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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851

2000년-회사 워크샵 회사에서 에버랜드로 워크샵을 갔다. 에버랜드에는 놀이기구만 있는 게 아니라, 숙소동이 따로 있어서 통나무로 지은 근사한 건물이 있다. 회사에서는 '워크샵'이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에게 단체로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데, 보통은 그 팀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배려를 해 준다. 우리는 에버랜드로 가서 놀이기구를 타지는 않고, 미술관 등을 다녔다. 마침 비가 내려서 분위기가 좋았다. 2011. 11. 28.
2000년-과천 동물원 10월 초에 다녀 온 과천 동물원. 똥이가 만25개월이 되었다. 이 무렵에 똥이엄마가 '육아일기'를 열심히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가까운 일기를 보면 이렇다. '영걸'은 우리 동네 상가에서 인테리어 소품점을 하는 가게집 둘째아들 이름입니다. 똥이보다 일주일 늦게 태어난 영걸이는 똥이에게는 가장 친한 동무입니다. 영걸에게도 똥이가 가장 친한 동무인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똥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영걸' 친구 이야기를 합니다. 영걸 친구가 상가에 나와있는 지가 똥이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영걸 친구, 집에 밥 먹으러 갔다, 영걸 친구 코 자러 집에 갔다, 영걸 친구, 안 나왔다. 바보. -.-............" 한 살 위인 영걸형 영호와 짝꿍으로 다니는 영걸이가 상가에 나와있을 때 똥이가.. 2011. 11. 28.
2000년-똥이 생일 똥이가 만2년이 되는 생일. 24개월이 되는 날, 똥이는 대소변을 분명하게 가렸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걸 보면, 퍽 신기하고 대견하다. 모든 부모에게 모든 자식들은 경이의 대상이다. 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서 부모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는 늙지만, 자신이 늙는 것조차도 아이의 성장으로 행복해진다. 아이를 키우면, 삿된 생각을 버리고, 가능한 좋은 일, 옳은 일, 행복한 일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는 부모를 성장시키고, 마음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는 '성인'이다. 2011. 11. 28.
2000년-워크샵 8월 말에 팀 워크샵을 다녀오다. 용인 에버랜드와 설악산 켄싱턴 호텔에서 워크샵과 팀 빌딩 과정을 했다. 회사 직원을 반씩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워크샵을 했고, 팀워크를 향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맞다. 회사에서 워크샵을 하는 건, 직원들에게 잠시 긴장의 시간을 풀어주고, 한숨 쉬어가는 '쉼표'를 만들어 준다는 뜻이겠다. 회사로서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지 직원에 대한 '투자'의 성격이 강한데, 그런 만큼, 워크샵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는지 궁금하다. 2011. 11. 28.
2000년-경북 여행 2000년 8월, 여름휴가를 경북 일대로 다녀왔다. 불영사, 불영사 계곡, 수정 광산, 성류굴, 울진 바닷가, 경주, 불국사, 부산 등 경북 내륙을 중심으로 다녔다. 경북 일대는 그 때 다녀오고는 아직 다시 못 가봤으니 10년이 넘었다. 불영사 계곡이 퍽 아름다웠다는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름다운 자연이 망가지지 않고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1. 11. 28.
2000년-에버랜드 2000년 여름. 동생 가족과 함께 에버랜드에 다녀오다. 아이가 어릴 때, 놀이동산을 자주 가게 되는데, 그게 에버랜드였다. 에버랜드는 연간 가족회원권을 끊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몇 해는 참 자주 갔는데, 에버랜드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나들이를 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어린이들이 놀 곳으로 에버랜드만한 곳이 없다는 것도 이유다. 하지만 에버랜드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에버랜드는 '삼성비리'의 근원지(김용철 변호사)로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런 비리의 온상으로 '알려 진' 곳을 드나드는 것이 '건전한 소비자'가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고, 두번째는 에버랜드에 가면 비용이 많이 든다. 처음에는 점심을 가져가지 않고 그곳에서 사 먹었는데, 음식값이 상당히 비쌌다. 나중에는.. 2011. 11. 28.
