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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851

1990년대-어머니 고희연 1994년 12월 3일. 어머니가 일흔살을 맞아 고희연을 했다. 가족들이 모였고, 친구들도 모였다. 누나 친구들이 많이 왔고, 내 동무들도 올 수 있는 동무들은 모두 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아직 미혼이었고, 동생은 결혼을 했다. 어머니 친구들과 누나 친구들은 왜 아직 결혼을 안하냐고 성화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 동무들이 누나 친구들과 함께 놀아주어서 잔치 분위기가 좋았다. 이날 온 손님들은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놀다 간다고 했다. 동무들이 고맙다. 2011. 11. 20.
1990년대-한글과컴퓨터 나는 의 탄생을 알고 있는 소수에 속한다. 공병우 박사님이 계시던 '한글문화원' 건물 1층에 이찬진 씨와 그의 동료들이 '한글'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을 때부터 드나들었으니 말이다. '한글'의 초기 베타버전부터 꾸준히 매번 베타버전을 테스트하고, 버그리포트를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사진 역시 '한글과 컴퓨터'가 잘 나가던 때의 사진이다. 그때 '한컴'은 '한글' 사용자들 가운데 고급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베타테스트와 버그리포트를 꾸준히 받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고급사용자들의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한컴'에서 지원을 해주었다. 이때는, '한글'을 비롯해 '훈민정음', '이야기' 등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사용자들의 노력이 상당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소프트웨어의 베타.. 2011. 11. 18.
1990년대-우예모임 91년부터 94년까지. 예전 독서회 친구들을 중심으로 '우예'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예'는 '우리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문장에서 따왔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문화예술 공연을 보러 다녔다. 장르는 따로 없었고, 영화, 연극, 뮤지컬, 전시회 등을 다니며 문화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고, 가끔 이렇게 산행도 하고, 놀이공원에도 다녔다. 이 모임은 하나같이 친구들이어서 나이, 성별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편하고,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살면서 어느 한 시기에 만난 좋은 친구들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이 사진 속 인물들도 거의 연락이 끊겼고, 가운데 있는 동무 하나와 연락이 닿을 뿐이다. 모두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가난했지만, 우.. 2011. 11. 18.
1990년대-바른글 지리산종주 '바른글'에서 지리산 종주를 했다. 여성들이 많아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두 번째 지리산 종주였고, 첫 시도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8월 한여름이었지만 밤이 되면 덜덜 떨리만큼 지리산은 추웠다. 우리는 밤에 텐트를 치고 밥을 해먹으면서 2박 3일의 종주를 했는데, 정작 천왕봉까지 올라간 건 나 혼자였다. 천왕봉을 앞두고 모두들 바쁘다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천왕봉 아래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잠을 잤지만, 너무 추워서 새벽에 불을 피워놓고 아침을 맞았다. 혼자 천왕봉에 올라 아침해를 보고, 내려와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혼자 갔다 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밤을 새워 아침에 도착한 제주는 우기여서 비가 많이 내렸다. 비 때문에 여행.. 2011. 11. 18.
1990년대-바른글 모임 1992년 무렵에 자유기고가로 일했다. 주로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매달 원고를 썼는데, 어떤 달에는 원고지로 800매 이상을 쓸 때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자유기고가들이 모여 '바른글을 위한 자유기고가 모임(바른글)'을 만들었는데,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명맥은 97년까지 이어졌지만, 회원 수는 많지 않았다. 이때 만난 동무들 가운데는 여전히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 둔 동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동무 등 다양하다. 바른글 모임을 하면서 자극도 많이 받고, 배운 것도 많았다. 하지만 자유기고가로 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원고료가 너무 낮았고, 먹고 살려면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취재하고 글쓰는 일이 육체노동보다 쉬운 것 .. 2011. 11. 18.
1990년대-컴퓨터출판동호회 내가 컴퓨터를 처음 만진 때는 1989년이다.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었다. 케텔에 이어 하이텔로 오면서, 몇 군데 동호회에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가장 유명한 동호회는 OSC, 산사랑, 애니메이션, 바른통신모임, 컴퓨터출판동호회 등이었다. 이 가운데 컴퓨터출판동호회(DTP)는 창립 멤버와 운영진까지 했고, 내 직업과도 관련이 많아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동호회였다. 당시에는 워드프로세서인 '한글'을 비롯해 '훈민정음' 등 전문 문서편집 프로그램이 나오던 때여서 문서편집에 관한 관심과 활동이 더욱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국내 최초로 HP에서 수입한 레이저프린터와 스캐너 등을 공동구매하기도 했고, 세미나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 무렵의 어.. 2011. 11. 17.
