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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851

1980년대-04 사진만 보면 어디 멋진 곳에 놀러간 걸로 알만하겠다. 날짜는 선명한데, 내 기억과는 맞지 않는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거겠지... (친형같은) 형과 함께 소록도에 갔다. 단 둘이. 무슨 목적으로 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형의 뒤만 따라다녔는데,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에서 내려 걸어들어갔다. 한센병 환자들도 양성환자와 음성환자는 따로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음성환자의 집과 교회를 방문했다. 작고 낡은 스레트 지붕의 그 집은 여느 가정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집앞에 펼쳐진 파랗게 아름다운 남해 바다가 있어, 마치 별장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느긋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음이 좀 불편했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께름칙하기도 했다... 2011. 10. 31.
1980년대-03 (친형은 아니지만 친형이나 다름없는)형과 함께 운영하던 헌책방에서 찍었다. 사진의 연도가 1989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진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면 내 기억이 이상하던가. 내가 헌책방에서 일을 한 것은 군대 가지 직전까지여서 분명 1982년 이전이어야 한다. 1989년이라면, 나중에 나오지만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일하러 다닐 때였다. 이 사진과 내 기억이 일치하지 않으니 퍽 기이하다. 이 사진을 찍은 기억은 난다. 왼쪽 인물은 후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 헌책방을 중심으로 시흥동 일대의 청년들이 많이 모였고, 독서회는 토요일, 일요일로 나뉘어 모일 정도로 참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문에 경찰의 정보과 형사가 늘 주시하고 있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 2011. 10. 27.
1980년대-02 군에 입대하기 전의 사진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1982년 이전이 되겠다. 이 비밀조직원 또는 독립군 같은 포즈는 뭘까? 저 손에 들린 걸 알아보는 사람은 나이가 있는 사람이다. 흔히 '가리방'이라고 부르던, 등사기에서 쓰던 기름종이다. 철필로 긁어 써야 해서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이 작업을 하면서 가운데 손가락 첫마디에 굵은 굳은살이 박혔다. 독서회 소식지를 만들었는데, 기획, 편집, 제작을 혼자 맡아서 하다보니 재미도 있고 좋은 경험도 했다. 기억으로는 7-8호 정도를 만든 것 같은데, 80년대 중반에 모두 태워버렸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 전역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부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이 조직활동으로 수배당하곤 해서, 나까지 보안에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날.. 2011. 10. 27.
1980년대-01 현충사 스무 살 무렵 현충사에서 찍은 사진. 나를 독서회로 이끌어 준 형과 함께 형의 고향인 온양으로 나들이를 했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이 형과 신기한 인연의 고리가 연결된다. 아내의 고향도 온양 근처인데, 장인어른이 당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이 형이 장인어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 무렵, 그러니까 1980년 5월 18일 이후, 내가 살던 서울의 변두리에서도 광주에 관한 '유언비어'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신문들은 검열에 걸려 일부분 백지로 나오곤 했는데, 입에서 입으로 떠다니는 소문이 오히려 정확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고, 아직 어렸던 나는 그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군인이 그런 짓을 .. 2011. 10. 27.
1970년대-04 70년대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과 의미를 갖는 사진 한 장. 70년대, 10대에 독서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학교라는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최초의 '조직'을 경험했던 독서회 활동. 이 경험은 내 생각을 키우고, 교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시기의 독서회 활동은 대단히 활발해서, 처음 일요일 모임만 있던 것이 나중에는 일주일에 일곱번의 모임이 따로 조직되었다. 즉, 월요반, 화요반, 수요반, 목요반, 금요반, 토요반, 일요반이 생겼는데, 각 반마다 선의의 경쟁이 붙어 모임은 활기가 넘쳤다. 지금도 있는 사직공원 안의 종로도서관에서 열린 독서회 모임에서 많은 책을 읽고, 발표를 하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토론과 소식지 만들기, 글쓰기, 그림.. 2011. 10. 27.