2000년-강화도 여행 2000년 7월에 다시 강화도 여행을 했다. 강화도는 이제 섬이라고 할 수 없는 지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계절마다 모습이 달라보이고, 시골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전등사는 언제 가도 근사한 절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등사는 '현대화'하려는 게 오히려 못마땅한데, 그것도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2011. 11. 25.
2000년-강화도 여행 5월 28일. 친구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다녀왔다. 전등사에도 물론 다녀왔지만, 강화도에 새로 지은 한옥이 있어서 구경을 했는데, 그때 막 건물이 다 지어지고 주변 정리를 하던 때였다. '학사재'라는 이름이었는데, 외부는 전통 방식으로 지었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만들어서 생활의 편의성을 높였다. 한옥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건축물이라 어지간 해서는 한옥을 잘 짓기 어렵다. '학사재' 한옥 구경을 잘 했다. 이만한 규모라면 상당한 부자가 아니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강화도에는 귀농한 선배도 살고 있고, 동료의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도 있다. 강화도는 참 좋은 땅이지만 너무 서쪽에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1. 11. 24.
2000년-과천동물원 3월에 과천동물원에 갔었는데, 4월에 다시 다녀왔다. 아직 꽃은 피지 않고, 날씨도 추웠지만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이 나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그나마 가까운 과천동물원을 가게 된다. 아이들은 동물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들도 행복하다. 똥이의 사촌누나인 수경이와 함께 나들이를 해서 더 즐거웠다. 둘이는 사촌이지만 친오누이처럼 닮기도 했고 사이도 좋다. 누나인 수경이가 동생을 잘 돌봐줘서 그렇다. 2011. 11. 24.
2000년-안철수 소장님과 안철수 소장(당시)님과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 안철수 소장님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직원들과 이야기 나누길 좋아했다. 격의 없고, 소탈하며, 겸손한 안 소장님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누구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외유내강한 그에 비하면, 나는 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이긴 하지만, 한 때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갖고,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요즘(2011년) 안철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그것은 한국에 안철수 씨와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한국 사회는 썩었고, 올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특히 많이 배우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 가운데-현상을 반증한다. 착하.. 2011. 11. 24.
2000년-안철수연구소 사진을 보니 역삼동에 있을 때이다. 해마다 연초에는 직원 모두가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2000년에는 직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개발자들이었고, 마케팅과 영업 쪽은 소수였다. 하나의 회사였지만, 개발 파트와 비개발 파트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서, 마케팅, 영업, 관리 쪽은 보통의 회사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개발 쪽 분위기는 낮과 밤, 일과 휴식의 경계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저 사진 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알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거나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사람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2011. 11. 24.
2000년-과천 동물원 초봄에 과천 동물원에 가다. 똥이에게 동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원에 가는 것이 점점 더 꺼려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동물원에는 여러 번 갔다. 똥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공식 선언을 했다. 앞으로 동물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물론, 동물원에 갖힌 동물이 불쌍한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동물은 자연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 환경이 나빠지면서 동물의 생존이 위협 받는 현실이다. 동물원은 동물을 가둬놓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나쁜 점도 있지만, 동물의 멸종을 막고, 멸종 동물을 보호하고, 사람들이 동물을 더 잘 이해하고 애정을 갖도록 하는 좋은 점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동물을 보호하고 멸종을 막는다는 바탕에는 인간의 파.. 2011. 11. 24.