1990년대-출판사 91년 5월. 출판사 가족들과 야유회를 갔다. 출판사의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열심히, 최선을 다 했다. 일기를 쓰고 있어서 당시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1991년 2월 19일 화요일 업무라고 할 것도 없는 나날이다. 긴장감이 없는 상태인데,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아침에 여민사와 학원에 들러 귀찮은(?) 일을 끝냈다. 책을 부담없이 만들어 낼 날이 언제쯤일까. 제작비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광고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동안 내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해왔는데,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를 믿고 맡긴 형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투자한 돈도 상당한데, 내가 마치 실습비로 쓴 것같아서 더욱 미안하다. 이제는 조금 감각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어렵다. 일단 .. 2011. 11. 17.
1990년대-원덕개울 엊그제 김장을 함께 담근 양평 동무네 가족과 함께 개울로 천렵을 갔다. 사진처럼, 우리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며 개도 잡고, 닭도 잡아서 맛있게 먹으며 더위를 잊고 있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지만, 동무의 가족들과는 친형제처럼 지낸다. 내 마음만 그런지는 몰라도. 동무의 형제들도 나를 친동생이나 친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어서 나는 동무네 집에 가는 길이 마치 시골의 내집에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하지만, 이 사진은 우연히 남겨진 장면이지만, 이 사진 직후에 또 하나의 큰 슬픔이 밀려왔다. 김영록 선생님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동무의 집으로 온 것이다. 이때만 해도 휴대전화도 없고, 삐삐도 없어서 연락을 하려면 누군가의 집으로 해야 했다. 전화를 받고 황.. 2011. 11. 17.
1990년대-동무의 장례 그가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병원에서 눈을 뜨지 못한 채, 뇌사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의 가족들도, 나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은 황망하고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갔다. 겨우 삼십 년을 살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일까. 그에게 삼십 년은 어떤 삶이었을까. 사람은 삼십 년을 살면 많은 것을 알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때 나의 유일한 동무였으며,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무였다. 그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주대학교 야간부를 다니고 있었다. 나처럼 그도 가난했고, 가난했지만 분명 희망은 있었다. 그는 똑똑했고,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외모도 출중했다. 그런 그가 죽었다. 사.. 2011. 11. 17.
1990년대-시민출판사 90년 봄 무렵. 용길이 형이 출판사를 시작했고, 나도 출근했다. 출판사의 구성원은 용길이 형의 지인들과 주로 독서회원들 가운데 용길이 형과 가깝거나, 문학 관련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날 개업식에도 김영록 선생님을 비롯해 독서회원들이 거의 다 참석했고, 용길이 형의 사업 관련 인물들도 참석했다. 원래 용길이형은 방산시장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장사를 했는데, 그 사업으로 상당히 성공했다. 하지만 용길이형은 문학에 깊이 마음을 두고 있었고, 세계일보사의 신춘문예에서 시가 당선되어 데뷔를 했다. 출판사는 작았다. 직원이라고 해야 나와 또 한 친구,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또 한 친구'는 시를 쓰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가 이른바 '순수시'를 쓴다는 것만으로 그를 싫어했다. 그 당시에 소위.. 2011. 11. 17.
1990년대-전등사 1980년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독서회, 책방, 군대, 잡지사, 공장, 노동조합, 문예운동, 소설, 단체활동 등을 80년대의 키워드로 꼽을 수 있겠다.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짧은 기간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도 일을 했다. 그때 '전국일용직노동자협의회'를 구성하고, 일용직 노동조합의 단일 조직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다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노가다'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고, 나름대로 논문도 써서 발표했다.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가 되었어도 삶이 달라질리 없었다. 아니, 달라지긴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90년대 역시 출판, 글쓰기, 인터넷 등을 중요 키워드로 쓸 수 있겠다. 90년에 강화도를 다녀 온.. 2011. 11. 16.
