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 아워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화. 영화의 내용도 그렇지만, 여성 영화라는 점에서, 남성인 내가 여성의 심리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영화 자체도 어렵긴 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한국에서는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을 바탕으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만들었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만 봐도 훌륭하다. 이렇게 멋진 배우들이 저마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데, 여기에 영화 내내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은 금상첨화다.
이 영화를 특별히 멋지다고 느끼게 한 힘이 바로 배경 음악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들어간 음악이 어느 순간 마음을 울리고 있음을 느꼈다. 스토리는 복잡하고, 인물들의 심리는 난해하지만 그런 모든 어려움을 음악이 부드럽게 녹여주고 있다.
세 명의 여성,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왔던 여성들의 삶은 객관적인 시선(관객)으로 바라보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단함과 억압에 대한 고통과 분노의 감정이다. 남성들도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세 명의 여성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에 관해서는 영화 내내 충분히 그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내가 주목하게 되는 인물들은 버지니아의 남편과 로라의 아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남성들이고, 이 영화에서 가해자가 아닌, 철저한 피해자로 나온다.
세 명의 여성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고통으로 괴로워 하지만, 두 명의 남성은 그렇게 실존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성-아내와 엄마-을 바라보면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버지니아(니콜 키드먼)가 자살을 하려고 집을 뛰쳐나갔을 때, 기차역까지 달려와 아내를 발견한 루이스는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터뜨린다.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고통을 받는 아내를 위해 런던에서 시골로 이주했고, 아내를 위해 출판사를 차렸으며, 아내가 겪는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남편 루이스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는 오로지 자신 내면의 고통에만 집중하지만, 루이스는 아내를 보살피는 것은 물론 집안을 이끌어 가야 하는 만만찮은 생활의 압박을 받는다. 물론 그가 부르주아여서 재산이 넉넉하다고는 해도, 선병질의 병약하고 히스테릭한 아내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루이스가 기차역 의자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눈물을 보일 때, 나는 오히려 버지니아가 겪고 있는 고통보다 루이스의 고통에 더 공감하게 된다. 버지니아가 겪고 있는 내면의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루이스는 버지니아로부터 받는 '외부로부터의 고통'이기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격렬한 스트레스를 견디고 버지니아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추스린다. 물론 버지니아는 정상의 상태라고 하기는 어렵다. 스스로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겪는 극도의 우울증은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걸 루이스나 의사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버지니아는 결국 자신의 삶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살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는 버지니아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런 감정은 이성적 판단으로는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 버지니아는 정상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또 한 명의 피해자는 50년대를 살았던 로라(줄리안 무어)의 어린 아들 리치(리차드)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불안정한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리치의 가족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으로 안정된 가정이었고, 불편하거나 불만족할 만한 구석이 거의 보이지 않는, 평온하고 따뜻한 가정이고, 가족이었다. 리치의 아버지 역시 다정하고, 성실한 샐러리맨이었으며 아내인 로라를 사랑하고, 아들도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로라는 끊임없이 자살충동을 겪는다. 로라 역시 늘 불안정한 표정과 행동으로 아들 리치는 불안과 두려움에 떤다. 엄마인 로라 역시 자신의 내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지만, 어린 아들 리치는 엄마의 불안정한 모습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결국 로라는 자살까지는 못하지만 어린 아들과 딸을 남겨두고 가출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남편은 그렇다고 해도, 어린 아들과 딸은 무슨 죄가 있어서 엄마와 생이별을 해야 했을까. 자신의 실존적 문제 때문에 자기가 낳은 두 아이를 버려두고 혼자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것까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 할까. 나는 로라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 리치의 입장에서 엄마를 원망하고 비난하게 될 것 같다.
현재를 살아가는 클래리사(메릴 스트립)는 출판사 편집장으로 그의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이다. 그에게는 남편이 있지만 남편은 에이즈에 걸려 혼자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클래리사의 집에는 딸과 함께 자신의 여자친구가 산다. 여자친구는 육체적 관계를 맺는 연인을 말한다.
오랜 시간 남편인 리차드를 돌보면서, 클래리사는 자기 내부에 쌓이는 감정을 누르고 살지만, 남편이 상을 받는 축하파티를 준비하면서 폭발한다. 남편은 유명한 시인이고, 성공한 작가지만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클래리사는 많은 시간 그를 돌보면서 살아왔다.
버지니아의 남편 루이스가 우울증을 앓는 아내 버지니아를 돌보면서 살아왔던 시간과 클래리스가 에이즈에 걸린 남편 리차드를 돌보면서 살아왔던 시간은 서로 대비되면서 비슷한 감정을 보여준다. 정신적(버지니아), 육체적(리차드) 고통을 겪는 사람 옆에서 그를 돌보며 살아가는 배우자의 입장이 어떤가를 관객은 일정부분 공감하게 된다.
또한 이 영화에서 그런 고통을 받는 두 사람-버지니아와 리차드-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고통의 관계가 풀리기를 바란다.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하지만 관객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다-클래리사의 남편 리차드가 바로 로라의 어린 아들이었다는 것, 리차드는 어릴 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망치는 결정들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세 명의 고통스러운 여성들의 삶이-그들도 어쩔 수 없었지만-다른 사람에게 미친 불행한 영향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리차드의 고통에 특히 공감하게 된다. 내가 남성이어서 더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세 명의 여성보다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은 리차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아름답다. 특히 영화 전편을 흐르고 있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음악만을 듣고 있어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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