2000년-직원들과 낚시 1999년 12월 말에 Y2K 문제로 긴장을 하다-안철수 소장님은 당연히 문제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언론의 호들갑때문에-별 일 없이 지나가고 팀원 모두 나들이를 다녀왔다. 당시 내가 있던 팀은 기존에 개발을 계속해 왔던 V3 시리즈가 아닌, 완전히 다른 보안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팀이었다. 이 팀에서는 '앤디'라는 제품을 출시까지 했지만, 그 제품과 팀은 나중에 해체되어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건 제품의 품질 때문이었지만, 그 이면에 다른 이야기도 좀 있다. 우리는 사이 좋고, 즐겁게 회사 생활을 했지만, 제품의 결과가 썩 좋지 못하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팀은 해체되고 함께 했던 동료들 몇이 퇴사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사회에서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이렇게 즐거운 한 때를 보낸 시간으로.. 2011. 11. 24.
1999년-동기 송년회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이 모여 송년회를 했다. 동기라고는 해도, 같은 부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무들은 다섯 명이고 동기의 친구들이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이 때를 정점으로 동기들과의 모임은 이후에 거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몇몇 동무들과는 만났지만 여럿이 만나는 모임은 없었는데, 각자의 삶이 그런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고 결혼하기 전에는 비교적 자주 만났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동기들과 만나는 기회가 더 어려워지는 건, 단지 생활이 팍팍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대부분 힘들고 고생스러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저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 한 친구는 스스로 세상을 버렸고, 다른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 먹을수록 삶이, 인생이 만만치 않음.. 2011. 11. 23.
1999년-덕수궁 1999년 초겨울에 친구 가족과 함께 덕수궁에 갔다. 불과 한 달 전에 덕수궁을 다녀왔는데, 사진을 보니,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지금은 덕수궁 내부의 건물을 복원한 게 달라졌고, 표지판과 안내문 등이 조금 더 자세하고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 건물은 그대로다. 당연한 일이다. 고궁은 의구한데 사람만 달라질 뿐이다. 저 사진 속의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으니. 2011. 11. 23.
1999년-강원도 여행 1999년 가을에 동생네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 여행을 했다. 설악산, 낙산사 등을 돌아보았는데, 그때는 낙산사가 불에 타 사라지기 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동해 일출도 보았고, 내설악 쪽으로도 들어갔다. 강원도 여행은 여러 번 했지만 갈 때마다 좋다. 2011. 11. 23.
1999년-미국여행 똥이가 돐이 되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뵈러 미국엘 다녀왔다. 지난번 첫 미국여행에서는 처제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에는 직접 차를 운전해 오하이오에서 뉴욕까지 왔다. 차로 운전해서 약 14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주로 고속도로만 달려서 다양한 구경을 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자연풍경도 상당히 다채롭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뉴욕에 비하면 오하이오는 변방이고 시골이긴 하지만 어딜 가나 초대형 쇼핑몰이 있고, 넓은 도로와 다양한 종류의 차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멀쩡하게 서 있었는데,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쌍둥이 빌딩으로 비행기가 돌진하고, 빌딩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무척 놀랐다. 똥이를 데리고 쇼핑몰에 갔더니, 미국 아주머니들이 하나같이 똥이를 보며 '큐.. 2011. 11. 23.
1999년-돐잔치 1999년 7월에 안철수연구소에 입사했다. 우리는 똥이가 태어나고 운이 틔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지금보다는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원도 적었지만, 그만큼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온정적 면이 있었다. 안철수 대표를 안 것은 훨씬 전이었지만, 내가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개발자도 아니었고, 컴퓨터는 어느 정도 했지만 이렇다할 경력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기회였고, 몇 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돌잔치는 무역센터 건물에 있는 '바이킹뷔페'에서 했는데, 마침 회사하고 가까워서 안철수 대표와 직원들이 모두 참석해서 축하해주었다. 아들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영광이었다.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던 기억은 즐겁고 행복했.. 2011. 11. 22.