1980년대-23 공장에서 해고된 후, 다시 몇 개월 동안 문화운동단체-지금의 '민예총'-에서 무크지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 잡지를 가지고 있는데, 노동자를 위한 문화운동잡지로, 내용을 쉽게 만들어 많은 노동자들이 재미있게 보면서도 노동법이나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나오는 '작은책'의 전신이라고 보면 되겠다. 무크지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하면서 두 어번을 만들고 나서 빠져나와 지역에서 만드는 월간지 창간에 뛰어들었다. 자본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노인이었다. 잡지를 만드는 멤버들이 모두 아는 친구들이어서 일은 재미있게 했다. 하지만, 지역 언론, 특히 잡지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겨우 서너번 나오고 나서 재정난에.. 2011. 11. 16.
1980년대-22 1989년의 몇 달 동안 구로공단에 있는 도금공장엘 다녔다. 더 오래 다니고 싶었지만, 중간에 문제가 생겨 해고당하고 말았다. 함께 산을 오른 공장 동료들은 대부분 후배들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소모임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눈치를 챈 공장측에 의해 해고당했다. 이 사진은 모두들 친해진 다음, 친목을 위해 소요산 산행을 했을 때이다. 도금공장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임금도 형편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나이어린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저임금 속에서 오랜 시간 일했고,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공장에 다니면서 소설을 썼고, 도금공장을 소재로 단편을 따로 쓰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을 두고 공장에 취직을 했지만, 또한 생존을 위한 밥벌이기도.. 2011. 11. 14.
1980년대-21 1988년이나 1989년 무렵의 사진. 한가하게 바닷가에 놀러간 듯한 사진이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중요한 일을 가지고 내려갔다.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비합법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지방에 있는 노동운동조직의 실무자들을 만나러 내려가는 길에 따라간 것이다. 주로 마산과 창원 쪽을 다녔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이후 그 선배는 안기부에 잡혀 2년동안 감옥에 있었고, 나는 이때 이후에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사실 지금이야 그때의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써클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활동까지도 비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독재정권이었다. 반정부 활동이라면 무조건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속성으로,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 2011. 11. 13.
1980년대-20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찍은 사진. 이 사진을 찍을 무렵, 중편소설 '하루'를 쓰고 있었다. 목표는 '제1회 전태일문학상'. 이 무렵, 구로공단에 있는 도금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공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새로운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독서회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공부모임이었고, 다섯 명 정도가 모여 일주일에 한 번 집중적으로 토론을 했다. 일주일 내내 책을 읽어서 목표한 내용을 다 읽고 이해하고 가야 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책을 읽어갈 수는 있었지만 내용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주로 경제학 관련 책들이었는데, '서양경제학논고', '한국농업의 이해', '변증법의 이해' 등등... 저 사진 속 책들을 보면, 소설책은 거의 없고, 대부분 사회과학 책인 걸 볼 수 있다. 끈으로 묶인 책들은.. 2011. 11. 13.
1980년대-19 사진을 보면, 87년 2월이다. 독서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때였는데, 절정과 동시에 후퇴기였다. 사진은 설날을 맞아 김영록 선생님 댁을 방문해 신년인사를 드리는 자리였고, 이 사진 속에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여성도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독서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들이었고, 나도 고참에 해당하는 연배였으므로 후배들이 눈에 많이 띈다. 후배라고는 해도 모두 실력들이 출중해서 선배노릇 할 내용이 거의 없었다. 독서회를 떠나게 된 건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독서회만으로는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서회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기는 했지만 체제 비판과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고, 또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도 못했으므로, 또 다른 변화가 필요했다. 따라.. 2011. 11. 13.
1980년대-18 1986년 가을, 추석 전후로 기억한다. 우리는 양평 동무네 집에서 먹고 자며 함께 지냈다. 신경림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동무들이 골방에 모여 술마치고 화투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벼도 베고, 콩도 묶으면서 사랑채에서 보름도 넘게 식객이 되었다. 마침 오늘(11-11-12)도 동무네 집에서 김장을 함께 했다. 변함없는 가족들과의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지난 시간을 그리 잘못 살아온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무가 농사 지은 쌀을 즉석에서 도정해 한 포대를 주었다. 그 마음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쌀이다. 2011. 11. 12.
1980년대-17 1985년 8월. 양평 용문사 계곡으로 놀러갔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휙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전철타고, 기차타고, 버스타고 몇 시간씩 가는 먼 곳이었다. 지금은 용문사까지 겨우 30-40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용문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역시 늘 함께 다니는 동무들과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녀석은 만화 그리던 동무인데, 지금은 만화 그리는 건 포기하고 미얀마에 유학 가 있다. 미얀마의 불교대학은 전액 국고장학생이어서 외국학생들도 완전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용문사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는 이때도 여전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사람은 변하고 바뀌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으니, 지구에서 위대한 존재는 나무가 분명하다. 어쨌거.. 2011. 11. 3.
