전집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1887년 서울 정동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

입원실과 간호사들의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박에스터이다. 본명은 김점동으로 187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윌리엄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의 통역과 간호 보조 일을 하다가 이들의 도움으로 1895년 도미, 다음 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다. 1900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보구여관에서 3년간 진료했으며 1906년 평양 광혜여원(기홀병원)으로 옮겨 일했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 무료진료를 베풀었으며 평양에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과중한 업무로 인한 폐결핵과 영양실조로 1910년 31세로 사망했다.

허영숙은 두 번째 여의사이자 최초의 여성 개업의였다. 그러나 정작 의사로서 보다는 이광수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이광수에 가려져 여의사로서의 활약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이후 유영준, 현덕신, 한소제 등의 여의사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개업의가 되기도 하고 의료활동 외에 여성운동,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 여자의사의 수는 2만명을 훌쩍 넘는다. 2017년 2월 현재 대한의사협회에 신고를 필한 의사는 10만1천618명이다. 이중 여자의사는 2만3천929명으로 23.9%를 차지한다. 박에스터가 의사가 된 1900년에는 이러한 성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의 인권이나 여성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개화기. 당시 여의사는 단순한 전문직 이상이었다. 현재 당연한 것으로 누리고 있는 생활 조건들이 이들 선각 여성들의 치열한 삶에 힘입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허영숙의 병원 자리에서 청와대 앞 '청와대 사랑채'가 가깝다.

청와대 앞 분수 자리에서 단식 농성을 했던 송경동 시인이 그때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앞에서 영빈관 건물이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지난번 프로그램에서 마지막에 들렀던 '윤동주문학관'이 나온다.

'윤동주문학관' 도로 건너편에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있다. 이곳에서 잠깐 쉰 다음, 바로 앞에 있는 '창의문(자하문)'을 통과해 백사실 계곡으로 향했다.

지난번 프로그램에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윤동주 문학관'

창의문 앞에서 김남일 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있다.

창의문에 관련한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어 숙정문과 함께 양주, 고양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였으나 태종16년(1416) 풍수지리설에 의해 폐쇄하여 통행을 금지시키다가 중종 1년(1506)에 다시 문을 열어 통행이 가능해졌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능양군을 비롯한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하였던 무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문루가 불타 없어졌으나 영조 17년부터 영조 18년(1742)에 중건되었는데, 이때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문루에 걸어놓았다.

육축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 같은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내부의 등성시설을 설치하였는데, 북쪽의 등성시설은 ‘ㄷ'자형의 일반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쪽은 낮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고, 여장은 총안이 없는 전돌로 축조되어 있다. 가구 방식은 평주의 주두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이 위에 다시 화반형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마룻보 위에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파련대공을 놓아 뜬창방·장여·도리로 짜여 진 마룻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 물매는 가파르지 않다. 지붕마루는 양성마루로 하고, 그 위에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하고 추녀 끝의 사래에는 토수를 끼웠다.

현재 한양도성의 문루는 숭례문, 흥인지문, 창의문 만이 남아있고, 각각 조선시대 문루 목조건축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규범적 사례이며, 한양도성의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루가 임란이후 18세기에 중건되어 큰 변형 없이 남아 있다.

위 내용으로 살펴 볼 때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문루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건축 양식적 진정성과 조선후기 도성 문루의 형식을 보여주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육축과 등성시설 또한 잘 보존되고 있어 그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창의문에서 백사실 계곡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낡은 한옥이 있는데, 지금은 비어 있는 건물로, 예전에 박노해가 운영했던 카페라고 했다.

박노해가 운영했다는 한옥 카페 건물. 지금은 비어 있다.

백사실 계곡으로 들어서서 개울을 끼고 걸어가는 회원들.

어제 비가 와서인지 개울물이 맑다.

부암동 백석동천 음각.

백사 이항복 별서터. 지금은 돌만 남았지만, 연못과 정자 주춧돌, 건물의 기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다.

정자터의 주춧돌.

계곡 옆에 있는 현통사. 한국전쟁 때 불탄 걸 1971년에 복원했다.

개울물이 깨끗하다.

일붕 서경보의 불암 부처바위. 

 

세검정. 어려서 마포에 살 때, 친구들과 건빵 한 봉지를 사들고, 153번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저 계곡물에 뛰어든 추억이 있다. 

세검정에서 가까운 곳에 이광수의 별장터가 있다. 꽤 가파른 언덕이고 골목이 좁아서 이곳에서 생활하는 게 편해보이지는 않았다.

멀리 홍지문이 보인다. 홍지문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려 만든 문이다.

이광수 별장터에서 부암동 주민센터로 가는 길에 석파랑 별당을 들렀다.

별당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어서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진짜 '석파정'은 근처에 있는 '서울미술관' 뒤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조금 올라가면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비를 맞으며 내려가던 계단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부암동 주민센터 근처에 '무계원'이 있다.

무계원의 건물은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등에 쓰였습니다.

조선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기도 하였던 오진암은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서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낸 역사적인 장소였습니다.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고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장소입니다.(출처 : 종로문화재단)

무계원에서 가까운 곳에 '현진건 집터'가 있다. 지금은 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폐쇄되어 들여다볼 수도 없다.

현진건은 한국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인데, 그가 이룬 업적보다 훨씬 낮게 평가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그가 친일한 경력으로 비판받는 건 당연하지만, 그의 작품 전체가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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