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약왕
범죄 영화, 특히 마약을 다루는 범죄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영화를 보면서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영화들-좋은 친구들, 비열한 거리, 카지노-이 떠오르고, 알 파치노 주연의 '스카페이스'도 떠오른다. 심지어 그동안 한국영화 가운데 범죄영화에서 볼 수 있는 클리셰들도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
부산 일대를 무대로 벌어지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범죄와의 전쟁'과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범죄와의 전쟁'이 1980년대 초반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 '마약왕'은 그 직전의 시기인 1970년대 부산과 한국의 시대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600원일 때, 마약왕 이두삼은 10억원을 벌었다. 그는 대만에서 원료를 밀수해 부산에서 마약을 제조한 다음, 완제품을 일본으로 밀수해 팔아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금고에 쌓아둔 돈으로 정치권에 접근해 사회에서 인정하는 공식 직함을 맡고, 정치권과 정보기관, 사법부 등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뇌물을 주며 자신의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한다.
70년대에 이런 현실이 있었다는 건 놀랍다. 영화니까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이 시기 소시민의 삶은 대부분 가난에서 허덕거릴 때였고, 하루 세 끼니의 밥을 먹고, 아이들이 온전하게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만 있어도 중산층이었으며,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20%도 안 되었던 때였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월급이 몇천원, 몇만원에 불과했는데, 범죄자는 대기업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떵떵거리고 살았다는 것이 놀랍다. 그리고 이들이 결국 권력에 줄을 대고, 소위 '사회지도층'이 되어 사회를 '지도'했으니 이미 군사독재로 망가진 나라가 더욱 철저하게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60년대에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그룹의 경영자가 관련된 밀수사건이 터졌다. 기업을 경영하는 자본가도 대놓고 밀수를 할 정도로 나라가 썩었는데, 그 뒤에 역시 근본부터 잘못된 군사독재권력이 개입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한국에서 비뚤어진 권력과 자본의 역사는 해방 이후 적산건물의 불하를 시작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권력과 범죄자들의 야합과 부패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도 그렇지만, 조직폭력배 두목이 '회장'으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서민들 개개인이 알고 있는 사회의 깊이는 매우 얕을 수밖에 없다. 지나고 보면, 그때는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세상에서 살았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개인의 권리가 높아지면서 과거 형태의 범죄는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직폭력배 집단에 의한 범죄보다는 오히려 자본이 저지르는 범죄가 더 많고, 다양하며, 악랄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제는 범죄를 자본이 스스로 저지른다. 물론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며, 자본은 과거의 조직폭력배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리사채의 경우, 겉으로는 대부업이라고 하지만 그 자체가 잔혹한 폭력성을 띈 자본의 폭력이며,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는 것을 보면, 자본 그 자체가 폭력집단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자본과 권력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의 지배자는 명백히 '자본' 즉 '돈'이 되었다. '자본(돈)'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든, 사기를 쳐서 재산을 불리든 '자본(돈)'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는 '사회적 힘'을 갖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양심이나 자질, 능력, 재능, 도덕성, 윤리, 이타심 같은 높은 가치는 물질(돈)로 교환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돈)과 돈을 제외한 인간의 지성이 타락하게 되고, 수준이 낮은, 천박하고 무식한 인간들 가운데 자본(돈)이 많은 자들이 권력을 차지할 확률이 높아진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두삼이 보여주는 행동이 그렇다. 그는 자신이 권력을 만들거나,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권력을 빌린다. 범죄자, 사기꾼, 모리배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거나, 권력에 기대 사회를 진흙탕으로 만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더러운 물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전과 14범의 범죄자 새끼가 서울시장이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사기꾼 새끼가 권력을 쥘 수 있도록 만든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오로지 돈이 최고라는 가치를 갖는 인간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타락한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세상에서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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