1980년대-16 김영록 선생님의 도움으로 잡지사에 취직을 했다. 월간 '현대해양'. 얼마 전에 폐간을 했다고 들었다. 안국동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면접을 보러 간 날 시험을 봤다. 이력서만 내고 면접을 보는 것으로 입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는 시험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시험은 글쓰기, 즉 논술이었다. '한국의 바다'를 주제로 원고지 10매를 쓰라고 했다. 즉석에서 원고지를 받아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막히지 않고 곧바로 써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월간 현대해양은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바다전문 잡지였다. 당시 바다 전문잡지라야 전체 잡지 가운데 딱 두 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나마도 내용이나 수준은 형편없었다. 삼.. 2011. 11. 3.
1980년대-15 양평 사는 동무와 지리산 종주를 떠났다. 결론은, 중간에서 돌아왔다. 저질 체력에 무리한 산행으로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이다. 중간에 텐트를 치고 이틀을 묵었지만 무릎이 쉽게 낫지 않았다. 결국 첫번째 지리산 종주는 실패했다. 동무에게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80년대 카메라도 거의 없던 시기에 이런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일회용 카메라를 구입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11. 11. 3.
1980년대-14 시흥동에 헌책방인 '씨앗글방'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책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고, 종로도서관에서 장소를 옮긴 독서회를 기반으로 독서회원도 빠르게 늘었다. 그들은 대게 노동자들이었으며 파편화되어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노동조합 활동이나 단순한 모임을 갖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나마 독서회는 공개적으로 '순수한 모임'을 지향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독서회원 가운데 노동자 회원들은 노동현실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고,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무식'하다는데 있었다. 우리는 독서회와 별개로 '검정고시 모임'을 따로 운영했고, 그 과정을 통해 여러 명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 2011. 11. 3.
1980년대-13 행당동 동무의 집에서 찍은 사진. 셋이 항상 몰려다니며 질리지도 않고 놀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늘 목구멍까지 차 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청춘의 한 때를 마냥 억압하기에는 우리는 철이 없었고, 이렇게 동무들이 너무 좋았다. 우리는 여행도 다니고,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젊은 한 때를 보냈다. 가지 않아도 될 군대를 갔지만, 가장 큰 행운은 이 동무들을 얻은 것이다. 2011. 11. 3.
1980년대-12 전역을 하고, 우리는 계속 만났을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무가 되었다. 어리석지만 내가 가진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인데,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여러번의 선택이 있었지만 그리 잘못되거나 후회하지 않은 걸 보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 하다. 군대 있을 때, 나는 몇 명의 선배와 동기를 마음으로 선택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들과 계속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다 이뤄진 건 아니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전역하고 몇 년 살지 못하고 급성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주 만나던 동기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만남이 뜸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 속 동무들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가깝다. 우리는 날마다 만나는 것도 부족해서 친구의 집에서 먹고.. 2011. 11. 2.
1980년대-11 김영록 선생님의 모습. 84년 10월에 전역을 하고, 다시 독서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김영록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김영록 선생님은 당시 한양아파트에 살고 계셨고, 헌책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독서회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 또 선생님께서도 흥미를 갖고 계셔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서회에 참석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때가 83년 후반이거나 84년 초인 걸로 알고 있다. 김영록 선생님을 만난 것은 여러가지로 큰 행운이었다. 그때는 선생님, 스승님으로 모실만한, 본배우고 가르침을 구할만한 어른이 주변에 없었는데, 김영록 선생님께서 우리의 스승님이 되어주셨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시고, 세계 곳곳을 여행한 경험, 일제 강점기에 이미 대학공부를 하셨을만큼 지식인이었던 선생님께서 독서회에 참석하시자 독서회는 마치 날.. 2011. 11. 1.
1980년대-10 휴가 나와서 들른 씨앗글방에서 동무들을 만나다. 1982년 12월. 휴가를 나와도, 부대에 있어도 20대 때는 삶이 무거웠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삶이 무겁고, 우울하고,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암울했다. 게다가 어리석기까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책읽기였다. 하숙집에서도, 집에서도, 부대에서도 늘 책을 읽었다. 새책을 살 여유가 없었기에, 헌책방에서 가져오거나 구입한 책들을 쌓아두고 닥치는대로 읽었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현실을 잠시 떠날 수 있고,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의 거의 모든 것은 책에서 배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다. 이 당시-70,80년대-가장 대중적인 책은 '문고본'이었다. 삼중당 문고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을유문고며, 심지어 .. 2011. 11. 1.