1998년-석모도 여행 갓난 아이를 데리고, 한겨울에 강화도 옆의 석모도엘 갔다. 날씨는 염려했던 것보다 춥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석모도는 이때 가보고는 지금껏 못 가봤으니, 꽤 오래되었다. 그나마 차를 가지고 다녀서, 움직일 때는 차 안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고보면,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다. 아기가 그런 것을 알 리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다니면 무의식 중에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니, 그때 생각이 조금 난다. 역시 기록은 소중하다. 2011. 11. 22.
1998년-똥이 백일 똥이가 백일이 되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을 보니, 조금 더 잘 놀아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든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지나고 보면 많이 부족하고 잘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세상을 조금 넓게 볼 수 있어서일까. 부모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부모가 되려면, 부모가 되기 위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느끼는 게 나만은 아니리라. 2011. 11. 22.
1998년-똥이 1998년 9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임신하고 직장 생활하며 입덧도 심하게 하고, 배가 불러오면서 허리며 꼬리뼈 부분이 아파서 쩔쩔 매던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아이가 태어날 때,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와 함께 아내의 고생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아내의 출산 앞에서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것이리니. 결혼과 출산은 인생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들이고, 그 소중함은 비교할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생활 방식과 기준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좋은 부모는 처음부터 없겠지만, 노력하는 부모는 아이와 함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2011. 11. 22.
1997년-에버랜드 주말에 에버랜드에 가다. 이날 일기를 보자. 1997년 10월 25일 토요일 오후에 애버랜드에 놀러갔다. 면숙 씨와 함께 셋이 애버랜드에서 신나게 놀았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잠깐 비가 내려서 기온이 많이 내려가 추웠다. 마침 옷을 든든히 입고 있어서 춥지는 않았고 놀이기구를 타고 집에서 가져간 김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조용필 콘서트도 보았다. 조용필 콘서트를 봤다는 내용이 있어 기억을 해봤지만, 기억 속에는 없다. 역시 기억을 믿을 것이 못 된다. 2011. 11. 22.
1997년-강원도 여행 가을에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이때의 기록도 일기에 남아 있다. 1997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설악산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다. 지난해 신혼여행으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찾은 이후 일년만에 다시 여행을 가는 것이다. 8일 오전에 집에서 출발해 영동 고속도로로 강릉을 향했다. 여행을 가면서 염두에 둔 것은 지난해 교통사고 사건을 신고하는 것이었다. 일년이 가깝도록 해결이 되지 않고 있어 속을 썪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순찰대 제7지구대가 있는 진부에 들러 사고 신고를 했다. 경찰은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토요일(11일)에 양쪽이 모두 만나도록 약속을 했다. 우리는 다시 강릉을 지나 주문진에 들러 오징어 회를 조금 사 가지고 속초에 있는 한화콘도에 도착했다. 가을의 맑고 투명한 하늘과 짙어가는 가.. 2011. 11. 22.
1997년-제주도 여행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 몇 해 전 혼자 제주도에 왔다가 비 때문에 서둘러 떠난 이후, 정식으로 처음 오는 여행이다. 사진은 많지만, 사진만으로는 충분한 기록이 되지 못해서 일기를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일기가 있었다. 1997년 5월 1일 목요일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 준비를 했다. 동생이 차로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비행기는 1시간 가량 늦게 제주도에 도착했다. 날씨는 매우 좋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상쾌한 바람, 투명한 햇살이 서울과는 사뭇 다르다. 공항에서 여행사 사람이 나왔지만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서귀포 가는 버스를 타고 신라호텔에서 내렸다. 중문단지 안에 있는 신라호텔은 국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하루밤 자는 비용이 무려 27만원 정도라고 하니 엄청난 가격이다. 호텔에서 방.. 2011. 11. 22.
1997년-에버랜드 에버랜드에 가다. 결혼하고도 처음이지만, 태어나서 처음가는 에버랜드다.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고는 해마다 연간 회원권을 가족단위로 끊어서 다닐 만큼 몇 해 많이 다녔는데, 에버랜드가 좋아서라기 보다는-사실, 싫어한다-다닐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에버랜드는 발을 끊었다. 2011. 11. 22.