1970년대-03 10대 때를 기록한 몇 장 안 되는 사진 가운데 하나. 누나와 둘째 조카, 막내 조카와 함께 찍었다. 청년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다. 도시의 변두리 산동네에서 살며, 나날이 노동으로 힘겨운 시기였을 때였다. 출퇴근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하루 19시간 정도를 일하던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에 코피가 고여 말라붙어 베개와 얼굴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날마다 세수대야가 시뻘건 피로 물들고, 편도선이 부어 침도 삼킬 수 없는 통증에 자주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뚜렷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온몸에서 열이 펄펄나고, 목이 부어 침도 삼키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에 갔을 때, 마취도 하지 않고 편도를 메스로 찢고 피고름을 빨아내던 장면이다. 몸이 극도로 피곤해 면역력이 떨어지면 편도.. 2011. 10. 27.
1970년대-02 동생 사진이다.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했다. 고생한 걸로 치면 나보다 더 많이 했다. 어릴 때도 착한 동생이었지만, 지금도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건실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모범시민'이 되어 있어 자랑스럽다. 사람은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에게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겠지만, 올바른 품성은 상당부분 유전적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내 동생의 따뜻하고 건강한 품성은 나와는 다르다. 침착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품성으로 지금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전문가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대학공부를 했다면 사회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내 동생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자동차 도장' 전문.. 2011. 10. 27.
1970년대-01 유일하게 남은, 동무들과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마포의 한 사진관에서 찍었는데,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던 동무들은 지금 없다. 사진 왼쪽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명석해 보이는 동무는 '친구란 하나의 육체에 깃든 두 개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동무다. 그도 젊은 시절, 괴로운 시간 속에서 헤매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진 뛰어난 재능도 그가 살아가는 희망이 되지 못했다. 조금 더 참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며, 결혼하고,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이 되었을까. 1990년.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부고를 듣고, 그의 장례를 치른 후, 내 삶도 그 시간에서 멈췄고, 더 이상의 시간은 그냥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기억도,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 2011. 10. 27.
아버지 유일한 아버지 사진이다. 1912년에 태어나 60여년의 인생을 살다 간 남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세 명의 이복형들은 아버지를 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인쇄소 문선공이었고, 그 뒤에는 침술사였다. 문선공에서 침술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상당히 불가해하지만, 그의 삶이 실패한 인생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에게 본받을 것은 '한자를 5만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5만자의 한자를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으로보면 대단한 학식일 수도 있지만, 구슬도 꿰야 보배라고, 알고 있는 지식을 '학문'의 수준으로 연장하지 못한 것은 그가 '기능공'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전해 듣기로, 아버지의 선대는 집안이 부자였다고 했다. 평북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도 살았다고 하는.. 2011. 10. 27.
1960년대-02 이 사진에서 작은 누나는 빠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40년이 넘도록 작은 누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어릴 때 태어나 자랐던 마포 공덕동, 도화동의 기차뚝방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나는 이제 환갑이 넘었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누나의 도움으로 자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모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었으며, 염치도 없었다. 적어도 딸에 대해서만큼은. 누나는 오직 큰딸이라는 죄로 부모와 동생을 거둬야 했고, 무진 고생을 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도 누나였고, 어머니에게 가장 잘 모신 사람도 누나였다. 능력이 없어서 누나에게 작은 도움도 주지 못해 안타깝다. 내가 받은 도움의 극히 일부라도 돌려드려야 할텐데. 오른쪽의 저 인상 쓰고 있는 어린이는, 나이가 들어도 내내 .. 2011. 10. 27.
1960년대-01 '멋진 하루' 블로깅을 시작한다. 이 기록은 내가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고, 추억의 집합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보다는,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웠던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숨기거나 피할 수 없는 내 삶이기도 하다. 지천명이 되고 나서도 늘 느끼는 건, 여전히 어리석고 비겁한 나의 모습이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되기는 틀렸구나, 애초 '나'라는 인간의 그릇은 이 정도구나를 깨달은 것만도 다행이랄까. 이 사진은 내가 가진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내 부모님도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으며, 나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가난이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불편한 건 분명하다. 더구나 70년대 중반에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면서 그나마 있던 사진이며 집안의 물건들을 다 잃어버려 어릴 때 사진.. 201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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