1980년대-09 흔치 않은 훈련 사진. 팀스피리트인지 동계훈련인지...일병 말, 상병 초쯤 되지 않았을까. 우리 부대는 전방 바로 뒤에 있는 포병부대라 훈련이 많았다.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일주일에 한 번 비상훈련은 아예 치지 않고도, 대대적인 훈련이 두 달에 한 번씩이다. 훈련이 싫다기 보다는, 훈련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귀찮고 힘든 것이 싫다. 훈련도 대충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발생하는 시간-싸이렌이 울린다-부터 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실제 상황처럼 일처리를 하게 된다. 부대에서 보직에 따라 소각할 서류, 물품의 분류와 관리부터 시작해 완전군장 준비, 군수행정에 필요한 서류 준비, 각종 현황판, 지도, 비밀문건 등 확보...전쟁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두꺼운 나무상자에 서류를 넣고, 트럭에.. 2011. 11. 1.
1980년대-08 나에게는 귀하고 뜻깊은 사진이다. 병장을 달고 훈련을 나가서 찍은 사진인데, 왼쪽의 인물은 나와 같은날 입대한 동기이자 군번이 3번 차이가 나고, 훈련소부터 쭉 함께 있었던, 그뿐 아니라, 나의 대부이자, 빛과 같은 존재였으며, 여전히 그리운 동무이기도 하다. 의무대에 있던 동기는, 사람이 너무 선하고 밝아서 그를 보고 있으며 마치 밝은 빛이 뿜어져나오는 듯 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 속에서도 빛나고, 사람을 끌어들이고, 늘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 동무와 비교하면 나는 늘 어둡고 우울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에게서 나와는 전혀 다른, 빛과 따뜻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동갑에 동기였지만 그는 나의 롤모델이었으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2011. 11. 1.
1980년대-07 군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때가 1980년대임을 생각한다면. 취사장 뒤쪽 공터에서 동기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재경이, 나, 대욱이, 규정이, 종식이, 기영이, 그리고 9월군번 고참인 이경영. 뜬금없이 이경영이 쌀바가지를 들고 서 있는 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고참이었던 이경영은 우리들과 상당히 친했다. 고참 가운데 '좋은 사람'이었던 이경영은 재주도 많았고, 사람도 좋았다. 이 사진에는 빠졌지만, 다음 사진에 나올 인물이 동기인 용수. 재경이는 고향인 안중에서 유지가 되었고, 대욱이는 고향인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규정이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종식이는 경찰이 되어 지금은 꽤 계급이 높다고 들었다. 기영이는 양평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이장을.. 2011. 10. 31.
1980년대-06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사수가 전역을 했다. 졸지에 끈 떨어진 강아지가 되어 구박덩어리가 되었는데, 직속 고참(지금은 '선임'이라고 하나보다)이 없는 설움을 그때부터 당했다. 논산훈련소 23연대. 훈련을 마치고 후반기교육도 없이 곧바로 춘천101보로 왔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팔려가길 기다렸는데, 주특기가 좋은 놈들은 일찍 보직 좋은 곳으로 팔려나가고, 나처럼 주특기도 없는 훈련병들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결국 일주일을 꽉 채우고, 트럭에 실려 깊은 산길을 구불구불 넘어 자대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주특기는 받지 못한 상태. 자대로 출발하면서 급하게 받은 주특기가 960. 군수행정병이었다. 처음 소집 통지서를 받아 모인 원광공전 운동장부터 함께 온 동기는 딱 한 명. 그 친구.. 2011. 10. 31.
1980년대-05 나들이 나와 도시락을 먹는 사진. 하지만 놀러 나온 건 아니고, 동식이 형 아버님 묘소를 찾아 간 길이었다. 내 머리가 짧은 걸 보면 휴가 때인듯도 하다. 그렇다면 1983-4년 사이가 된다. 장소는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진이 있어 그날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때는 형제처럼 가깝던 사이였지만, 서로 가는 길이 달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이 정확히 맞았다. 지금도 서로 잘 살고 있는 줄은 알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서로 바쁘기도 하고,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도 하고. 동식이 형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도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 물론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남처럼 지내지만, 그건 이복형제들도 마찬가지니까.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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