1997년-전북 여행 1997년 봄. 아내와 둘이 전라북도 일대를 여행했다. 백양사, 강천사, 회문산 지구 일대를 다녔는데,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지금처럼 디지털 카메라였다면 훨씬 많은 사진이 있었을텐데. 여행의 기록은 소중하다. 우리는 과거를 거의 잊고 살아가는데, 그나마 남는 것은 글이던 사진이던 기록일 뿐이다. 기록이 없다면, 우리의 기억도, 우리의 존재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일기를 찾아보니, 1997년 1월부터 3월까지의 일기가 사라졌다. 4월부터는 파일이 살아 있는데, 하드디스크를 여러 번 교체하는 과정에서 파일에 문제가 생긴 듯 하다. 하여간, 내 블로그도 그렇고, 내 인생도 그렇고, 삶의 전환점은 결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결혼식을 마치고 한 이 여행이 나의 첫 여행이 되겠다. 비록 자세한.. 2011. 11. 22.
1996년-신혼여행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미국에서 오신 장인, 장모님과 고모님을 모시고 갔다. 강남에서 오후에 출발해 대관령을 넘어갔는데, 대관령을 넘어가다 사고가 났다. 뒷차가 우리 차를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어가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 바람에 우리 차의 왼쪽 옆부분을 들이받은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사고라. 경찰도 부르지 않고, 서로 합의를 하고 헤어졌는데, 무려 1년동안이나 고생을 했다. 그나마 차만 조금 부서지고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우리는 호텔과 콘도에 각각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속초와 설악산 일대를 구경하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요즘에는, 아니 우리가 결혼할 때도 신혼여행을 국내 여행으로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을 듯 하다. 외국으로 신혼여행 가는 걸 당연하게 여.. 2011. 11. 22.
1996년-결혼식 결혼 한(또는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결혼은 인생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불투명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삶이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안정이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만혼이었고, 부모님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우리 둘이 결혼 준비를 했다.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이러다 아내에게 혼나겠다.) 우리는 직접 청첩장을 만들고, 가구를 구입하러 다니고, 아파트를 계약하고,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결혼사진을 찍으러 덕수궁엘 가고, 잡다한 준비와 계약과 살림 장만을 했고, 강남의 어느 뷔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말하면 가슴아픈 사연들이 결혼.. 2011. 11. 22.
1990년대-미국여행 태어나서 처음, 우리나라를 벗어났다.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해외에 자주 다니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외국에 가보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살았다. 말로만 듣고, 영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서양, 그 가운데서도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엘 갔다. 80년대에 미국은 전두환 군부독재를 승인한 제국주의이자, 팍스아메리카나를 부르짖는 깡패국가였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미국 땅, 뉴욕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다르게 느낀 것은 독특한 냄새였다. 이국의 체취는 낯설었다. 그들이 이룩한 물질문명은 눈부셨고, 그 거대한 스케일에 위압당했다. 미국은, 다른나라에게는 제국주의 깡패였지만, 그들의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국가였고, 문화 국가였다. 비록 가장 극적인 자본주의의 착취가 이루어지.. 2011. 11. 21.
1990년대-홀로서기모임 90년대 중반, 하이텔의 동호회 가운데 '홀로서기'라는 모임이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 미혼이라는 것과 대부분 30대라는 것. 단지 결혼하지 않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동호회가 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긴 하지만, 이념이나 세계관과는 아무 관계없이 오직 친목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들 외로웠을테고, 아닌 척 했지만 서로가 짝을 찾는 치열한 눈치싸움이 없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저 사진 속에 미래에 아내가 될 사람도 함께 있는 걸 보면. 우연과 기회들이 모여 하나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 산행을 시작으로, 우리의 관계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2011.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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